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는 하나의 국가이다. 그리고 기예르모 델 토로와 같은 쾌락주의인 영화광의 정신은 대부분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작은 장르의 국가들이 벌집처럼 촘촘히 모여 있는 지도의 모양을 취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들의 이야기의 여정은 드물게 한 국가에 머물기도 하지만 대부분 하나 이상의 국경을 가로지른다. 종종 그 여정은 엉뚱한 결합으로 끝나곤 한다. <벌집의 정령>(1973)에서 따온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어린 소녀의 이미지가 엉뚱하게도 일본의 거대 괴수, 거대 로봇과 만나는 <퍼시픽 림>(2013) 같은 영화가 그렇다. 이 여정을 하나로 잇는 장르의 지도를 그린다면 정말 이상한 그림이 나올 것이다.
<푸른 수염> <어셔가의 몰락> <드라큘라> 그리고 아서 코난 도일
멕시코 감독이 할리우드를 통해 일본 대중문화에 바치는 예찬이라는 희귀한 괴물이었던 <퍼시픽 림>과는 달리 <크림슨 피크>는 비교적 정통적으로 보인다. 매력적이지만 수상쩍은 남자와 결혼한 젊은 여자주인공이 반쯤 폐허가 된 저택에서 귀신들과 마주치는 이야기만을 커버하는 영역은 이미 존재한다. 그것은 고딕 로맨스라고 불린다. 할리우드에서는 1940년대에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에서 정점을 찍었고 그 뒤로 인기가 서서히 시들어갔지만 장르 문학계에서는 더 오래전부터 있었고 그 뒤로도 더 오래 살아남았다.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어셔가의 몰락> <위대한 유산> <나사못 회전>과 같은 고전들을 떠올려보라. 델 토로는 주인공인 작가지망생 이디스 쿠싱의 입을 빌려 이 장르가 무엇인지 분명히 한다. “이건 유령 이야기가 아니에요. 유령이 나오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이 당연하고 오랜 전통에도 불구하고 <크림슨 피크>는 현대 관객을 설득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동시대 호러영화의 자극에 익숙해진 장르 관객은 이 영화가 지나치게 얌전하고 심지어 ‘문예적’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일반 관객은 델 토로가 당연히 넣은 신체손상과 호러 효과를 게토화된 호러 장르에서 탈출한 괴물처럼 여길 것이다. 묶여 있으면 그 자체가 그만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국가가 세월이 흐르면서 독립을 잃고 쪼개졌다. 흥행 결과만 따진다면 <크림슨 피크>를 통해 이 장르에 다시 독립성을 부여하려는 델 토로의 시도는 일단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고 봐야 할 텐데, 이후의 관객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오늘 할 일은 그 시도의 가치를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 델 토로는 고딕 로맨스라는 하나의 장르를 복원시키려 시도했지만 이미 오래전에 분열된 장르의 국가는 각각의 전통을 완성시켰고 그 때문에 델 토로의 시도는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여전히 절충적으로 보인다.
이들 중 몇개는 노골적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는 작정하고 만든 <푸른 수염> 이야기다. 이디스의 남편이 되는 토머스 샤프 경과 그의 누이 루실의 관계, 그리고 그들과 함께 붕괴되어가는 앨러데일 홀은 <어셔가의 몰락>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극단적으로 과장된 의상과 세트에서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드라큘라>(1992)의 영향이 감지된다. 주인공의 성 ‘쿠싱’에서 읽을 수 있듯, 이 영화의 최종 목적지는 해머 호러를 경유한다. 비슷한 시기에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픽처스에서 만들어진 로저 코먼 영화들도 그 목적지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아서 코난 도일의 전통 밑에 놓여 있으며 델 토로는 굳이 이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서브 남자주인공 역할을 하는 앨런 맥마이클 박사는 아서 코난 도일이 그랬던 것처럼 안과의사이고 초자연 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 이야기에서 실질적인 탐정이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그는 직접 코난 도일의 이름을 언급한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 그러니까 가난한 영국 귀족과 부유한 미국인 여성의 결혼이라는 소재는 당시 통속물에서 흔히 다루었던 소재이고 실제로 자주 있었으며 몇몇 홈스 소설의 소재이기도 하다. 델 토로는 이 영화에서, 코난 도일 자신은 최대한 분리시키려 했던 이성적인 홈스 소설의 세계와 초자연적인 호러의 세계를 하나로 합쳐놓는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델 토로에게서 영미권 고딕 로맨스로 이어지는 이 여정 사이에 놓여 있는 거대한 영토이다. 그것은 마리오 바바, 리카르도 프레다, 안토니오 마르게리티, 헤수스 프랑코 등이 60, 70년대에 이룩했던 유럽 고딕 호러의 세계다.
멕시코 감독이 20세기 유럽을 우회해서 재창조한 19세기 말의 영국
마리오 바바의 걸작 <킬, 베이비 킬>(1966) 한편만 보더라도 <크림슨 피크>에서 델 토로가 추구하는 스타일이 어디에서 왔는지 대충 이해할 수 있다. 컬러와 조명을 다루는 극단적인 방식, 유령을 다루는 직설적인 태도, 멜로드라마와 선정적인 폭력성의 결합은 모두 바바와 이후 그의 영향을 받아 우후죽순 튀어나온 유럽 감독들의 선례가 있다. 이들을 비슷한 시기에 나온 보다 전통적인 영국 고딕 호러영화인 <공포의 대저택>(1961, <나사못 회전>의 각색물이기도 하다)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 분명해진다. 델 토로가 그리는 19세기 말의 영국은 현대에서 할리우드를 통해 직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의 영국은 20세기의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우회해서 재창조된 곳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무게중심도 과거의 전통 속에서 별다른 재해석 없이 자동비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스토리가 아닌 스타일의 질감, 즉 변형된 토양의 성질에 있다.
지나간 시대는 언제나 타자에 의해 해석되어왔다. 해석자들이 같은 언어를 쓰는 같은 국가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타자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국경과 언어를 넘나드는 이러한 문화적 교류는 당연시되었다. <카르멘>이 프랑스 오페라가 되고 <라트라비아타>와 <안나 볼레냐>가 이탈리아 오페라가 되는 환경에 익숙해진 데에서 자라온 작가들이 러시아에서부터 영국에 이르는 범유럽적인 우주를 창조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언제나 추상적인 과거를 다루었던 고딕 호러 작가들의 작품에서 이런 생산적인 혼합이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 과정이 대서양 저편인 멕시코에서 온 감독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건 이 현상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 뿐이다.
이런 일들은 가까운 곳에서도 일어난다. 예를 들어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꾸준히 만들어졌던 한국 호러영화들은 얼핏 보면 긴머리 소복 귀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토착화된 장르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본 호러와 해머 호러, 당시 유행했던 유로 트래시 영화들의 영향이 무작위적으로 뒤섞인 작품들로, 당시 영화의 특이한 개성도 이런 혼합에서 나온다. 심지어 <전설의 고향>의 에피소드들도 보기만큼 전통적이지 않다. 이건 엉뚱하게 동아시아 구석에서 무작위적인 씨앗을 뿌린 고딕의 힘이다.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은 개봉 당시 강한 일본색을 지적받았지만 정작 일본에선 <장화, 홍련>과 같은 스타일의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 이 스타일은 한국적인 특성이 되어 동아시아 호러영화들을 조금씩 감염시킨다. 그 결과가 그렇게 생산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감염력은 주목할 만하다. <장화, 홍련>의 문화적 바이러스는 낯선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결과물은 충분히 고유의 것이고 언어와 문화의 벽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전파력이 강하다. 그리고 그 전파력은 과거를 기반으로 자유롭게 문화적 요소들을 혼합해서 재창조할 수 있는 고딕의 전통에 바탕을 둔다. 그렇다면 델 토로에서 19세기 영어권 고딕 로맨스로 이어지는 문화적 끈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의외의 자산을 연구하는 렌즈로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자산은 우리 고유의 문화만이 아니라 우리의 관점 자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