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얼마간 앞둔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에 막 둥지를 튼 총리(휴 그랜트)는 식음료 담당자 나탈리(마틴 매커친)에게 호감을 가지며, 동생과 바람을 피운 아내를 떠나 마르세유에 온 작가 제이미(콜린 퍼스)는 포르투갈 출신 파출부 오렐리아(루치아 모니즈)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낀다. 대니얼(리암 니슨)은 사랑했던 아내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고, 양아들 샘은 미국에서 온 조안나에게 잘 보이려고 고민 중이며, 총리의 여동생 캐런(에마 톰슨)은 남편 해리(앨런 릭먼)의 부정을 눈치챈 뒤 시름에 빠진다.
해리의 회사에 근무하는 새라(로라 리니)는 회사 동료 칼(로드리고 산토로)을 짝사랑하지만 한마디 고백도 못하며, 사랑하는 친구 피터와 줄리엣(키라 나이틀리)의 결혼을 접하는 마크(앤드루 링컨)의 표정은 우울하다. 여기에 마약중독에서 빠져나온 나이든 록 가수 빌리 맥(빌 나이히), 화끈한 미국여자들과 즐기기 위해 미국행을 결심하는 콜린(크리스 마셜) 등이 뒤얽히며 사랑의 갖가지 모습이 펼쳐진다. 이 가운데 드러나는 사랑의 표정은 이들의 배경과 사연만큼이나 다양하다. 신분의 장벽을 넘어서는 사랑, 언어를 뛰어넘는 사랑, 믿음을 잃어버린 사랑, 이성 대신 선택한 가족에 대한 사랑, 우정과 갈등하는 사랑, 진득한 우정에서 배어나오는 사랑 등등, <러브 액츄얼리>는 사랑에 대한 일종의 인류학적 보고서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물론, 리처드 커티스 특유의 유머 감각이 없었다면 이 ‘사랑의 소우주’는 팍팍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소심하던 총리는 미국 대통령이 나탈리를 집적대는 모습을 보고 강경한 대미정책을 주장하며, 빌리 맥은 TV쇼에 나와서 “마약은 사지 마세요. 록 스타가 되면 사지 않고도 즐길 수 있다”고 지껄인다. 총리가 사랑의 열병에 시달리다가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초상화를 보며 “댁도 그랬수?”라고 묻는 장면은 압권이다.
억지스런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기보다 캐릭터 자체에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커티스식 유머는 커플에서 커플로 시선을 옮겨가느라 정신이 없을 관객에 대한 세심한 서비스인 셈이다. 영화 초반부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의 주제가인 <사랑은 어디에나>(Love Is All Arond)의 개사곡을 등장시키는 데서부터, 브리짓 존스를 연상케 하는 “허벅지가 두꺼운” 나탈리, <어바웃 어 보이>가 떠오르는 학예회 장면, <노팅 힐>과 유사한 총리의 러브스토리 등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워킹 타이틀과 리처드 커티스의 ‘자기반영적 유머’ 또한 흥미롭다.
<러브 액츄얼리>를 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음악이다. 리처드 커티스의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음악은 수십명의 캐릭터와 그만큼의 러브스토리를 설명하는 내러티브의 기능을 수행한다. 결혼식장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스의 <All You Need Is Love>, 대니얼 아내의 장례식에서 나오는 베이 시티 롤러즈의 <Bye Bye Baby>, 총리의 들뜬 마음을 표현하는 포인터 시스터즈의 <Jump (For My Love)>, 칼에 대한 새라의 감정이 드러나는 노라 존스의 등의 음악은 대사와 설명 대신 캐릭터의 내면을 단박에 드러내는 요소다. 음악은 캐릭터와 캐릭터 사이를 옮아가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사실, 원대한 야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사랑의 ‘모든’ 것을 드러내준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엔 동성간의 사랑이 빠져 있고, 피부색이 다른 사랑에 대한 은근한 불편함도 드러난다. 또 캐런과 새라의 에피소드에서 그렇듯, 중년에 가까운 여성들의 사랑은 소외돼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분명 백인 중산층이 느낄 수 있는 팬시한 사랑에 한정해 따사로움을 베풀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러브 액츄얼리>는 이러한 약점에 대해 눈감아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하는 영화다. 한편의 영화에서 동시에 만나기 힘든 당대의 대배우들이 등장하며, 푸근한 로맨스와 기분 나쁘지 않은 웃음이 행복하게 공존하는데다, 무엇보다 삶의 진실이 투명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브 액츄얼리>는 모든 사랑을 보여주진 못한다 해도, ‘모든 곳엔 사랑이 정말로 있다’는 점만큼은 설득력 있게 일깨운다. 액추얼리!
:: 리처드 커티스에 관해 알고 싶은 몇 가지
여러 편의 시나리오와 한편의 연출작“워킹 타이틀이 훌륭한 성적을 유지해온 건 사실이지만 알고보면 그것은 순전히 리처드 커티스(47)라는 한 작가의 공적이다.” 한 영국영화계 인사의 말은 약간의 과장이 있을지언정, 거짓은 아니다. 워킹 타이틀이라는 영국의 소규모 독립 영화사를 세계에 알린 1994년의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은 일종의 신화였고, 이 신화의 최고 영웅은 바로 커티스의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을 닮은, 소심하면서도 우유부단한 남자와 미국 여자, 그리고 떠들썩한 주변 인물들의 이 소박한 사랑 이야기는 워킹 타이틀을 세계 영화계에서 중요한 제작사 중 하나로 끌어올렸고, 휴 그랜트를 모든 여성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스타로 격상시켰으며, 450만달러로 전세계 수익 2억5천만달러를 기록했을 뿐더러, 영국 영화산업의 지형도를 일거에 바꿔놓았다.
사실, 커티스가 <네번의…>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둔 것은 요행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영국에선 손꼽히는 TV 시리즈 작가였다. 옥스퍼드대학을 나온 그는 TV코미디쇼 의 각본팀에 합류하면서 경력을 쌓기 시작해, 곧 영국 역사를 코믹하게 변주한 80년대 최고 인기시리즈 <블랙애더> 시리즈의 각본을 맡아 성공의 가도에 섰다. 80년대 말 그는 <블랙애더>의 주인공이자 공동 각본 저술자이며, 옥스퍼드 친구이기도 한 로완 앳킨슨과 함께 <미스터 빈> 시리즈를 만들었고, 첫 영화 시나리오인 <톨 가이>를 통해 에마 톰슨을 무명배우에서 톱스타로 올려놓았다. 워킹 타이틀에 합류해 팀 비번과 에릭 펠너, 던컨 켄워시 등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그는 2001년 영국의 언론 <가디언>에서 선정한 ‘미디어계에서 영향력 있는 100인’ 중 10위에 오르며 위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복잡한 영화를 감독 데뷔작으로 삼은 것에 대해 그는 “새 작품을 구상하던 중 내가 로버트 알트먼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쉬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다. 또 내가 좋아하는 우디 앨런의 중기작 <한나와 그 자매들> <범죄와 비행>에도 마찬가지로 멀티 캐릭터, 멀티 스토리가 존재한다. 또 <스모크>나 <펄프픽션>도 그렇다. 언제나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에 이런 구상을 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차기작으로 자신의 부모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을 준비 중이며, 올해 12월31일 특집방송될 30분짜리 <블랙애더> 스페셜과 현재로선 영화가 될지 TV시리즈가 될지 불투명한 <미스터 빈> 프로젝트도 챙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