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에서 시작해 <터널> <덕혜옹주> <인천상륙작전> 순으로 이어진 나의 올해 여름 한국 블록버스터 관람은 극심한 메슥거림을 느끼는 것으로 끝났다. 극장가에서 자취를 감춰가던 <인천상륙작전>을 마지막회에 관람했는데 화면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과 비례해 속이 계속 울렁거렸다. 생각해보니 <덕혜옹주>를 볼 때도, <터널>을 볼 때도 그랬다. 스크린에선 격정적인 상황이 펼쳐지는데 나 스스로는 납득이 가지 않으면서 불편함을 호소하는 신체적 반응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영민한 창작자는 그 시대에 과잉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표현하지 않는다. 표현한다 해도 소용없기 때문이다. 올여름 한국 블록버스터들은 이미 과잉으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소란스럽게 부연하는 것으로 내겐 보였다. 중요하니까 봐주고 감동해주세요, 라고 호객하는 제스처들이 요란한 가운데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없는 기묘한 진공상태의 화면들로 가득 찬 이 영화들을 보면서 한국영화계가 좋지 않은 방향에서 근본적인 변동을 맞이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함을 느꼈다.
현실의 비극을 착취한 <터널>
비교적 고르게 언론에서 상찬받은 김성훈의 세 번째 장편영화 <터널>은 택한 소재의 특성을 무시하는 작법이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무너진 터널에 갇힌 주인공 정수(하정우)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를 보여주는 데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수 두병과 케이크만 갖고 있었던 정수는 구조가 장기화되면서 초인적으로 버텨야 하는데 별다른 생존 수단이 없다. 터널에 갇혔던 또 다른 희생자 여성(남지현)과 물을 조금 나눈 데다 케이크는 그 여성 희생자와 동승했던 개가 다 먹어치웠다. 구조될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한계선인 17일을 넘겼는데도 정수는 초인적으로 잘 버틴다. 자기 오줌을 마시며 버티면서 터널에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을 웬만큼 받아뒀다 해도 이 생존 알리바이는 잘 성립되지 않는다. 터널을 파들어가는 작업에 오차가 있었고 정수는 구조 예정일을 훨씬 넘겨 30일을 버텨야 했다. 그때부터 서사는 정수의 사정을 보여주기보다는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중단된 주변 터널 공사를 재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벌어지는 사회적 혼란을 서사의 반전 장치로 쓴다.
감독은 단 한 사람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하고 있으나 내겐 그의 말이 좀 위선적으로 들린다. 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이 영화의 서사는 예상할 수 있었던 희생양을 배치하는데 사람 좋은 작업반장(정석용)이 구조작업 과정에서 실수로 비명횡사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캐릭터를 우리는 이전 몇 장면에서 볼 수 있었는데 정수의 아내 세현(배두나)이 구조 현장에서 봉사하며 음식을 관계자들에게 내던 중 바닥에 떨어진 달걀부침을 빗물에 씻어 먹을 만큼 순박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구조작업이 장기화되는 걸 불평하는 동료들을 달래며 작업을 독려하는 중에 사고사한다. 그의 죽음으로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구조를 둘러싼 여론은 더 악화되고 급기야 죽은 작업반장의 어머니가 여전히 사고 현장에서 음식 봉사를 하던 정수의 아내 세현에게 날달걀을 던지며 비난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세현이 만들어준 달걀부침이 더러워졌는데도 개의치 않고 먹었던 아들과 세현에게 날달걀을 던지는 그 사람의 어머니를 대비시키며 영화는 세현의 죄책감을 정당화한다. 남편 때문에 인명피해가 나고 사회적 손실이 커지는 걸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그녀는 달걀세례를 당하면서도 정중하게 “죄송합니다”라고 거듭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머리를 숙여 사과한다.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 취급을 받으며 미안해하는 이 상황을 통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월호 비극의 현재형을 떠올릴 것이다. 이런 유비 관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영화는 극적 장치로 누군가의 불우한 죽음을 도구로 삼았다. 이건 정당화될 수 있는 극적 장치일까 반문하게 되는 것은 영화가 그런 극적 흐름을 만들어내는 동안에 우리는 잠시 정수의 안위를 잊기 때문이다. 정수는 여전히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는 게 나중에 밝혀지지만 어떻게 버텼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잘 버티고 있던 그에게 그의 아내 세현이 라디오 음악방송에 나와 메시지를 전한다. 이게 개연성이 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정수 역시 일시적이나마 희생자가 정당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비극의 도구로 이용된다. 라디오를 들으며 난 아직 살아 있다고 중얼거리는 정수의 말이 관객을 향한 것은 자명하다. 그는 세현의 행동을 보며 느꼈던 것과 비슷하게 관객으로 하여금 죄책감을 갖게 만드는 극적 도구다.
여기서 거듭 질문해볼 수 있다. 그는 어떻게 고통을 견뎠는가. 하정우는 정수의 캐릭터를 능란하게 연기하지만 우리가 불편하지 않게 그 캐릭터와 동화될 수 있게끔 적절한 선을 긋는다. 터널 구조물 잔해들에 둘러싸인 좁은 차 안에서 그는 영웅적으로 버티는데 느물느물 혼잣말을 하며 어떤 상황에서든 유머를 잃지 않는 캐릭터다. 조난된 그와 멀지 않은 곳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차에 갇힌 젊은 여성을 발견했을 때 그가 보여주는 행동들도 인간적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보살피려 하지만 생수를 나눠 마셔야 하는 것과 같은 자기 안위와 관계된 선택을 해야 할때 슬쩍 망설인다. 정수는 극한의 상황에 대처하는 영웅적 자질이 있는 사람이지만 연약하고 흔들릴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다.
반복하지만, 그런데 그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구조반 대장 대경(오달수)의 의지 덕분에 그는 마지막에 살아남는다. 대경은 모두 저만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이 세상에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능력이 있는 상식적인 윤리감각을 갖춘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그는 정수의 구조에 절대적인 책임감을 품고 있다. 관계 장관이나 공무원들이 구조를 둘러싼 과정에서 자신들의 성실함과 유능함을 위장하는 거짓 연기를 하고 이를 언론이 생중계하는 아수라장의 현실에서 그는 정수가 오줌을 받아먹을 때 자신도 오줌을 먹어볼 만큼 타인의 고통에 예민하다. 누군가는 기를 쓰고 몸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확인시키는 또 다른 영웅이기도 하다. 우리가 감동할 수 있는 연대를 그려내고는 있으나 이 대목에서도 영화는 인물들의 고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정수가 오줌을 마시는 것도 대경이 그를 따라하는 것도 설정으로만 제시돼 있다. 오줌을 마시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한가.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어떤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피해자가 된 사람을 보여주는 구조의 맥락을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그 피해자의 고통을 다룰 의무가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겪었던 고통을 견딜 만한 것으로 관객에게 제시한다. 그가 갇혀 있는 상황은 안타깝고 슬프지만 그의 고통은 그의 고통을 대리해 느끼는 세현과 대경을 통해 암시적인 수준으로만 묘사된다. 그만큼의 극적 시간을 메우는 것은 우리의 기시감을 확증시키는 에피소드들, 국가기관의 무능과 언론의 선정적 작태와 사회 구성원들의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들이다. 이것들을 보며 분노하고 잠깐 슬퍼하는 건 쉽지만 대신 정수의 고통을 대리 체험하는 것은 어렵고 불편하다. 정수가 낙천적인 천성으로 고통을 견디는 능력을 타고났다고 해도 좋다. 그렇더라도 영화는 그의 고통을 스크린에 더 담아냈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의문이 든다. 영화의 후반부 대목은 과학적으로도, 극적 맥락으로도 납득하기 힘든 생략과 비약으로 관객을 추상적인 정서로 몰고 가 즐기게 만든다. 많은 언론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이 영화가 세월호를 의식하지 않고 볼 수는 없는 영화라고 한다면 그것의 핵심은 현재형의 고통을 얼마나 스크린에 영화적으로, 아니면 최소한의 사실성에 기초한 디테일로 묘사할 것인가에 있다. <부산행>이 약간의 의구심을 자아내는 부분을 <터널>은 더욱 노골적으로 전면화한다. 이 영화는 현실의 비극을 반영한다고 했지만 실은 현실의 비극을 착취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비극을 음미하고 슬퍼하게 한 다음, 분노하게 만들고 이윽고 승리의 감정까지 쥐여주면서 안전하게 빠져나가도록 돕는다. 한달여를 터널에 갇혀 있던 정수가 이윽고 구조되는 순간에, 대경은 정수를 대신해 공무원들과 기자들에게 욕을 퍼붓고, 정수는 들것에 실려가면서 엄지를 척 치켜든다. 재미있는 설정이지만 이것은 정수의 고통의 연대기를 클라이맥스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면서 얻은 것이다. 아울러 정수의 고통에 따른 현실적 비극을 교묘하게 환기시키기 위해 극중 인물을 한명 더 죽이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설정이다. 나는 이런 대목이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며 거기에 세월호 비극의 메타포라는 결론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본다.
역사를 다루지 않고 착취한 영화 <인천상륙작전>
현실의 반영이 아닌 착취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재한의 <인천상륙작전>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흉물스러운 영화이다. 첩보전으로 시작하는 플롯이지만 피아가 잘 구별되지 않는 총격전으로 상당수의 상영시간을 채우고 배우들은 시종일관 머리보다는 기운으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식으로 행동한다. 실존 인물들이 나오는 성공한 작전을 다룬 영화로서 역사적 기초 상식이 없는 관객을 계도할 목적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방식이 세련되지 않아 보기 피곤하다. 일단 이범수가 연기하는 북한군 인천 방어사령관 림계진은 살인광이자 전쟁광이라는 것까지 인정하더라도 머리가 너무 나쁘고 기세등등한 것에 비하면 자기 임무에 늘 실패한다. 겉으로는 세 보이지만 군인으로서 무능한 데다 적당한 시점에는 늘 살인을 교사하거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악함을 시연하는 캐릭터다. 악당이 흡인력이 없으니까 그 앞에서 늘 주눅든 채 긴장을 견디는 표정으로 일관하는, 북한군으로 위장한 대한민국 해군 대위 장학수(이정재)도 덩달아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캐릭터 같다.
이 영화에서 묘사된 전쟁의 지표들은 잔인하고 처절하고 어쨌든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의 흔적들이 아니라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악당들의 제지를 뚫어내는 국군의 성실함과 용감함을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이미지들로 제시된다. 북한군은 아군에 비해 훨씬 많이 죽고 그들을 제압하는 아군들의 대다수는 영웅적으로 죽음을 택하며 특히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는 전쟁터가 아니라 게임 공간을 대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주인공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병사들을 제압하는 판타지가 전개된다.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이 과장된 전투담의 영웅이자 도구로 쓰인다는 인상을 강화하는 건 맥아더 캐릭터다. 리암 니슨이라는 존재감 있는 배우를 캐스팅한 영화 속의 맥아더는 늘 신처럼 군림하면서 좌우를 압도하는 구원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심지어 걷는 모습조차도 배제된 이 인물은 맥아더에 대해 어떤 역사적 지식도 생산하지 않는 대신, 이 모든 상황을 집전하는 초월적 존재로 묘사된다. 회상 장면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가 장학수의 용맹스런 모습을 보며 자기 아들처럼 생각했고 그들을 위해 작전을 집행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아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온,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절대자이고 그의 권능에 기대어 한국군은 초인적인 활약으로 작전을 미리 대비하고 있던 북한군대를 초토화시킨다. 인물들을 특정 의도에 맞게 기계처럼 배치한 이 영화는 역사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 역사를 착취하는 영화이다.
<덕혜옹주>, 역사 왜곡에 따르는 착취의 흔적 가리기
<덕혜옹주>를 연출한 허진호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데 따르는 착취의 흔적을 가리기 위해 상당히 고심한 흔적을 드러낸다. 덕혜옹주(손예진)의 인간적 고뇌를 정서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유효한 수단인 멜로드라마적 장치를 억제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고종에게 데릴사위로 간택됐으나 덕혜옹주와 결혼하지 못했던 김장한(박해일)은 일본에 끌려간 덕혜옹주 앞에 일본 군인의 신분으로 나타나 호위무사처럼 그를 보호하고 그를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는 계획을 주도한다. 개인의 관계를 축으로 역사를 병풍처럼 위치시키는 방법을 취한 셈인데, 문제는 주인공에게 저항의 아이콘이 될 만한 서사를 부여하는 상상력을 적용하면서 또 다른 방향에서 <인천상륙작전> 못지않은 목적 드라마로 향했다는 점이다. 국민이라는 근대적 개념이 성립되기 전인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멸망한 왕조의 딸을 국가적 정체성의 대변인으로 재옹립하는 게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시도인지를 따지기 전에 이 영화는 그런 시도 때문에 상당수의 화면을 덕혜옹주의 고뇌하고 슬퍼하고 미쳐가고 결단하는 표정에 할애한다.
중국에서 찍은 <위험한 관계>(2012) 때부터 허진호는 이전의 자기 스타일을 버렸지만 그 영화에서 희미하게 배어 있던, 인물의 내면을 수식하는 전체 분위기에 대한 감성은 이 영화에선 송두리째 사라지고 없다. 고종의 말년부터 덕혜옹주의 일본 감금 생활을 묘사하는 중반부까지 이 영화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상투적인 컷 연결 기법으로 일관한다. 등장인물의 대사들이 독립과 주권 회복으로 한정돼 있는 사이, 허진호적인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상실과 쇠락의 삶에 관한 고유한 정조는 화면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늙은 김장한이 등장하는 영화의 첫 장면을 빼면 이 영화의 대다수 장면은 허진호가 아니더라도 연출 가능한 기계적인 배치로 이뤄져 있다. 데뷔할 때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던 재능으로 지금 우리 곁에서 사라져가는 공간을 뛰어나게 환기시켰던 감독이, 부재와 상실은 과거와 같지 않은 현재의 공간에서 아프게 재생된다는 걸 보여줬던 감독이, 영화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린 국권을 갈망하지만 결코 투사는 될 수 없었던 여인의 비극을 다루면서 텔레비전 드라마의 컷 연결을 고수했다는 것만으로도 <덕혜옹주>는 올해의 화제작이라 할 것이다.
이 모든 영화들에서 주인은 감독이나 제작자가 아니라 화면 맨 처음에 명기되는 투자자들이다. 언제부터인가 관례로 정착된 이 크레딧 배치를 보는 건 새삼스럽지 않지만 올여름 극장가의 한국영화들은 유난히 자본에의 종속성을 실감하게 했다. 개별적으로 창작자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든 간에 올여름 한국영화를 통해 확인된 자본가들의 작업지침은 현실을 착취하라는 것이었다. 손톱만큼의 새로운 지식도 재생산하지 못하는, 앎에의 욕구에 전혀 봉사하지 못하는 이 영화들은 오락과 예술의 균형 추를 잡는 영화라는 매체에서 예술이라는 이름을 당분간 추방할 것이라는 불길한 전조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