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이 쓰여진 시점은 칸영화제 폐막 직전이어서 수상 결과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저명한 미국 평론가의 눈에 비친 올해 칸의 풍경이라는 점에서 수록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번역문을 게재한다.
할리우드식 결말? 글쎄… 영화 <할리우드 엔딩>에서 우디 앨런 본인이 연기한 주인공은 잠시 눈이 먼 동안 연출했던 자신의 작품이 프랑스에서 걸작으로 추앙받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 프랑스라는 탈출구를 주시어 감사합니다”라고 환호하지만 이 농담에는 애정만큼이나 큰 혐오감이 배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할리우드 엔딩>이 오프닝 필름으로 선정된 올해 칸영화제의 개막식을 우디 앨런이 지난주 몸소 찾아 빛내주었을 때, 프랑스의 언론들은 그의 조롱을 확실한 애정의 표시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다소 초췌하고 불만스러운 모습으로 기자 회견장에 자리한 우디 앨런은 “프랑스인들이 미국의 예술가들을 미국인들보다 먼저 발견하고 인정해준다는 사실은 미국인들로서는 즐겁고도 고마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 칸영화제를 보이콧해야 한다는 미국 유대인연맹의 주장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묻는 질문에 우디 앨런은 최근 프랑스 대선의 결선투표 결과를 치켜세우며 유대주의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공세를 애써 비켜갔다. 미국 유대인연맹은 잡지 <코멘터리>의 발행기구인데, 우디 앨런은 한때 이 잡지가 <디센트>와 합쳐지면 ‘괴질병’(Dysentery)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어진 프랑스 기자들의 요청은 개구리와 달팽이를 먹어대는 프랑스인들의 식성을 “정신분석”해달라는 것. 우디 앨런은 자기 스스로는 해충 따위는 먹지 않지만 “뭘 드시든 상관없지요”라며 상냥하게 대답해주었다.
오스카, 슈퍼볼, 성지순례 같은
오스카 시상식과 슈퍼볼, 종교적인 순례와 국가적 행사를 모두 섞어놓은 듯한 칸영화제의 12일간은 참으로 독특한 것이다. 주변부적이라고 할 ‘감독 주간’(실제로는 동시에 진행되는 별개의 영화제다)에는 프랑스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프랑스 감독 카트린 브레이야의 <섹스는 코미디>로 서막을 장식했다. 가히 자기 자신에 관한 영화라고 할 만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노골적인 성적 묘사로 악명 높은 오만하고 고압적인 여감독. 그녀는 얼어붙을 듯이 추운 겨울 날씨 속에서 여름 해변의 10대 연인들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들에게 “키스도 제대로 못하나!” 하고 불만을 터뜨린다.
영화 <섹스는 코미디>는 즐겁기는 하지만 브레이야가 무진장 자아도취적인 것으로만 보이기 때문에 그냥 가벼운 영화로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녀는 자신의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이라고 할 <팻 걸>에서의 탁월한 장면(거의 싱글 테이크로 이루어진 장시간의 능욕장면)에 대한 동시적 비평과 해설, 탈신비화를 감독 스스로 유형화시키려고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거만한 록산 메스퀴다가 자신이 <팻걸>에서 맡았던 처녀 역할을 <섹스는 코미디>에서는 함께 연기한 그레고르 콜린스의 반대적 캐릭터로 재창조했다면 매력적인 안 파리오는 풍자적이고 이상화된 형태의 브레이야를 연기한다(아마도 사람들은 브레이야 스스로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그녀에게 연기를 지시할 수 있을 것인가?). <섹스는 코미디>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그리고 <팻 걸>의 팬들에게는 브레이야가 그 장면을 어떻게 연출했는가라는 문제는 참으로 흥미로운 화제일 것이다. 브레이야의 독특한 자기작가주의는 그 자체가 되풀이되는 것처럼 관객의 반응을 브레이야의 전작들에 부록으로 첨부시켜나간다.만약에 브레이야의 <섹스는 코미디>가 경쟁부문에 출품되었더라면 이 작품은 아마도 몇개 부문에서 수상 후보로 거론되었을 것이다.
칸영화제의 첫 한주는 두번이나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바 있는 마이크 리와 나이 따위는 먹지 않는 것 같은 마뇰 드 올리베이라, 점점 더 미니멀리스트로 변해가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같은 거장들의 다소 익숙하긴 하지만 충실한 작품들로 꾸려졌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연민으로 회귀한 리의 <전부 혹은 전무>는 창백한 휴먼코미디와 비극적 오페라의 돌림노래 사이를 오가다가 나중에는 거의 무한대로 센티멘털해진다. 물감 묻은 팔레트를 씻어내듯 상쾌한 작품 <불확정의 원리>에서 드 올리베이라는 나이 아흔둘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다고 숭고하리만치 확신에 차 있다. 여기서 그는 18세기 내러티브 관습과 19세기 무대장치, 그리고 20세기의 모호함을 함께 버무려 유희를 펼친다.
키아로스타미도 마찬가지인데,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총 한 자루와 여인뿐”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 고다르의 공식을 이 이란의 거장은 문자 그대로 “차 한대와 여인뿐”으로 바꿔냈다. 디지털로 작업한 은 차를 모는 이혼녀와 다양한 승객간의 대화를 고정된 카메라 숏으로 포착해 이란에서의 여성문제라는 그의 오랜 주제를 다시금 풀어내는 구조주의자적 카운트다운이다.(짐 호버먼은 등장하는 인물들이 서로 대비되며 교차한다는 점에서 차이와 대비에 의해서 의미가 생성된다고 보는 구조주의의 관점이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고 영화의 제목이 숫자 “10”이고 이것이 오가는 승객의 수와 관계있다는 점에서 카운트다운이라는 표현을 쓴 것 같다.-역자 주)
마이클 무어, 답을 알고도 그렇게 헤매다니…
가히 작가적 성취라고 할 수 있을 세 작품은 각각 열렬한 숭배자들을 거느리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면서 다시금 세상의 이목을 끌었지만, 영화제가 반쯤 지난 시점에서 가장 열광적인 관심을 이끌어낸 영화는 다큐멘터리로서는 1956년 이후 처음으로 칸 경쟁부문에 입성한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컬럼바인>이었다(56년 당시 루이 말과 자크 코스토가 다큐멘터리영화 <침묵의 세계>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다큐멘터리영화 <피카소의 미스터리>가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는 점은 아마도 <볼링 포 컬럼바인>에게는 하나의 길조일 것이다).
무어의 전작 <빅원>만큼 다채롭지는 않지만 <볼링 포 컬럼바인>은 1999년에 있었던 고등학교 총격사건을 프리텍스트로 미국사회에의 폭력성에 관한 영상 에세이를 전개해 나간다. 컬럼바인 사건을 오클라호마시 폭탄테러사건이나 무어 자신의 고향인 플린트에서 있었던 6살 유아의 총기살인사건과 함께 묶어냈다는 점에서 무어의 이번 작품은 일견 파괴적이고, 때때로 명랑하기까지 하지만(유나이티드 아티스트사는 이 작품의 미국 내 배급권을 즉석에서 구입했다) 구성이 몹시 엉성하고 한 반 시간쯤은 쓸데없이 늘어진다는 느낌이다. 갈수록 자화자찬식으로 변하는 이 영화에서 무어는 가련한 사고 희생자들을 찾아 포옹해주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방문 인터뷰에서 노쇠한 모습의 찰턴 헤스턴이 자신에게 기만당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총기소지자협회(NRA)의 선동꾼인 그 노배우에게 보는 이들이 연민을 갖게 만드는 우를 범한다.
영화 <볼링 포 컬럼바인>은 총기규제 강화를(크리스 록 식으로는 “총알규제”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지만, 무어 자신은 9월11일의 그 비극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교활하게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 놓고는 너무 큰 그림만 바라보다가 결국 미국식 예외주의라는 암초 위에 좌초하고 만다. 미국은 전세계의 모든 학살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인들 스스로가 예외적이리만치 폭력적인 족속들이라는 것이다.(영화의 자금줄 때문인지 어쩐지 영화 속에서 사회적 갈등의 수위가 낮은 것으로 칭송되고 있는) 캐나다에도 미국만큼이나 많은 총기가 보급되어 있고 독일은 과거 미국보다도 더욱 폭력적이었으며 영국은 미국보다 더 넓은 식민지를 다스렸지만, 이들 국가의 살인사건 발생률은 미국보다도 현저히 낮다라는 식이다(터키나 르완다, 캄보디아 같은 제3세계의 대량유혈사태는 의도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무어 자신은 사회 저변에 번진 불안감과 공포를 조장해 돈을 버는 미디어에(사실 그들은 무어 자신의 영화를 황홀하리만치 성대하게 환대해 줬다) 그 책임을 돌릴 것을 미리 정해 두고도 답을 몰라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극장을 나서면서 미국의 저널리스트들은 “이게 정말로 당신 나라의 정확한 모습입니까?”라고 물으며 마이크를 들이대는 프랑스의 TV스탭들에게 마치 매춘부들에게 이끌려 가기라도 하듯 붙들려 있어야 했다(그냥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캐나다 사람들은 얼마나 행운인가?).
아톰 에고이얀, 올리베이라처럼 느긋해져야
2002년의 경쟁부문은 예년에 비해 예외적이라 할 만큼 정치적인데 이는 단지 <볼링 포 컬럼바인> 때문은 아니다. 이탈리아 가톨릭으로부터 사전에 일찌감치 맹비난을 받으며 공개된 마르코 벨로치오의 <종교의 시간>은 주인공이 자신의 어머니가 성녀로 지목되어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가톨릭판 카프카 스토리로 그럴듯하게 시작하지만, 결국은 작품의 과도하게 세련된 분위기로 인해 질식사하고 만다. 아모스 기타이의 엉터리이기는 하지만 부적절하지만도 않은 작품 <케드마>는 반(反)출애굽기적이다(그리고 반‘라이언일병 구하기’적이다). 이 작품은 이스라엘의 존재에 대해 유대 이민의 근본주의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는데, 칸영화제는 팔레스타인 감독 엘리아 술레이만의 훨씬 더 훌륭하고도 덜 이념적인 작품 <신의 간섭>을 함께 포진시키는 방법으로 이른바 말하는 “균형”을 맞추고 있다. 그의 전작 <실종의 연대기>처럼 술레이만의 새 영화는 거대한 묵시록적인 분노를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부조리한” 입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홍콩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F/X장면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로레알 화장품 모델 타입의 여주인공은 테러리스트 닌자로 돌변한다).
아톰 에고이얀의 <아라라트>를 비경쟁 부문에서 상영하기로 한 결정에 힘입어 <신의 간섭>은 아마도 심사위원상 중 하나는 가져갈 것으로 보인다. 에고이얀의 지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1915년 터키에서 있었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고발한 <아라라트>는 터키와 터키인들을 그나마 긍정적으로 묘사하려는 부담 아래서 고통스럽게 허우적거린다(이 작품의 칸영화제 상영에 대해 터키 정부는 이미 칸 당국에 공식적으로 항의를 표한 바 있다). 에고이얀 감독은 복잡다단한 시나리오의 돌출적인 이야기 전개를 조절하기 위해서 아마도 마뇰 드 올리베이라처럼 느긋해져야만 했을 것이다.
<펀치 드렁크 러브>, 가장 이상한 영화
영화제 초반부의 가장 큰 실망은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데몬 러버>인데 디지털 아니메와 사이버 포르노에 대한 다국적 명상이라고 할 만한 이 작품은 “십분 뒤의 미래”류의 첨단의 이야기에 도전하지만, 크로넨버그의 1983년작 <비디오 드롬>과 비교해봐도 몇년은 뒤처져 보인다.
이제까지의 상영작 중에 가장 이상한 작품은 이견의 여지없이 폴 토머스 앤더슨의 <펀치 드렁크 러브>일 것이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주연 애덤 샌들러의 매력에 대한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의 전위적인 점은 애덤 샌들러의 패르소나가 그의 전작 <리틀 니키>에서만큼 분명히 부각되고 있지 않았음에도 이 영화는 엄연히 애덤 샌들러의 영화라는 점이다. 애덤 샌들러는 패기없는 숙맥이지만 극도로 폭력적인 내적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 <해피 길모어> 타입의 역할을 맡은 반면 감독 앤더슨은 영화의 많은 부분에서 앨버트 브룩스의 스타일과 같이 말끔히 정리돼 있는 고전적인 화면을 구사하고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펀치 드렁크 러브>는 우아하기는 하지만 빈약한 시나리오와 공동주연 샌들러와 에밀리 왓슨 사이의 완벽한 부조화로 인해 골병이 든 나머지 절름거리다가는 덜컥 멈춰버린다. 이정도 영화라면 시시한 코미디를 즐기는 프랑스인들의 취향에 호소할 수 있을까? 그래서 더 나아가 <게이샤 보이> 시절의 제리 루이스를 닮도록 분장하고 연출된 샌들러가 우디 앨런이나 마이클 무어처럼 자국에서 제대로 대접 못 받고 있는 미국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황금종려상 수상작이 어느 작품일 것인가라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해서 섣불리 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글 짐 호버먼(영화평론가·<비리지 보이스>) / 번역 권재현
<빌리지 보이스> 2002.5.28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