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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로든 시간의 유산을 통과하고 있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리뷰
김소미 2026-01-01

#파더 - 축적의 무늬를 그리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미국 뉴저지에서, 어머니의 이야기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남매의 이야기는 프랑스 파리에서 펼쳐진다. 파더·마더·시스터 브러더라는 세 역할을 세 대륙에서 세 챕터로 구사하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패터슨>에 이은 짐 자무시 최신의 미니멀리즘이라 할 만하다. 세개의 독립된 에피소드가 느슨하게 연결되며 하나의 주제를 공명시키는 방식에서 짐 자무시는 중세시대 세폭 제단화 형식인 트립틱 구조의 대가로도 수식된다. <미스테리 트레인>(1989)에서는 멤피스라는 도시가, <지상의 밤>(1991)에서는 택시라는 공간이, <커피와 담배>(2003)에서는 커피와 담배라는 오브제가 각 에피소드를 묶었다. 다만 이번엔 낯선 이들간의 우연한 만남 대신, 가족이라는 가장 친밀해야 할 관계를 다룬다. 세 가족은 서로 전혀 모르고 그 어떤 서사적 연결고리도 없지만 롤렉스 시계, “Bob’s your uncle”이라는 관용구, 물로 하는 건배나 붉은색 미장센, 세장을 구분하는 반짝이는 물의 표면 같은 이미지 등이 은밀하게 공유된다.

자무시의 편집은 이야기를 정렬하거나 효과적으로 압축하는 데 쓰이기보다 의외의 정지와 파편화를 위해 쓰인다. 체커보드 테이블, 커피 잔, 재떨이라는 동일한 오브제의 무한 변주를 겹겹이 쌓아올렸던 <커피와 담배>에 이어 차, 커피, 담배가 있는 식탁 위의 오버헤드숏이 만드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미묘한 분절이 상기시키는 것은 가족의 거짓말이다. 톰 웨이츠가 연기하는 1부의 아버지는 완벽한 연기를 펼친다. 제프(애덤 드라이버)와 에밀리(마임 비아릭) 남매가 오랜만에 아버지를 방문했을 때 그는 마치 검소함의 화신처럼 아들이 챙겨온 음식과 용돈을 수더분하게 받아든다. 낡은 집 안 구석구석엔 사별 후 홀로 살아가는 장년 남성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짧은 재회를 마친 자녀들은 아버지의 처지를 걱정하며 떠나고, 카메라는 남는다. 문이 닫히자마자 아버지의 얼굴에서 수더분함이 스르륵 벗겨진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새로 산 소파를 덮어둔 낡은 천을 걷어버리고, 애인에게 전화해 신나게 데이트를 떠난다. 자무시는 인물의 성격이나 욕망, 너무 투명해서 사랑스럽기까지 한 허위의식을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 하나를 재현하고 관찰한다.

#마더 - 자무시의 시적 계보

내러티브를 인과의 연쇄가 아닌 회화적 유사성과 시적 리듬으로 구축하는 자무시의 영화는 무미건조하게 감각에 틈입한 뒤 느린 여운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맴돈다. 액션을 최소화하고 한층 온화하게 열린 세계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패터슨>과 닮은 신작엔 20세기 뉴욕 시인들이 대상을 바라보는 자세와 리듬을 사랑하는 작가의 취향이 또 한번 슬며시 드러난다. 짐 자무시는 미국 현대시 작법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뉴욕파(New york school) 시인 프랭크 오하라의 <페르소니즘 선언>(Personism A Manifesto, 1959)을 자신의 모든 작업의 근간이라고 밝힌 바 있다(“한 사람을 위해, 당신의 사랑을 위해, 친구를 위해 시를 써라. 선언문처럼 온 세상을 위해 쓰지 말고. 그러면 더욱 내밀하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어 자무시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첫 번째 챕터에 등장하는 죽은 어머니의 오래된 사진으로 뉴욕파의 또 다른 핵심 인물인 시인 앤 월드먼의 얼굴을 썼다. ‘파더’에선 어머니가, ‘마더’에선 아버지가, ‘시스터 브러더’에선 부모가 등장하지 않는 구도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만큼 부재하는 인물의 존재감도 나란히 부각된다.

#시스터 브러더 - 시간을 관통하는 존재들

가족의 플롯 밖에서 시간의 흐름을 상기시키는 의외의 존재들이 있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스케이트보더들이다. 이들은 각 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서사와 직접 연결되지 않고 등장인물들도 거리에서 그저 스쳐가듯 인지할 뿐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영화의 플롯상으로는 전혀 ‘필요치 않은’ 존재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는 시각효과가 전무한데 스케이트보더들이 등장하는 신에서만 이례적으로 슬로모션 효과가 쓰이기도 했다. 짐 자무시 감독은 “스케이트보더들은 내게 일종의 호흡으로서 중요했다”고 말한다. “잠시 창밖에 새들이 날아가는 걸 보는 것처럼, 이야기라는 폐쇄된 세계 밖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존재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간을 가로지르는 자유로운 도시 여행자들 중에서도 하필 왜 스케이트보더들일까. 자무시는 덧붙였다. “나는 그들의 야생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감수성, 권위로부터 멀리 떨어진 태도와 패션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매우 단순한 물리적 장치를 이용해 이동한다는 것,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논바이너리라는 점도 사랑한다.”

2010년대 이후 자무시의 작품들을 보면 죽음과 소멸(<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데드 돈 다이>)을 다루면서도 특유의 건조한 유머만큼 온화함도 감지된다. 등장인물들 중 유일하게 스케이트보더들과 동세대를 이루는 3부 파리의 쌍둥이 남매에겐 아버지와 어머니 어느 쪽도 남아 있지 않다. 짐 자무시는 쌍둥이 남매였던 자기 어머니의 경험을 바탕으로 쌍둥이적 존재들을 영화적 장치로 활용하길 즐긴다. 신작 속 쌍둥이는 두 인간의 근원적 연결이 가능함을 긍정하는 시선 속에서 그려진다. 남매는 텅 빈 부모의 집에서 자신들의 출생신고서를 찾아내 추억을 회고한 뒤 도시 창고에 가득 쌓인 부모의 짐을 바라보다가 차분히 돌아선다. 창고 하나를 가득 채운 부모의 유산은 아직 온전히 감당하기에 버거운 무엇이다. 그러나 영화는 차마 손대지 못한 채로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도 그것대로 부드럽게 감싼다. 어느 가족들의 오후가 세번 반복된 끝에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한 가지 명제가 분명해진다.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로든 시간의 유산을 통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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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안다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