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의 ‘비열한 거리’에서 자라난 소년들, ‘의문의 강’에 얄궂은 운명과 우정을 묻다.

딸이 죽었다. 19살, 남자친구와 라스베이거스로의 핑크빛 도주를 꿈꾸던 바로 전날 밤이다. 외출하던 딸은 “나중에 봐요”(later)라고 살가운 인사를 건넸지만 이들 부녀에게 더이상 ‘나중에’는 없었다. 머리에 총상을 입고 온몸을 둔기에 맞은 채 숲속에 버려진 딸의 죽음에 오열을 터트리는 아버지는 “경찰보다 먼저 찾아서 내가 죽여버리겠어”라며 ‘용서받지 못할 자’를 향해 총알을 장전한다. “히틀러의 모친은 마지막 순간에 유산을 포기했다지…. 그때 데이브가 아니라 우리가 그 차를 탔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십중팔구 미쳤을 테고, 결혼도 못했을 거고, 아이도 없었을 거고, 그럼 내 딸이 죽지도 않았을 텐데….” 그러나 현실은 가정법 과거완료의 거짓을 받아들일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시간을 거슬러올라가자. 25년 전 보스턴 외곽에 살던 3명의 소년, 지미와 션과 데이브는 우정을 약속하듯 마르지 않은 시멘트바닥에 자신들의 이름을 아로새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데이브’의 이름이 반 토막쯤 쓰여졌을 때 소년들은 낮선 남자의 호령소리를 듣는다. 경찰을 가장한 남자는 데이브를 차에 태워 유괴하고 그에게 성적 학대를 가한다. 데이브는 필사적으로 탈출하지만 사건 이후 아이들은 점점 소원해진다. 성인이 된 이들은 여전히 한 동네에 살고 있지만 더이상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지 않는다.

<미스틱 리버>는 유년기에 일어난 한 사건의 파장으로 돌이킬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든 세명의 친구들의 이야기다. 성인이 된 소년들의 삶은 제각각이다. 강도사건으로 2년간 복역한 지미(숀 펜)는 출감 뒤 손을 씻고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며 살아가지만 그의 뒷모습엔 여전히 “전과자의 침울함”이 깃들어 있고, 가출한 아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웅크리고 살아가는 강력계 형사 숀(케빈 베이컨)은 매일 피범벅이 된 사고들을 무덤덤하게 접해야 한다. 그러나 쥐가 들끓는 지하에 갇힌 채 사흘 동안 두 남자들에게 번갈아가며 성폭행당한 데이브(팀 로빈스)는 자신에게서 “젊음의 꿈”을 앗아간 유년의 악몽을 마치 “흡혈귀상처”처럼 명징하게 안고 살아가야 한다.

이런 그들이 다시 만난다. 숀은 숲에 버려진 사체가 지미의 딸임을 알고 경악하고, 사건이 나던 밤 ‘강도와 승강이 끝에 부상을 입은 ’데이브는 강력한 용의자로 떠오른다. 영화는 끝까지 딸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가 하는 ‘후더닛(whodunit)무비’의 긴장감을 잃지 않는 채 이 세 남자의 인생이 어떻게 서서히 이그러져가는지를 천천히 그리고 잔인하게 기술한다. 그리고 증발했다고 믿어 온 폭력의 미진이 얼마나 오랫동안, 강력하게, 인간에게 잠복될 수 있으며 결국 어떻게 주변부까지 뒤흔들고야 마는지를 거침없이 보여준다.

71년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를 시작으로 ‘감독’의 직함을 단 올해 일흔세살의 노장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24번째 연출작인 <미스틱 리버>는 더이상 누군가를 단죄할 수 없는 모호한 세계에 던져진 가련한 인간들의 이야기다. “아내는 죽었고, 교도소보다 딸이 더 무섭더군… 세상에 우리만 버려진 듯했어”라며 출소 뒤 상황을 기억하며 울먹이는 지미나, “때리면서도 혼자란 게 무서웠어, 낯선 행성에 떨어진 외계인처럼…”이라며 아내의 품속에서 아이처럼 오열하는 데이브, 집을 떠난 아내로부터 걸려온 대답없는 전화에 대고 혼잣말을 지껄이는 숀에게나, 세상은 천길 물속처럼 외로운 곳이다.

어두운 강 위를 낮고 천천히 훑듯이 비행하는 카메라는 때론 어두운 기운이 엄습한 보스턴의 골목을 서성거린다. 찰스강과 함께 보스턴을 감싸고 흐르는 ‘미스틱강’ 근처 이스트버킹엄의 황량한 공기의 습도와 온도는 데니스 르헤인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미스틱 리버>의 그것과 탁월한 조화를 이룬다. 또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배우로 등장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인 <미스틱 리버>를 통해 노련하고 기름기 없는, 발전을 멈추지 않는 연출력을 선보인다.

어디서부터 이들의 비극은 시작된 걸까? 무엇이 그들을 인생을 파국으로 내몰 만한 죄였나? 끌려가던 친구를 잡지 않은 것? 그의 고통을 방관한 것? 아니면 범인을 자신의 손으로 단죄한 것? 혹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한 것? 그러나 이 모든 사건과 의문을 삼켜버린 <미스틱 리버>는 사실, ‘어디로부터’가 아니라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물어야 하는 영화다.

:: <미스틱 리버>의 배우들 미스틱 강가엔 배우들이 산다

<미스틱 리버>는 배우들의 이름만으로도 심장박동이 가빠지는 영화다. <아이 앰 샘>의 숀 펜은 딸의 허망한 죽음 앞에 오열하는 애처로운 눈매 아래, 다문 이 사이로 거센 복수의 입김을 내뿜는 복합적인 캐릭터인 지미를 연기했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신작 에서 심장이식수술 뒤 심장주인의 부인을 사랑하게 되는 남자로 등장해 올해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던 그는 과 <미스틱 리버>의 호연으로 아카데미 주연상에 거론되고 있는 상태. 한편 <플레이어> <허드서커 대리인> <쇼생크 탈출> 등의 영화에서 늘 자신감 넘치고 모범적인 표정과 말투로 등장했던 팀 로빈스는 <미스틱 리버>에서 잔인한 과거의 기억 속에 현재를 잠식당한 남자 데이브로 출연한다. 그는 영화를 위해 강력한 보스턴 악센트를 구사하며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귀여운 두눈에 어둡고 공허한 그늘을 드리웠다. 또한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일어난 비극적 사건을 수사해야 하는 강력계 형사 숀으로 등장한 케빈 베이컨은, 원작에 비해서는 가장 비중이 줄어들긴 했지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감독의 목소리를 대신한다.

마샤 게이 하든

로라 리니

<미스틱 리버>에는 이 세 남자 옆에 세명의 아내가 나란히 등장한다. 침묵하는 입술만 등장할 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숀의 아내를 제외하고 지미와 데이브의 아내를 연기한 배우들은 눈여겨볼 만하다. <트루먼 쇼>에서 시리얼박스를 카메라를 향해 들어올리며 가증스런 미소를 짓던 트루먼의 아내로 알려진 로라 리니는 오프 브로드웨이 극작가였던 로물루스 리니의 딸로 에미상 수상뿐 아니라 국내 미개봉작인??????? <유 캔 카운트 온 미>로 아카데미 후보에 오를 만큼 연극, TV, 영화를 전방위로 오가며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프라이멀 피어>에 등장한 그녀를 보고 자신의 연출작 <앱솔루트 파워>에 등장시켰고 <미스틱 리버>에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견고히 지켜내는 숀의 아내 아나베스의 옷을 입혔다. <밀러스 크로싱>의 매혹적인 팜프파탈을 거쳐 <폴락> <스페이스 카우보이> 등에서 지적이고 강인한 여자로 분했던 마샤 게이 하든은 남편 데이브의 이상증세와 범죄여부에 대한 불안감으로 전전긍긍하는 나약한 여자 셀레스트를 연기했다. 이외에도 <매트릭스>의 모피어스의 진중함을 그대로 들고온 로렌스 피시번은 데이브를 가장 강력한 살인용의자로 지목하는 숀의 강력반 파트너 화이티 파워로 등장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석양의 무법자>에 함께 출연했던 오랜 동료 엘리 왈라치는 십여년 전 일어난 강도사건에 대해 증언하는 주류판매점 주인으로 카메오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