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바라보는 9편의 드라마
동정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두려움과 떨림
Fear and Trembling
감독 알랭 코르노/ 프랑스, 일본/ 106분/ 월드 판타스틱
국내에서도 인기를 누리는 작가 아멜리 노통의 체험 소설을 영화화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5살까지 살았던 벨기에 여자 아멜리는 일본 문화를 향한 향수와 매혹에 떠밀려 각고 끝에 대기업 유미모토의 1년 계약 사원으로 취직한다. 그러나 골프 약속을 승낙하는 간단한 영문편지를 아무런 이유도 듣지 못하고 수십 차례 퇴짜맞는 첫날부터 그녀는 개인의 능력을 합리적으로 이용하기보다 하급자의 두려움과 떨림어린 복종을 요구하는 일본 조직문화에 느린 고문을 당한다. 게다가 아멜리의 눈에 일본적 미의 화신처럼 보였던 직속상사 미스 모리는 극악한 네메시스가 되어 그녀를 무의미한 단순노동의 노예로 전락시킨다. ‘사무실 호러’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숨통을 죄는 불합리한 관행의 묘사가 신경증 상태에서도 적수 모리의 미모에 대한 매혹과 피학적인 쾌감을 떨치지 못하는 아멜리의 심리와 묘하게 뒤섞인다. 알랭 코르노 감독의 전작 <세상의 모든 아침>을 상기시키듯 바흐의 음악이 쓰인 이 영화는 극중에 언급되는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의 괴이한 변주, 또는 안티테제로 느껴진다.
헐리우드 북쪽
Hollywood North
감독 피터 오브라이언/ 캐나다, 영국/ 90분/ 월드 판타스틱
영화산업 현장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영화제작기’. 누군가 말했었던가, ‘카메라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뒤에 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할 뿐’이라고. 뜬구름 잡는 사람으로 가득한 영화계를 통렬히 비판하는 코미디이자 영화 만들기의 고충을 털어놓는 고백 같은 영화. 엔터테인먼트 변호사인 주인공은 모두가 탐내던 소설 <랜턴 문>의 판권을 구입해 직접 영화제작을 해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투자자의 요청으로 캐스팅한 주연배우는 캐릭터를 ‘람보’처럼 바꾸어놓고, 감독은 구로사와 아키라를 오토바이 브랜드로 여기는 상황에서 작품이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다. 스턴트맨의 소송에, 주연여배우는 조연배우와 스캔들을 일으키고, 메이킹 팀은 필름을 빼돌려 자신들의 영화를 찍고 있다. 이런 소동 속에 원작자가 촬영현장을 방문하려 하고 바비는 이 방문을 막아보려 하는데….
엘리나
Elina
감독 클라우스 해로/ 핀란드, 스웨덴/ 80분/ 패밀리
1952년 랩랜드. 깊이 사랑한 아버지를 결핵으로 잃은 가난한 늪텃집 소녀 엘리나는 병치레를 하느라 1년 뒤처진 학교로 돌아간다. 그러나 규율을 중시하고 스웨덴어를 전용해야 한다고 믿는 완고한 교사 홀름은, 핀란드어밖에 모르는 급우를 도우려던 엘리나와 충돌한다. 틈만 나면 혼자 늪으로 가 아빠와 대화하고 “아빠처럼 바른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긍지 높은 엘리나는 아빠를 ‘말썽꾼’이라고 은근히 질책하는 홀름 선생에 대한 저항을 굽히지 않는다. 그리고 생활고에 짓눌린 어머니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매일 점심을 굶는 사실을 비밀에 부친다. 사회의 일원으로 통합되는 스킬을 가르치려는 교사와 거기에 속박되기에는 너무 자유롭고 고집 센 정신을 가진 조숙한 소녀의 대결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듀바리 부인의 갈등 못지않게 숨막히는 긴장을 불러일으키며 이 성장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하늘을 나는 교실
The Flying Classroom
감독 토미 비간트/ 독일/ 114분/ 패밀리
가난한 시인 마르틴, 선장 계부를 둔 조숙한 음악가 요니, 심약한 귀족 꼬마 울리와 그를 애틋하게 돌보는 주먹 소년 마티아스를 기억하는지? <하늘을 나는 교실>은 에리히 케스트너의 명작 아동소설을 현대화한 경쾌한 학원물이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심지 굳고 의리 깊은 우리의 주인공들은 학생들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교사 유스투스의 속깊은 보살핌 속에 모험과 도전으로 가득 찬 1년을 보내게 된다. 집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의 패거리와 ‘세력다툼’ 속에 크리스마스 연주회의 악보를 잃어버린 소년들은 자작 뮤지컬 공연에 재주와 힘을 모은다. 현대판답게 마르틴의 가난은 부모의 이혼문제로 대체됐고 베를린 장벽이 존재하던 시절의 이념 갈등, 랩송과 브레이크 댄스가 드라마의 요소로 끼어든다. <품행제로>식의 베개싸움, 소년합창단의 보이 소프라노는 원작을 읽고 자란 어른 관객의 막연한 향수를 자극할 법하다.
웃는 개구리
A Laughing Frog
감독 히라야마 히데유키/ 일본/ 96분/ 월드 판타스틱
무한반복되는 하루에 갇힌 여자의 사랑을 그린 <턴>으로 제5회 부천영화제를 방문했던 히라야마 히데유키 감독의 2001년작이다. 바람을 피우고 공금횡령으로 도피한 이페이는 장인의 별장에서 생활하며 새로운 구애자와 재혼을 고려하고 있는 아내 료코에게 불쑥 나타나 도피처를 요구한다. 이혼에 합의하는 조건으로 은닉에 동의하는 료코. 그러나 벽장에 숨어 숙식과 배설을 해결하며 조그맣게 뚫린 구멍으로 아내를 방문하는 경찰, 처갓집 식구들, 새 애인, 자기의 정부를 관찰하던 이페이는 질투와 반성을 거쳐 다른 관점으로 자기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시퀀스가 바뀔 때마다 전지적인 관찰자처럼 꾸륵거리는 개구리의 모습이 암시하듯, 은신한 남자가 언제 어떻게 발각되느냐보다 평범한 생활인의 욕망이 얽히고 헛다리를 짚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허무한 유머가 영화의 초점이다.
짤 없는 운명
Destiny Has No Favorites
감독 알바로 벨라르데/ 페루/ 90분/ 베타 컬러/ 월드 판타스틱
신분상승, 금지된 사랑, 배신, 결혼과 임신. 연속극의 세계가 보여주는 운명은 ‘짤 없다’. 페루영화 <짤 없는 운명>은 남편이 여행간 사이에 저택 정원을 TV 연속극 촬영장으로 빌려준 상류층 사모님 아나가 점점 연속극의 세계에 말려들어 빚는 소동을 보여준다. 안주인의 신분을 숨기고 오디션장에서 조연 배역을 따낸 아나는 진부한 각본에 지친 감독과 로맨틱한 관계를 발전시키고, 진작에 연속극에 매료돼 있던 두 하녀도 아나를 협박해 단역을 따낸다. 작가는 아나를 경쟁드라마의 스파이라고 의심하지만 감독은 “만날 똑같은 얘긴데 스파이는 무슨 얼어죽을!”이라고 일축한다. 아나의 연기와 그녀가 제안한 플롯의 변화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아나에 대한 작가와 다른 여배우들의 적개심은 높아지고 연속극의 내용과 아나의 현실은 경계를 알 수 없게 뒤섞여버린다. 연기를 빙자해 심리적 복수를 행하는 하녀를 통해 페루 사회의 계급적 긴장을 읽을 수 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미들랜드
Once upon a Time in the Midlands
감독 셰인 메도스/ 영국, 독일, 네덜란드/ 100분/ 월드 판타스틱
<로미오 브라스의 방>을 통해 노동계급의 현실과 감정을 다뤄온 셰인 메도스 감독의 신작으로 그의 영화 중 가장 균형잡힌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서부극을 좋아한 아버지에게서 ‘셰인’이라는 이름을 지어받은 감독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미들랜드>를 웨스턴 구도를 차용한 코믹한 멜로드라마로 연출했다. 12살의 딸 말린을 키우는 독신모 셜리는 다정한 성격의 남자친구 덱과 유사가족을 이루고 살아가지만, TV 토크쇼에서 덱이 불쑥 내민 공개 구혼반지를 거절한다. 그러나 어릿광대의 밴이나 터는 덜떨어진 범죄자로 살아가던 말린의 생부 지미가 TV를 보고 발끈해 ‘가족 되찾기’에 나서면서 이들의 일상은 작은 폭풍에 휘말린다. <트레인스포팅>의 벡비 로버트 칼라일이 섹시한 건달 지미로, <노팅힐>의 라이스 아이판스가 소심하고 자상한 덱으로 분한다. <로열 테넌바움> <풀 몬티>식의 유머가 있는 ‘영국인의 사랑’.
콜드 썸머
A Cold Summer
감독 폴 미들디치/ 호주/ 82분/ 월드 판타스틱
알코올로 죽을 각오를 한 듯한 남자 바비는 어느 날 가방을 도둑맞고 분노한 여자 티아와 마주친다. 술 이름인 ‘티아 마리아’를 별명으로 지닌 화려한 그녀는 자신을 유부녀이자 재즈가수라고 소개하고 바비와 즉흥적인 섹스를 나눈다. 얼마 뒤 티아는 버스정류장에서 5년간 보지 못한 옛 친구 페드라와 만난다. 헤로인 중독으로 죽은 남자친구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페드라는 꽃가게에서 일하며 시와 노래를 쓰지만 티아와 마찬가지로 자신감 결핍에 시달린다. 배우들의 자기고백적인 대화를 디지털 비디오로 녹화한 테이프에서 대사를 뽑아내고 핸드헬드 카메라로 엿새 동안 게릴라 스타일로 촬영한 <콜드 썸머>는 세 남녀가 술과 섹스와 거짓말의 힘을 빌려 망각하고 싶어하는 고통이 무엇인지 천천히 드러낸다. 시드니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본 한 관객은 “빈속에 털어넣는 보드카 같다”고 평했다.
마지막 한걸음까지
As far as My Feet Will Carry Me
감독 하디 마틴스/ 독일/ 158분/ 월드판타스틱 시네마
영화를 보노라면 이것이 단지 상상력의 산물임을 믿기 힘들다. 전쟁과 탈출, 그리고 인간 의지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마지막 한걸음까지>는 클레멘스 포렐이라는 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는 세계대전 당시 포로가 되었다가 10여년 뒤에 다시 가족의 품에 안긴다. 이 시간의 공백 동안, 그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던 셈이다. 세계대전 중 포로가 된 포렐은 수용소에서 생활하다가 탈출한다. 그는 수용소 소장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달아나고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쓴다. 영화는 포렐이라는 인물의 내적 갈등을 부각한다. 시베리아의 서늘한 풍광과 함께, 역사적 시련에 처한 인물의 드라마를 구성하는 것. 감독인 하디 마틴스는 재미있는 경력의 소유자다. 그는 스턴트맨으로 영화계에 입문했고 이후 연출분야로 발을 옮겼다. 상영시간 2시간30여분에 이르는 대작이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김혜리, 김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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