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색 교도복에 하얀 고무신, 설경구와 차승원의 모습이 낯설다. 이들 뒤의 벽엔 ‘웃으며 서로 돕는 오수교도소’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함께 출연하는 송윤아씨 등과 진담반 농담반 ‘껄렁껄렁’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두사람은 진흙탕에 뒹군 모습으로 나타났다.
지난 29일밤 <광복절 특사>(감독 김상진)의 밤샘촬영이 한창이었다. 8월13일밤 탈옥을 한 두 사람이 8월14일 광복절 특사에 자신들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광복절 특사>는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에 이은 김상진 감독-박정우 작가의 세번째 콤비 작품이기도 하다.
드넓은 전주 전주공고 부지 한구석에 두 개의 사동과 수백m 길이의 교도소 벽이 세워졌다. 모두 8억원이 들어간 이 세트의 모델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따왔다고 한다. 시멘트 바닥을 메우기 위해 1.5t 트럭으로 6대 분량의 모래가 바닥에 부어졌다.
이날 촬영은 ‘6년 동안 구멍을 판 끝에’ 무석(차승원)과 재필(설경구)이 마침내 탈옥에 성공하는 장면이다. 강우기에서 연신 비가 뿌려지고, 물이 모자랄까 봐 소방서에서 살수차까지 지원을 받았다. “내가 승원이형! 부르면 구멍으로 쑥 나와야 해.” 현장에서 김상진 감독의 목소리는 ‘멧돼지 김’이란 현장 별명만큼이나 크다. 사인과 함께 구멍에 숨어 있던 무석과 재필이 차례로 빠져나왔다. 밤 12시 조용한 현장에 구멍을 빠져나오는 무석의 신음과 같은 괴성만이 울려퍼진다. 감독과 스탭들은 “똥 나오듯 쑥 나와야지” 하지만, 구멍이 워낙 좁아 생각만큼 쉽지 않다.
“다시 한번 가자.” 무너진 구멍을 다시 파고 정리하는 데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주변의 쓰러진 풀도 하나하나 다시 심어야 한다. 이 장면을 찍고 비 내리는 하늘을 향해 <쇼생크 탈출>의 팀 로빈스처럼 무석이 팔을 벌리고 환호하는 장면으로 넘어가니 새벽 1시반이 훌쩍 넘었다. ‘입안에 들어올 정도로’ 많은 모기와 시도때도 없이 내리는 비는 촬영현장을 괴롭히는 주범 가운데 하나다.사실 “시나리오 한번 제대로 안 보고 오는” 설경구와 “꼼꼼히 분석을 메모한 자신만의 시나리오 3권은 갖는” 차승원은 평소 촬영에 임하는 스타일이 전혀 다른 배우들이다. 하지만 앙숙이면서 함께 탈옥하는 재필과 무석의 역을 만나 두 배우는 ‘한판 놀듯이’ <광복절 특사>의 분위기를 달구고 있었다.
“실제 교도소를 찍기도 힘들고, 죄수복에서부터 수많은 엑스트라까지… 교도소영화가 눈에 보이지 않게 돈이 많이 들어요. 우리나라에 교도소영화가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죠.” 데뷔작부터 교도소 영화를 찍어보고 싶었다는 김 감독은 이번 영화가 “<주유소…>부터 가져온 자기 스타일의 코미디를 일단락짓는 작품”이 될 것이라 말했다. “한번 필이 꽂히면 그 길로 가는 캐릭터”는 이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무석은 6년 전 굴러들어온 ‘숟가락’으로 구멍을 파지만, 막상 교도소 밖을 나오면 무얼 하겠다는 계획 하나 없는 인간이다. ‘대사보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빚어내는 웃음’이라는 김 감독 특유의 코미디 색깔이 이번 작품에선 더욱 빛을 발할 듯했다. <광복절 특사>는 10월말께 개봉 예정이다.
전주/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촬영현장 맴돌며 끄적끄적 ● 시나리오 작가 박정우 인터뷰
최근작 <라이터를 켜라>까지 흥행에 성공하며 박정우(34) 작가에게는 ‘관객 동원 1000만 돌파’라는 수식어까지 붙었다. 29일밤 그는 언제나처럼 김상진 감독의 촬영현장에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김 감독과의 우정은 10년이 넘는다. 박 작가가 91년 정지영 감독의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연출부일 때 김 감독은 강우석 감독의 조감독이었다. 연출부 출신인데다, “감독의 꿈을 이루기 위해 시나리오를 썼던” 사람인 탓에, 박씨는 깔끔한 집필실보다는 “촬영현장 모니터 뒤에서 틈틈이 연습장에 쓰는 게 훨씬 잘 써진다.”<주유소 습격사건> 때만 해도 사람들이 ‘쌈마이 코미디’라고 비판하는 데 “기분이 나빴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나름대로 세상에 대해 뭔가 할 이야기를 깔아놓았고 그것 때문에 관객들이 호응했던 것 아닐까.” 그런 믿음으로 이제까지 써온 작품이 <광복절 특사>까지 8편이다.
“3편으로 1억 받는다, 시나리오 작가의 가격을 계속 올린다”던 처음 목표 2가지를 이미 달성한 지금, 그는 이제 감독 데뷔를 앞두고 있다. <간다> <쏜다> <난다> 시리즈 가운데 첫편인 <간다>의 시나리오 초고를 막 끝냈다. “온갖 장르가 짬뽕된 버라이어티 스펙터클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너무 많이 써서 소재가 고갈된 건 아니냐”는 질문에 “머리는 괜찮은데 몸이 문제”라고 웃는다. “20대 감독기수론을 떠들고 다니며, 빨리 데뷔해야지 할 때는 시간에 쫓겨서, 또 돈에 쫓겨서 빠릿빠릿 써댔는데 이젠 몸이 안 따른다. 역시 헝그리 정신이 중요한 것 같다.” 이제 신인 ‘감독’으로서, ‘헝그리 정신’을 부르짖는 작가 박정우가 감독으로 어떤 색깔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전주/김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