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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세대교체 [2]
김현정 2003-06-13

샘 레이미 감독

<스파이더 맨>

값비싼 실패작들이 휩쓸고 간 폐허 위에 <매트릭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리한 제작자 조엘 실버는 뭔가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이해가 안 가는 시나리오를 들고 온 워쇼스키 형제에게 <바운드>를 먼저 만들어보라고 했다. <바운드>는 4500만달러짜리 소박한 액션영화였지만, 동성간에 흐르는 애정과 적대감, 좁은 공간을 장악하는 스토리의 긴장이 살아 있는 영화였다. 실버는 감독으로서 그들의 능력을 평가했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흐름을 바꾸는 커다란 굽이를 파냈다. 철학과 문학과 종교가 교접하고, 동양의 시선과 동선이 서양의 테크놀로지와 합창한 <매트릭스>는 성공한 한편의 할리우드영화가 아니라, 변두리에서 교류되던 동서양 관객의 취향과 문화가 한곳에서 만나 마침내 거대한 해일을 만들어낸 기념비였고, 할리우드의 오래된 블록버스터 멘털리티를 한방에 날려보낸 혁명아였다. 그런 면에서 <매트릭스>의 진정한 맞짝은 리안의 <와호장룡>이다. 아트하우스용으로 제작됐으며 자막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 거추장스런 동양의 무술영화는 누구도 예상 못하던 1억달러 이상의 흥행수익을 거둬들이며 미국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단계를 선언했다.

<배트맨>을 벤치마킹 하라

이런 거대한 변화는 갑자기 일어난 것일까. 물론 아니다. 신세기 할리우드가 끝없이 벤치마킹할 수밖에 없는 걸출한 작품은 이미 10여년 전에 등장했다. 바로 <배트맨>이다. 1989년 개봉한 <배트맨>은 당시 할리우드 상식으론 성공할 수 없는 영화였다. <프랑켄위니> <팀 버튼의 유령수업> 같은 기괴한 영화만 만든 이상한 감독 팀 버튼에다 B급 코미디언 마이클 키튼이 주연이며, 흥행 실패의 징크스를 달고 다니던 킴 베이싱어가 가세하고, 게다가 애들이나 좋아하는 이상한 만화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든 영화라니. 그러나 <배트맨>은 같은해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 <리쎌 웨폰2> <백 투 더 퓨처2>처럼 <배트맨>보다 많은 제작비를 쏟아부은 막강한 속편들이 줄을 서고 있었지만, 그해의 승자가 됐다. <배트맨2>의 결과도 제작사 워너브러더스가 만족할 만했다. 프로듀서 벤자민 멜니커는 “<배트맨>이 영화사와 팀 버튼이 타협한 결과라면, <배트맨2>는 온전히 팀 버튼의 영화”라고 말했다. 팀 버튼이 우울하게 고민하면서 만든 <배트맨2>가 상대적으로 <배트맨>보다 못한 흥행 성적을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배트맨2> 역시 <알라딘> <나홀로 집에2>에 이어 92년 박스오피스 3위에 올랐다.

그 3년 동안 할리우드는 당혹스러운 시절을 겪었다. <다이하드2> <딕 트레이시> <토탈리콜>이 박스오피스에서 고전한 것과 달리, <나홀로 집에>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귀여운 여인> <마이키 이야기> <사랑과 영혼>처럼 가벼운 무게를 가진 영화들이 묵직한 블록버스터를 빠르게 앞질러 나갔다. 그 무렵 디즈니에 있었던 제프리 카첸버그는 “할리우드는 이제 블록버스터 멘털리티를 버리고 전통적인 드라마에 주력해야 한다”는 요지의 메모가 밖으로 새어나가 곤란한 처지에 빠지기도 했다. 그랬던 시절, <배트맨>의 무엇이 80년대를 보내는 관객을 사로잡았을까. 팀 버튼은 “<배트맨>의 플롯을 설명해달라고 하면, 나는 할 수가 없다. <배트맨>은 절망, 소통의 결핍, 캐릭터, 이중성에 관한 영화다. 완전히 혼란에 휩싸여 자신이 무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이에 관한 영화다”라고 말했다. 팀 버튼은 배트맨을 어린 시절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고, 전작의 캐릭터 비틀주스처럼 돌연변이, 뭔가 잘못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먀말로 나중에 이 시리즈를 망친 조엘 슈마허가 깨닫지 못한 점이었다.

<배트맨>의 교훈은 지대했다. 감독의 독창적 스타일과 세계관, 만화·애니메이션·홍콩영화 등 미국내 마이너리티 문화의 대중적 호소력이 위기의 할리우드에 주어진 몇 안 되는 출구였다. 그 교훈을 할리우드 메이저가 실행에 옮긴 건 물론 10년이 지나서다. 당대 할리우드의 가장 기이한 사건이었던 <배트맨>의 성공을 오늘의 할리우드는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중저가 액션영화 <나쁜 녀석들>로 성공한 마이클 베이는 <아마겟돈> <진주만>처럼 제작사를 긴장시키는 가장 값비싼 영화들만 만드는 감독이 됐고, <인디펜던스 데이>로 할리우드에 새 희망을 불어넣었던 롤런드 에머리히는 <고질라>와 함께 주저앉았다. 그리고 우리는 감독 이름도 제대로 기억에 남지 않는 멍청한 대작 대신, 쟁쟁한 ‘작가’들을 여름 시즌에 만나게 된 것이다.

6월20일 미국에서 개봉하는 <헐크>의 리안은 자신만만하게 “나는 더이상 지루한 여름영화를 참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여름만 되면 변해버린다고 믿는 영화사들 덕분에 여름은 매우 길고 따분한 두달이 됐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무명이나 다름없는 호주 출신 에릭 바나를 기용한 <헐크>는 아직 결과를 알 수 없지만, <스파이더 맨>은 미국 내에서만 4억달러를 벌었다. 샘 레이미는 토비 맥과이어를 쓰기 위해 다투었던 시간을 회상하면서 “영화사 간부들은 <스파이더 맨>을 잘 알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책을 읽고 자란 나 같은 사람처럼 알진 못했다. 스파이더 맨은 곡예사처럼 날씬했지만, 그들은 근육질의 미남 배우를 쓰고 싶어했다”고 불평했다. 그리고, 샘 레이미가 이겼다.

관습을 바꾸는 사람들

할리우드는 1990년대 10년 동안만 해도 수차례 굴곡을 만들어왔다. 1990년대 중반에는 <터미네이터2> <쥬라기 공원>이 테크놀로지의 혁명을 온몸으로 웅변하면서 제왕이 됐고, 90년대 후반에는 제작비의 심리적 저항선이었던 1억달러가 붕괴되면서 영화보다 박스오피스 결과가 더 스릴있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2000년 무렵부턴 예술영화와 저예산영화, 독립영화 감독들이 엄청난 프로젝트를 떠맡게 됐다. 여기엔 의지와 우연이 함께 작용했다.

피터 잭슨은 <반지의 제왕>을 연출하기 위해 자신이 만든 특수효과회사 WETA에서 데모를 촬영해 뉴라인시네마에 보여주는 노력을 했다. 그와 달리 리안은 제작, 각본 파트너이자 만화책광인 친구 제임스 샤무스가 <헐크>를 제안받고 “리안이 좋아할 만한 주제, 감정의 억압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해서 건네주었다. 그러나 기존 블록버스터의 관습을 고집하는 <툼레이더> 같은 영화에 비해 그들의 영화는 고른 성공을 거두고 있다. 브라이언 싱어가 말한 것처럼 “15분 동안 불꽃놀이만 볼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애비 애러드가 맞았다. 사람들은 여름에만 느닷없이 바보가 되진 않는다.글 김현정 parady@hani.co.kr·편집 이다혜

애로노프스키의 <배트맨> vs 놀란의 <배트맨>

미래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신기한 블록버스터들

할리우드는 앞으로도 한동안 가느다란 지류에서 블록버스터 감독을 건져낼 것 같다. 크리스 콜럼버스가 아이들이 보고 싶다면서 작별을 선언한 <해리 포터> 시리즈는 <위대한 유산> <이 투 마마>를 연출한 멕시코 출신 감독 알폰소 쿠아론에게 넘어갔다. 프로듀서 역할은 계속하겠다고 말한 콜럼버스는 “쿠아론은 상상력의 한계가 없는 감독이며, <소공녀> <이 투 마마>에서 사춘기 아이들을 훌륭하게 묘사했다”고 그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쿠아론은 십대 초입에 들어선 해리 포터가 첫사랑을 느끼는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를 연출하게 됐다. <…아즈카반의 죄수>는 게리 올드먼과 줄리 크리스티를 새로운 멤버로 맞았고, 지난해 세상을 떠난 리처드 해리스를 대신해 마이클 갬본을 호그와트 교장 덤블도어로 세웠다.

새로운 세기의 <배트맨>은 약간 혼란스럽다. <버라이어티>는 워너브러더스가 <배트맨: 원년> <캣우먼> <배트맨5> 등 몇 가지 <배트맨>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고 몇 차례에 걸쳐 보도했다. 그러나 확실하게 감독과 주연이 결정된 영화는 <비독>의 피토프가 연출하고 할리 베리가 연출하는 <캣우먼>이 유일하다. <배트맨: 원년>은 <파이> <레퀴엠>의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배트맨/다크 나이트 리턴즈> 등을 그린 프랭크 밀러와 함께 개발 중이라는 소문이 있다. “X세대의 <배트맨>”이라는 것이 알려진 내용의 전부이지만, 80년대 미국 만화계에 혁신을 몰고온 프랭크 밀러가 스토리 작업에 참여한다면 그 결과는 심상치 않을 것이다. <배트맨5>로 알려진 또 다른 영화는 <메멘토>의 크리스토퍼 놀란이 연출할 듯하다. 놀란은 “배트맨은 가장 현실적인 슈퍼히어로이며 가장 복잡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이기도 하다. <인썸니아>를 배급한 워너브러더스와 다시 한번 작업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라고만 밝혔다.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영화 두편은 2004년과 2005년을 휩쓸 1억달러 이상의 블록버스터다. 1년 먼저 개봉날짜를 잡은 <알렉산더>는 올리버 스톤이 연출하는 대작. 콜린 파렐과 앤서니 홉킨스가 출연하며, 아버지 필립포스를 능가하는 젊은 대왕의 정복전쟁에 초점을 맞춘다. 제목이 조금 더 긴 <알렉산더 대왕>은 예산도 조금 더 많아 1억2천만달러에서 1억5천만달러 사이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감독은 바즈 루어만. 그의 전작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물랑루즈>의 니콜 키드먼이 나란히 알렉산더 대왕과 그 어머니 올림피아로 출연한다. 거칠고 야심만만한 청년의 풍모와 더불어 동성애에 탐닉한 개인적인 면도 담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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