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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감독 인터뷰
2004-04-26

제5회 전주국제영화제의 개막 이틀째를 맞은 24일 덕진예술회관에서는 봉준호(35)의 <인플루엔자>(사진), 유릭와이(38)의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 이시이 소고(47)의 <경심>(鏡心) 등 한국ㆍ홍콩ㆍ일본 감독의 중편을 모은 `디지털 삼인삼색'이 선보였다. 영화 상영이 끝난 뒤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와 이날 밤 전주시청 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의 내용을 간추려 싣는다.

소감을 말해달라.

▲봉준호 = 영화 내용이 폭력적이어서 배우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촬영을 마친 뒤 한방치료를 받아야 했던 노인도 계셨다. 영화가 끝나면 키스했던 기억 등 아름다운 추억이 남는데 우리 영화에서는 몸에 상처만 남았다고 말하더라. 배우들에게 감사한다.

▲유릭와이 =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해준 전주영화제에 감사한다. 시간적 제약은 있었지만 전달하려는 아이디어는 담을 수 있었다. 무성영화에 대한 헌사(오마주)를 바치고 싶었다. 오늘날 통용되는 영화 문법은 다 그때 만들어졌다. 무성영화의 전통을 되살리는 작업을 최첨단 기술인 디지털로 해보고 싶었다. 무성영화가 가졌던 순진무구한 표현의 직접성을 말하려고 했다.

▲이시이 소고 = 전주영화제의 의뢰가 아니었다면 시도할 수 없는 작품을 남기게 됐다. 제작과 촬영도 직접 했고 최소한의 배우와 스태프만 썼다. 투자를 받아서 영화를 만들면 이런저런 간섭이 있게 마련이다. 이번에는 정말 자유롭게 만들었고 소중한 경험이 됐다.

폐쇄회로TV(CCTV) 화면으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구상한 계기는 무엇인가.(이하 봉준호)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에 학부모들이 집에서 수업장면을 볼 수 있도록 CCTV가 설치된 것을 보고 묘한 기분을 느꼈다. 가장 사랑하는 아이를 차갑고 비정한 시선으로 감시하는 듯한 상황을 보고 영화를 구상하게 됐다.

카메라를 설치한 지점은 원래 CCTV가 있는 곳인가.

▲스태프에게 CCTV가 설치된 모든 지점의 목록을 만들어보라고 주문했다. 우리가 상상하는 곳 이상으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이한 곳을 해볼까도 생각했으나 도로나 지하철역, 현금출납기 부스 등 자연스런 곳을 골랐다.

배우의 연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로도 행인과 배우들이 뒤섞여 있다. 카메라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하다보니 우리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주인공들은 연극무대에서 연기를 익힌 사람들이다. 모든 화면이 먼 거리에서 냉정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것이어서 표정이나 대사보다 행동이 중요했다.

처음의 의도에서 달라진 점은 없는가.

▲두 편의 장편을 연출하는 동안 정교한 계획을 세우고 세세한 부분까지 통제했으나 이번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처음에는 페이크(가짜) 다큐멘터리로 꾸미려고 했으나 촬영이 진행되면서 폭력 드라마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제목도 <인간 조혁래>에서 <인플루엔자>로 바뀌었다. 창호지에 먹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폭력에 점점 익숙해지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염된다는 뜻이다.

화면이 거칠게 보이고 초점이 어긋나 보이는데 어떻게 촬영했나.(이하 유릭와이)

▲카메라 앞에 돋보기를 들이대거나 후반작업 때 초점을 흐리게 하는 방법으로 옛날 필름의 질감을 만들어냈다. 디지털 화면은 차갑게 느껴질 수 있다.

당신이 만든 영화마다 댄스홀 장면이 나오는 까닭은.

▲전통적인 사교춤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디스코텍이나 레이브 파티가 익숙하다. 댄스홀은 나에게 향수를 자극하는 장소다.

마지막 반전은 해피 엔딩 공식을 지켜온 무성영화를 패러디한 듯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영감을 얻으려고 했다.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결정을 못했는데 남자 배우의 제안을 즉흥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특스트보다 형식이다.

지아장커 감독이 신작을 만든다고 하는데 이번에도 촬영을 맡는가.

▲물론이다.

디지털로 제작한 소감은 어떤가.(이하 이시이 소고)

▲ㅡ내 자신도 놀랐다.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나는 흑백논리를 좋아하지 않고 경계 부분에 흥미가 많다. 디지털로 이런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을 보고 자살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실제 사건을 반영한 것인가.

▲영화를 만들 때 사회문제를 반영하는 것은 피할 수 없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자살 사이트에 접속해봤는데 놀랄 만큼 많았다. 사이트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 자체가 지금 사회를 반영한다고 본다.

주인공이 여행한 동남아의 풍경이 인상적이다. 혹시 제작비가 초과되지는 않았나.

▲배우 두 명과 조수 한 명을 데리고 로케를 떠나 예산을 맞출 수 있었다. 소형 카메라와 삼각대가 장비의 전부였고 이코노믹 비행기 좌석에 가장 싼 숙소를 골랐다. 사전 답사는 하지 않았고 아는 곳을 찾았다. 장소는 절대 비밀이다.

다른 감독의 영화를 서로 평가해달라.

▲봉준호 = 이시이 감독은 자연의 이미지를 잘 표현해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냉혹해보이기 쉬운 디지털 카메라로 연두색 숲과 코발트빛 하늘을 아름답고 생생하게, 심지어 몽환적으로 포착한 것을 보고 놀랐다. 유릭와이 감독한테서는 과감한 포커스 아웃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우리는 1㎝라도 초점이 빗나갈까봐 신경쓰는데 통쾌하게 느껴졌다. 내러티브나 인물을 망각할 정도로 다음 장면의 이미지가 기다려지더라. 기술적이거나 미학적인 제약은 우리가 제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유릭와이 = 다른 두 감독의 프로젝트를 전해듣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가장 흥미로웠고 결과도 훌륭했다. CCTV를 소재로 디지털 영화로 만든 것은 적절하고 탁월했다. 이시이 소고 감독의 영화 화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HD 카메라로 찍은 줄 알았다.

▲이시이 소고 =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보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에 찍히지 않은 부분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유릭와이 감독이 최첨단 매체로 무성영화를 만든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새로운 기술로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 것을 나도 지향해왔지만 유리와이 감독에게 한수 배워다.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

전주국제영화제가 해마다 기획 제작해 상영하는 특별프로그램 `디지털 삼인삼색'이 24일 오후 덕진예술회관에서 선보였다.

올해는 봉준호(35)의 <인플루엔자>, 유릭와이(38)의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 이시이 소고(47)의 <경심>(鏡心) 등 한국ㆍ홍콩ㆍ일본 대표감독의 중편을 모았다. 디지털이라는 형식을 제외하고는 각기 다른 주제와 소재를 택하고 있으나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에서 새로운 실험을 모색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인플루엔자>는 평범한 시민이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한강 다리, 지하철역 화장실, 지하철 플랫폼, 주택가 골목, 은행 창구, 현금인출기 부스, 지하주차장 등의 폐쇄회로TV(CCTV)에 찍힌 화면으로 구성한 작품.

생활고에 허덕이는 30대 남자 조혁래는 지하철에서 순간접착제를 팔기 위해 화장실 거울 앞에서 호객행위를 연습한 뒤 지하철에 오르지만 경비원에게 끌려나온다. 허기를 메우기 위해 골목길 쓰레기를 뒤지던 그는 현금인출기 부스에서 강도짓을 벌이는가 하면 주차장에서 무지막지한 폭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생활고에서 비롯된 조혁래의 폭력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강도가 높아질 뿐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도 전이돼 급속하게 번져나간다.

<살인의 추억>으로 흥행감독 반열에 오른 봉준호 감독은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에 학부모들이 집에서 수업장면을 볼 수 있도록 CCTV가 설치된 것을 보고 아이를 감시하는 듯한 기분을 느껴 영화를 구상하게 됐다"면서 "처음에는 페이크(가짜) 다큐멘터리로 꾸미려고 했으나 촬영이 진행되면서 폭력 드라마에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의 무대는 가상의 도시 플라스틱 시티의 지하 호스텔. 혹독한 추위로 땅 위에서 생활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곳의 문지기는 맥주 캔을 모아 생계를 잇는다고 해서 기린이라 불리는데 댄스홀에서 커플들의 춤을 지켜보다가 신비로운 매력을 지닌 불법 이민자 란란을 만나게 된다.

<천상인간>의 연출자이자 지아장커 감독의 촬영 파트너로도 이름난 유릭와이 감독은 "무성영화에 대한 헌사(오마주)를 바치고 싶어 최첨단 기기인 디지털 카메라로 무성영화를 찍었으며 카메라 앞에 돋보기를 들이대거나 후반작업 때 초점을 흐리게 하는 방법으로 옛날 필름의 질감을 만들어냈다"고 밝혔다.

<경심>은 시나리오를 쓰는 여배우의 신비한 경험을 소재로 삼았다. 그는 마음 속에 중요한 어떤 것을 잃어버려 힘들어하다가 거리에서 자신의 그림자와 같은 외로운 여인을 만나게 되고 영화 일을 벗어나 동남아로 여행을 떠난다.

<역분사 가족>, <물 속의 8월>, <꿈의 미로> 등의 작품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이시이 소고 감독은 "전주영화제의 제의가 아니었다면 이런 작품을 만들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며 주최측에 감사를 표시한 뒤 "최소한의 배우와 스태프로 무엇을 담아낼 수 있을지 충분한 실험을 했고 결과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디지털 삼인삼색'은 26일 오후 5시와 28일 오전 11시 덕진예술회관에서 두 차례 더 상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