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편의 영화 사이에 두편의 드라마가 있었다. <애프터 양>이후 Apple TV+ 시리즈 <파친코>, 디즈니+ 오리지널 <애콜라이트>일부 에피소드를 연출하며 “더 큰 규모의 장편영화에 필요한 감각을 익힌” 코고나다 감독은 <빅 볼드 뷰티풀>에 그 학습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사라진 시간, 사라질 기억을 스크린에 붙잡아두기 위해 프레임을 정돈해온 시네아스트는 이번에도 지난날로 향하는 문을 연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염두에 둔 상상력을 펼친 그는 설레어하며 한국 관객을 환영했다. “서구권 관객은 영화 속 환상의 작동법을 궁금해하는 반면 아시아 관객은 영화가 보여주는 마술 그 자체에 열려 있더라.” 한 차례의 화상 인터뷰와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대면 인터뷰를 종합해 코고나다가 줄곧 견지한 ‘가능성’의 모험을 복기해본다.
- 직접 각본을 쓴 <콜럼버스><애프터 양>과 달리 <빅 볼드 뷰티풀>은 처음으로 타인이 쓴 각본을 영화화한 사례다. 세스 라이스 작가의 글에 끌린 까닭은.
<빅 볼드 뷰티풀>은 사랑이 품은 가능성을 다시 믿어보려는 시도이자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과거와 화해하는 이야기다. 그 방식이 매우 흥미롭고 창의적으로 그려진 데다 특별한 유머까지 담고 있어 시나리오를 아주 즐겁게 읽었다. 뮤지컬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뮤지컬 요소가 뚜렷하게 드러난 장면이 있고, 극 전반에 뮤지컬 정신이 배어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인공성과 진실성 사이의 관계를 오래 고민하게 됐다. 무엇이 인간을 진정한 경험으로 이끄는지 알고 싶다는 궁금증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 우선 사라(마고 로비)와 데이비드(콜린 패럴)를 이끄는 건 비밀스러운 렌터카 업체와 그들이 빌려주는 자동차다. 두 사람이 운전하며 대화하는 신이 무척 많은데, 차창에 비치는 바깥 풍경이 인물을 부드럽게 감싼다. 차 안과 밖을 어떻게 찍고 싶었나.
차창에 비친 풍경을 자주 보여준 건 다분히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내가 유리에 반사된 상을 들여다보는 걸 정말 좋아한다. (웃음) 그런 이미지는 실험영화 같은 느낌을 줘서 내 작품에도 유사한 표현을 여러 번 해왔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방법도 있지만, 이 영화는 중요한 국면을 맞을 때마다 안에서 더 안쪽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게 차 안에서 인물의 내면이 드러나기에 각 장면이 다루는 감정에 맞게 촬영 방식을 조율했다. 내게 자동차 신은 연극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앞좌석들은 그저 나란히 놓인 두개의 의자일 뿐인데, 우리는 거기에 앉은 인물들이 당연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차 안은 사람들을 한결 친밀하게 만들어준다. 누군가와 함께 차를 타면 그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으니 <빅 볼드 뷰티풀>에서도 자동차 신이 핵심일 수밖에 없었다.
- 자동차에 내장된 내비게이션도 독특하다. 단순하지만 감각적인 그래픽디자인, AI를 연상시키는 목소리 덕에 그 자체로 하나의 캐릭터 같다.
내비게이션은 유쾌하게, 실험적으로 구상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내비게이션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랐기에 미술감독과 소품 담당자에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HAL 9000, 닌텐도 게임기의 리모컨이나 콘솔을 참고해 달라고 했다. 즉 내가 바란 내비게이션은 인물들에게 물리적으로 길을 알려주는 동시에 존재론적인 인도까지 해주는 장치다. 우리 영화 속 내비게이션은 사라와 데이비드가 자신의 일생을 되감아보게 하는 게임기 같은 캐릭터이기도 한 셈이다.
- 그 안내를 받은 사라와 데이비드는 여러 종류의 문 앞에 도착한다. 문을 열면 과거로 가게 되는 이 직관적인 아이디어에서 애니메이션을 떠올렸다고.
아시아 애니메이션, 특히 일본 ‘아니메’의 영향을 어떻게 서구적인 할리우드영화에 녹일 것인가. 그 질문으로 <빅 볼드 뷰티풀>을 시작했다. 특정한 매개를 거쳐 여기 아닌 어딘가로 가는 설정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웃집 토토로>같은 영화들이 떠오르지 않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들도 참고했기에 음악감독으로 히사이시 조가 합류한 것이 더없이 완벽했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이 영화에 신비로운 층위를 더했다. 미술감독, 촬영감독과도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래서 세스 라이스 작가에게도 ‘문’만 두자고 제안했다. 원래 각본에는 문이 아닌 건물이 있었다. 데이비드와 사라가 차를 세우고 등대나 학교를 발견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식이었다. 그러나 건물 전체가 아닌 문 하나만 있다면 그 문 너머로 어떤 공간이 펼쳐질지 전혀 알 수 없다. 무엇이든 가능해진다. 내가 애니메이션에서 좋아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굳이 많은 설명 없이, 관객으로 하여금 그냥 받아들이게 하는 것.
- 특정 장면에서는 인물들이 과거의 실제 장소가 아닌, 텅 빈 스튜디오에 있는 모습이 나온다. 관객이 혼란스러워할 수 있음에도 생경한 공간을 보여준 이유는.
사라와 데이비드는 마치 심리치료에 임하듯, 과거가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친 건지 알기 위해 과거를 재현해본다. 처음 시나리오에는 없었던 그 장면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물들이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는 공터에서 자기 감정의 진실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렌터카 업체 직원들도 그러지 않나. 때론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연기를 해야 할 때가 있다고. 그래서 그 장면은 단순히 이야기 전개를 위해 활용한 신이 아닌 ‘퍼포먼스’라는 요소를 통해 진짜 감정에 다가서는 과정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신이라 할 수 있다.
- 사라와 데이비드가 언덕에 앉아 지구를 내려다보는 신도 그런 차원에서 독해하면 될까. 이와 대조적인 뮤지컬 신들에 대한 접근법도 궁금하다.
때로는 거리를 두고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볼 때면 마을 전체가 보이고, 내가 가진 걱정과 불안도 덩달아 작게 보이곤 한다. 시점을 바꾸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니까. 반면 뮤지컬은 훨씬 인공적인 연출과 과장된 표현을 허용한다. 이 영화에도 비와 우산의 이미지를 여럿 오마주한 만큼 <사랑은 비를 타고>를 잠시 언급하고 싶은데, 그 작품의 포스터에는 “이 얼마나 황홀한가” (What a glorious feeling)라고 적혀 있다. 그 문구가 곧 뮤지컬이 주는 감상 아닌가. 나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처럼 느리고 조용한 시네마를 사랑하지만, 정반대인 뮤지컬 장르도 좋아한다. 사소하고 잔잔한 감정도, 크고 격정적인 감정도 모두 인간의 일부이니 이 영화도 그 양극단을 포용하고자 했다. 12살의 사라가 그랬듯, 환상적인 사랑과 마법을 믿던 우리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서.
- 사라와 데이비드가 처음 만난 곳 또한 일종의 연극적 성격을 띤 ‘결혼식’이다.
결혼식이라는 건 참 이상하고도 현대적인 현상이다. 그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일종의 의식인데, 식장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사랑을 냉소한다. 그럼에도 결혼식이라는 단 한번의 자리에서만큼은 모두가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를 축복한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싱글이고, 애정 문제로 괴로운 상태라면 얘기가 다르다. 결혼식이야말로 외로움이 증폭되는 장소일 수 있다. 처음 이 장면을 떠올린 작가도 혼자 많은 결혼식에 참석해 외로웠던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 다만 사라와 데이비드는 그곳에서 서로에게 단순한 신체적 끌림 이상을 느낀다. 왜 그럴 수 있었을까? 마고 로비, 콜린 패럴과도 이야기한 부분인데, 사라와 데이비드는 공히 길을 잃은 상태이기에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어긋남’이 둘을 연결하는 것이다. 나는 그 상태가 이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좋았다고 생각한다. 결혼식이라는 사건이 사라와 데이비드의 끝이 아닌 시작이라서 더욱.
- 서로에게 낯선 상대인 사라와 데이비드가 동행하면서 비로소 그들 각자에게 낯익은 존재인 가족, 전 연인과 재회할 수 있게 된다는 점도 역설적이다. 둘은 그 과정에서 자아를 재구성하는데, 궁극적으로 이 영화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인을 수용해야 한다고 귀띔하는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인간은 관계에 의해 정의되지 않나. 그 양상은 다를지언정 우리 모두에게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고, 다들 거기에서 비롯된 무게를 지고 살아간다. 그러다 나이 들고서야 내가 얼마나 그들과 닮았는지, 혹은 닮지 않았는지 깨닫는다. 부모가 아닌 친구, 연인과 만들어가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가 더 큰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라와 데이비드도 자신이 맺어온 관계의 맥락 안에서 자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나도 이 영화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를 묘사한 장면들을 좋아한다. 특히 사라와 어머니가 대화하는 신이 흥미롭다. 사라가 어머니에게 자신의 나이를 묻자 어머니는 사라에게 12살이라 답한다. 그러자 사라가 어머니에게 조금 더 나이 든 척해도 되냐고 묻는다. 화면상으로 두 인물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인다. 그러나 사라가 12살이라고 하니 관객은 그 상태를 받아들여야 하고, 그가 나이 든 척하고 싶다고 하면 관객은 또 그 설정을 자연스럽게 여길 수 있다. 다시 말해 시간이라는 축 위에서 자신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는 아주 주관적인 영역이고, 그 주관을 타자에게 설득하는 것이 영화만의 마법이 아닐까 싶다.
- 그 대답은 <콜럼버스><애프터 양>에서부터 이어지는 당신의 유구한 관심사에 관한 해설처럼도 들린다.
영화는 시간을 기록하고 포착한다. 그래서 모든 영화는 관객에게 ‘기억’이라는 경험을 준다. 지나온 과거를 보여준 다음 몇번이고 반복 재생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영화의 정수다. 그래서 영화 외의 어떠한 매체도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기억을 탐험할 기회를 주지 못한다. 나는 바로 그 점에 매력을 느낀다. 우리는 늘 과거의 기억을 갖고 현재의 자신을 정의한다. 그 사실은 언제나 나를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게 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은 곧 과거가 될 것이고, 당장 일주일만 지나도 이 대화는 추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문을 열고 이때로 돌아와 더 나은 인터뷰를 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한명의 인간으로서, 상실을 의식하며 현재에 머무는 법을 배우며 살아가야 하는가보다.
-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 앞에 놓인 문 하나를 열고 <빅 볼드 뷰티풀>을 작업하던 시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순간으로 회귀하고 싶나.
마고, 콜린과 함께한 첫 리허설의 순간으로 가고 싶다. 빈 무대에 우리 셋만이 있었던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이 세상에 우리 셋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고, 두 배우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영화 속 장면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은 정말이지 경이로웠다.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빈 무대에 다시 서는 것만으로도 아주 뜻깊은 경험이 될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