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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이라구요?
2002-09-04

충무로 다이어리

개인적으로 꽤 즐거운 ‘외국영화 보기’가 계속된 몇달이었다. 7천원이 아닌, 7만원이라도 내고 싶었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시간30여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시각적 황홀경’으로 넘쳐났던 <마이너리티 리포트>였고, 감각적이고 아이디어 넘치는 카메라 워킹과 편집이 한수 배울 만했던 <레퀴엠>,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박수치고 노래 부르고 싶은 <헤드윅>이었으며, 언제나 샘나게 부러운 워킹타이틀사의 깜찍한 <어바웃 어 보이>였다. 앞으로도 꼭 찾아보아야 할 외국영화들은 아직도 줄줄이 사탕인 것 같다.

나는 평론가나 기자가 아니니, 내 영화적 취향에 대해 비웃지는 마시길. 흠흠.

그토록 외국산에 빠져 도락을 즐기는 와중에, 얼마 전 모 영화주간지에서 이십세기 폭스코리아의 이주성 대표 인터뷰 내용을 읽었다. ‘올 여름은 영화시장 판도 변화의 시금석. 이른 판단이긴 하지만 한국영화의 구조조정이 반드시 일어날 것. 메인 스트림의 많은 한국영화들이 실패했다는 것은 제작자들이 경청해야할 부분’이라는.

이 말이 강렬한 톤으로 다가왔다. 괜한(?) 걱정도 들었다. 내 평소 성격의 특징인 ‘오버해서 반성하기와 원망하기’가 발동했다. 맞아. 한국영화 만드는 사람들,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거 아냐? 그렇다. 나의 오버는 계속된다.

누군가는 곧 촬영에 들어갈 영화의 총촬영횟수를 70회 이상으로 잡았단다. 즉 하루에 평균 1.5신 찍겠다는 거다. 참 팔자가 늘어졌다. 스필버그는 대작 를 40회에 끝냈다고 하는데…. 누군가는 돈 벌 확신은 없지만 그저 그 감독이 꽤 재능이 있는 것 같고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의미있다 싶어서, 스타도 없고, 대중적 컨셉도 없는 이야기를 어렵게 투자자를 설득해 제작에 착수했는데, 원래 계획이나 약속을 훌쩍 넘겨 제작비를 초과해서 울상이라고 한다. ‘영화의 완성일은 며느리도 몰라. CG맨이 결정하는 거야!’라는 괴이한 농담이 충무로에 오간다는 소리도 들린다.

어느새 4억∼5억원으로 영화 한편을 만들어내는 충무로식 경쟁력은 사라져가고 있는 중이다. 요즘은 13억∼15억원짜리를 ‘저예산영화’라고 부른다. 스탭을 착취하는 사기꾼 제작자가 되지 않고서도 저예산영화를 만들 수 있는 근거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일사불란한 제작시스템과 노하우인 것이다.

우리 영화계는 요즘 너무 배부르다. 그렇다고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다니고, 스포츠 트레이너가 상시 대기중이거나, 수영장이 딸린 저택을 소유한 할리우드식 부자가 아닌, 그저 정신적으로 게으른 이상한 부자인 것이다.

넌 어떠냐고? 난 게으르진 않지만 좀 무식한 편이다. 흠흠. 지나친 헛소리라고? 왜 갑자기 입 부르튼 소리냐고? ‘구조조정’ 말이 나와서 좀 흥분한 것 같다.

80년대 초, 뒤늦게 <안개마을> <영자의 전성시대> <바보들의 행진>을 보면서 한국영화의 매력에 빠졌던 걸로 기억한다. 극장에서 본 이장호 감독의 재기작 <바람불어 좋은 날>이나 배창호 감독의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은 그야말로 내게 ‘새로운 발견’이었다.

최근 모 신문에 배창호 감독이 <꼬방동네 사람들>을 찍을 당시의 헐벗고 열악한 제작 환경을 회고한 글을 읽고 격세지감을 느꼈다. ‘돈’이 반드시 ‘좋은 영화’를 낳는 건 아니라는 당연한 생각도 다시 한번 들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힘들었는데, 나는 그 영화들로 마음의 양식을 얻었고, ‘한국영화’에 대한 구체적인 꿈을 키웠으며, 이 별볼일 없는 능력으로, 지금 한국영화를 만들고 있는 분에 넘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가난하지만 ‘형형한 눈빛’이 매서운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의 존경과 긴장을 다시 한번 한국영화에서 만나고 싶다. 오★한국영화!심재명/명필름 대표 shim@myungfil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