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석의 신작이자 야심작이었던 <고산자, 대동여지도>(이하 <고산자>)는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내 기억으로는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이래 이만한 흥행 실패는 그의 경력에 없었다. 민중의 편에 선 지도장이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획 실패이고, 흥행사로서 강우석의 신뢰가 사라졌다는 징조이며, 예능 프로그램의 스타가 아닌 영화배우로서 차승원이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고산자>는 강우석에게나 차승원에게나 필생의 역작이었다는 점에서 엄청난 재앙인 것이다.
<공공의 적> 이래 대다수 그의 작품을 일관되게 지지해왔던 평자로서 나는 <고산자>가 재미있었다. 경직된 플롯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봤을 때도 상당한 감동이 있었다. 왜 그런가를 생각해보니 이 영화가 김정호(차승원)의 삶에 관해 새로운 앎을 주는 걸 아예 포기하고 복종적일 만큼 겸손하게 그의 삶을 최소한으로 재현하면서 그 대신 그의 삶을 응축하는 어떤 이미지들을 살려내는 데 부분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영화는 박범신의 원작 소설보다 훨씬 더 간략하게 그의 삶을 둘러싼 상황을 압축하는데, 실학파 양반들이 그의 삶과 작업을 후원했던 배경도 생략하고 지도 그리기에 미친 김정호와 그의 지도를 탐내는 권력자 흥선대원군, 세도가 안동김씨 가문과의 갈등만을 그린다. 지나칠 만큼 단순하게 정보를 독점하려는 지배계급과 정보를 민중의 것으로 남겨두려는 김정호의 대립구도로만 플롯을 짜는 가운데 그걸 메우는 것은 강우석식으로 재해석한 김정호의 인물 성격과 그가 팔도를 유람하며 보는 이 나라의 풍경이다.
이 영화에서 김정호를 제외한 대다수 인물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기능적인 역할에만 머문다. 김정호의 딸 순실이(남지현)와 김정호를 연모하는 여주댁(신동미)이 그렇고 유준상이 연기하는 흥선대원군이나 세도가 양반들의 면면도 전형적이다. 강우석은 이 인물들을 놓고 직선적으로 밀고 나간다. 김정호를 다소 해학적인 인물로 위치시킨 다음 비극적 영웅으로 끌어올리는데 그 과정에서 딸 순실이와 여주댁의 죽음을 극적 도구로 삼는다. 그 사람들은 나라에서 금하는 서학을 믿다가 그리되는데 그들이 지닌 종교적 신념의 요체도 살짝 암시하는 정도로만 묘사하고 넘어간다. 거기에 또 다른 드라마로 당대 지배층의 알력, 흥선대원군과 안동김씨의 세력 다툼을 묘사하고 거기 휘말리지 않는 김정호를 보여준다. 앞서 말했듯이 이 두축의 드라마는 전형적이고 새로운 앎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무엇이 뚝심 있게 느껴졌을까.
강우석은 김정호의 삶을 드라마 플롯으로 상상하지 않았다. 그가 상상한 것은 대지를 걷는 김정호다. 대지를 걷는 김정호를 상상하면서 강우석은 직접 대지를 걷고 그의 스탭들도 따라 걸었을 것이다. 그는 이걸 의식처럼 행했는데 아날로그적인 이런 접근법의 스펙터클은 적지 않은 여운이 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차승원이라는 대리자를 통해 김정호에게 어떤 표정들을 남겨주려 했다. 그는 재미로 지도를 그리는 인간이다. 홍경래의 난 당시에 부실한 지도 때문에 죽어야 했던 아버지에 관한 상처로 인해 그는 지도 그리기에 나섰겠지만 재미가 없었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정호는 심지어 예술가로 자부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을 돕는 조력자 바우와 함께 지도 목각을 팔 때 빠른 속도로 일하는 바우를 향해 그렇게 하면 예술가가 못 돼, 라는 식으로 훈계한다. 김정호는 놀이하는 인간이자 예술가이자 훈수꾼이자 민주주의자이다. 그런 그의 심리적 토대는 재미에 있다. 그는 양반놀이를 따라하는 게 아니라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자기만의 지도 그리기 놀이를 했다. 전국 유람은 그에게 화가와 측량가의 눈을 동시에 줬을 것이며 지도 그리기는 그에게 현실의 축약 재현 쾌감을 줬을 것이고 목각 작업은 그에게 기억의 창작과 같은 즐거움을 줬을 것이다. 압도적인 풍경에의 몰입과 재미에 열중하는 김정호를 그리는 쪽으로 아예 드라마를 몰고 갔더라면 이 영화는 보다 예술적인 향기가 나는 작품이 됐겠지만 강우석은 또한 관객에게 이 시대와 연관 짓는 공분을 끌어내려 전형적인 드라마를 짠다. 정보를 독점하려는 권력자와 정보를 보급하려는 민주주의자의 대립은 너무 선명해서 역설적으로 서사적으로는 아무런 공명을 자아내지 못한다. 그럴 때 감독은 다시 지도의 스펙터클로 그 서사의 자명성을 메우려 한다. 영화의 말미에 광화문 앞에 펼쳐지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엔딩 크레딧에 다시 반복되는 대동여지도의 실제 판본이 그것이다.
강우석에게는 아직도 작가와 흥행사의 이분법적 구도가 뇌리에 남아 있는 것 같다. <공공의 적>과 <이끼>는 그에게 전환점이 되는 작품이었으나 그때마다 그는 좀더 흥행성이 두드러지는 기획으로 선회하곤 했다. 그가 흥행의 화두로 삼는 것은 코미디와 비극이며 그는 그 두 가지 방향성을 놓고 갈등한다. 그를 한국 제일의 흥행 감독으로 만들었던 <투캅스>는 그가 돌아가고 싶은 기획의 원형이고 당대 흥행 기록을 세웠던 <실미도>에서의 신파적 파토스 역시 그가 되새기고 싶은 영화적 정서의 원형이다. <고산자>는 그 두 가지 방향을 다 실현하고 싶었던 결과물이자 거기다 선한 민주주의자의 위인적 성향에 존경을 표하고 싶었던 좌익적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나로선 강우석 감독이 여러 차례 경험했던 흥행사로서의 경험이 그에게 오히려 걸림돌로 자리잡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걱정이 든다. 새 영화를 앞에 두고 모든 것을 <투캅스>와 <실미도>의 재현으로 압축해 생각해버리는 경향 말이다.
강우석 자신의 지향과는 별개로 <고산자>는 강우석이라는 감독이 자기 좌표를 다시 세울 수 있는 유능한 감독이라는 걸 알려주는 단서들이 적지 않은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 김정호는 아버지를 잃었고 그 자신도 아버지 되기에 실패한다. 주위에는 사악한 아버지(안동김씨 권세가)와 그들 못지않게 나쁘지만 저놈은 괜찮은 놈이라는 걸 알아보는 눈이 있는 아버지(흥선대원군)가 있다. 스스로도 아버지 되기에 실패하고 누구도 아버지로 모실 생각이 없는 채 김정호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고 다시 다짐하는 시점에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에서 계속 묘사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어떤 실마리도 없는 장소에서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내딛으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최대한의 정보를 모으는 과정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달빛이 비치고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며 사소한 것들의 성장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자로서의 김정호의 모습은 전형적인 플롯과 인물 구성이 잊힌 뒤에도 생각날 수 있는 진한 인상을 준다. 영화 속 여러 풍경 장면들과 함께 이런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강우석의 영화감독으로서의 본성일 것이다.
사소한 말들을 하는 순간이 흥미로운 영화 <밀정>
김지운의 <밀정>에 관해서는 생각이 훨씬 복잡해진다. 이 영화는 일부 평자들로부터 송강호가 연기하는 이중첩자 이정출의 심리묘사가 모호하고 불완전하며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들었다. <매거진M>에 실린 평에서 이숙명은 “극의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이정출의 태도는 시대의 무거운 기운을 온전히 대변할 만큼 진지하지 않다. 그는 김지운 감독의 초기 희극들에 나오는 인물처럼 얄팍하고 즉흥적이다. (중략) 극 후반에 이르러 어수선한 곁가지들이 사라지고, 관객이 집중해야 할 기표가 ‘송강호’ 하나로 수렴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급변한다. 이정출은 비로소 진지하고 과묵해져서 자신에게 주어진 영웅의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며, <밀정>은 일반적인 장르극의 문법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제야 혼란은 멈추고, 이 영화가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지 비로소 드러난다. 하지만 왜 그토록 먼 길을 돌아와야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고 비판했다. 주인공이 진화하는 영웅이 돼야 하는 장르영화의 관행에 기대어본다면 이 유려한 문장에 담긴 비판은 타당하다.
나는 거꾸로 이정출이 갈팡질팡하는 이 영화의 중반부까지가 특히 흥미로웠다. 영화 속 다른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신념과 이해에 충실하게 행동하지만 이정출은 수수께끼처럼 던져진 인물이다. 그는 영웅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인물이 아니라 스스로 헷갈려하는 인물이다. 장르영화의 연출자는 모든 것을 집전하는 신이 되어야 하지만 중반부까지 김지운 감독은 증인의 자리에 있는 것 같다. 등장인물들을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표명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기보다는 그들 곁에서 그들이 중얼거리는 이야기를 듣는 쪽을 선택한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정출이 의열단원 김우진(공유)이나 의열단 보스 정채산(이병헌) 등을 상대할때 감독은 일관되게 화면을 이정출의 반응 화면에 강세를 두고 배분한다. 그렇게 분배되는 화면들 속에서 이정출은 어디에 속해 무엇을 해야 할까 난처해한다. 그는 자기가 기댈 수 있는 시스템을 찾는 인간이다. 일본인 상관의 신뢰와 김우진의 신뢰 사이에서 그는 자기가 기댈 시스템을 어림짐작하지만 그게 잡힐 리 없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결국 인간적 정리, 자신이 타의에 의해 얼굴을 지지는 고문을 했던 의열단 단원 여인 연계순의 작은 주검 앞에서 오열하며 그때부터 그는 외부적 관점으로 보기에 영웅으로 진화한다. 이것은 장르영화의 관행에 무사히 안착하는 클라이맥스지만 실은 그전까지 이 영화가 견지했던 태도를 배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정출은 좀처럼 그런 단계로 나아가기 힘든 연약한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송강호가 탁월하게 연기하는 이정출 캐릭터는, 본모습 자체가 연약함에 얽혀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걸 실감하 게 만든다. 역사 속의 활자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와 그는 권력의 이해에 봉사하거나 독립의 명분에 헌신하는 인물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연약한 존재이자 직분상으로는 계속 잘못을 저지르는 인물로 살아 숨쉰다. 그가 어느 시점에서 경계를 넘어버리는 것도 그 연약함의 효과일 것이다. 그는 연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고문한 여인의 죽음 앞에서 오열할 수 있었다. 거창하게 말하면 이정출은 시스템에 기대지 않고도 인간이 어떻게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를 묻는 카뮈적 주제에 합당하는 문제적 개인이다. 이제까지의 어떤 역사 소재 영화에서도 이처럼 흥미로운 캐릭터는 본 기억이 없다. 이렇게 연약한 인간이 한순간 한순간 자기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내던져진 채 삶의 문맥을 맞춰가는 과정을 어느 지점까지 성공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밀정>은 한 인간의 성장담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정출이 이중밀정으로 허둥대는 기차 안의 추격전이 끝난 후, 다시 말하자면 이정출에 대한 주의와 관심을 일단 멈춘 후 영화는 급격하게 기운이 떨어지는데 이정출에게 쏠린 드라마의 초점을 갑자기 허둥지둥 다른 인물들에게로 배분하려 애쓰는 가운데 가장 안이하게 장르영화의 관행에 기대는 장면들을 연출한다. 경성역에서 벌어지는 김우진과 다른 의열단 단원들과 일본 경찰의 총격전은 그 의도와 결과가 잘 납득이 가지 않는 연출로 이뤄져 있다. 김우진의 연인이기도 했던 연계순(한지민)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벌어지는 총격전 와중에 김우진은 그를 구하기 위해 총을 꺼내 쏘기 직전에 이른다. 이 장면은 그때까지 부실하게 묘사했던 김우진과 연계순 사이의 감정을 총격전의 리듬에 급하게 실어 얼버무리려 했거나 스펙터클의 도구적 장치로 억지로 총격전을 묘사하려 했거나 아니면 그 둘 다의 효과를 노린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 장면으로 인해 음영을 강조했던 누아르 스파이영화의 외형적 톤도 깨지고 전반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실해 보이는 세트도 스펙터클의 인상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며 무엇보다도 김우진이라는 캐릭터의 일관성도 한순간에 무너진다. 이 장면에서 그는 대의를 잊고 연정에 집착하는 작은 인물로 추락할 뻔 한다.
한국 영화감독들 가운데 김지운만큼 인물과 상황의 의외성에 민감한 촉을 가진 감독은 드물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런 예민한 감각으로 손대는 장르 관행에 두드러진 자국을 남겼다. <반칙왕>부터 <악마를 보았다>에 이르기까지 그가 묘사하는 인물과 상황에는 관객의 의표를 찌르면서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저것이 내가 처한 상황일 수도 있겠다는 공감을 자아내는 요소들이 많았다. 그걸 파고들어가기보다 대개 그는 겉멋 부린다는 오해를 살 만큼 스타일의 기교에 더 열중했는데 <밀정>은 상대적으로 그의 어떤 영화보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인물과 상황에서 뽑아내는 그의 재능이 잘 발휘된 영화이며 또한 늘 그랬듯이 아직까지는 장르 관행과 역설적 통찰의 균형이 완전한 비례로 맞춰진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가 다 그렇겠지만 <밀정>은 인물들이 명시적인 대사를 말하는 순간보다 사소한 말들을 하는 순간들이 더 흥미로운 영화다. 정채산과 이정출이 처음 만났을 때 별다른 말 없이 술잔을 거듭 권하는 가운데 서로 기싸움을 벌이고 은밀하게 감정적으로 상대에게 밀착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장면은 이 사람이 어느 지점에서는 어려워 보이는 것을 간단하게 해내는 순수영화의 적자로서의 자질을 지닌 감독이라는 걸 입증한다.
연약한 단독자로서의 인간을 묘사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감독이 받아든 흥행 결과는 상반된 것이었지만 나는 여름 시즌의 요란한 블록버스터영화들에서 받았던 실망이 어느 정도 상쇄되는 느낌을 받는다. 어쨌거나 산업 내의 주류 감독들은 대중이 원하는 서사를 제공할 의무가 있지만 그 서사에 필수적으로 장착된 이미지의 잉여에서 관객과 오랜 공감관계를 맺을 수 있는 어떤 것을 교환할 수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도 그렇지만 한국영화는 오랫동안 사악한 아버지들 때문에(또는 시스템이라고 해도 좋다) 입은 상처로 우리의 현재를 묘사해왔다. <고산자>도 그렇고 특히 <밀정>은 그런 환원적 인과를 겨냥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연약한 단독자로서의 인간을 묘사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완벽하진 않지만 아직까지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