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한국영화는 남성들의 육체를 중심으로 그들이 누아르(액션)와 멜로드라마(신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뿌렸던 눈물과 땀, 피에 주목했었다. 고함치고 분노에 일그러진 표정에 담긴 고뇌와 단련된 신체로도 뚫을 수 없는 견고한 사회의 시스템과 싸움을 벌이면서 그들은 항복을 선언했다. 간혹 안간힘을 써서 이 세계의 끝까지 돌파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대부분 개인(혹은 짝패)이 악의 득세를 막아낼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을 뿐이다. 남성 중심의 서사와 남성간의 대결구도에서 벗어나 여성이 중심축을 이루고 그녀들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어떤 삶의 방식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보여준 신수원의 <마돈나>, 안국진의 데뷔작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임흥순의 다큐멘터리 <위로공단>은 서로 다른 형식과 시각을 지니고 있음에도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진지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들이 여성을 향해 다가서는 방법을 찾아보고 각 영화들이 지닌 태도에 대한 질문을 하려고 한다.
<마돈나>, 시스템이 망가뜨리는 것들
신수원은 <명왕성>(2013)에 이어 현재의 불합리한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다. 입시에 대한 과도한 열기와 폐쇄적인 학교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다툼과 계급 차에 따른 비교의식, 특권의식은 행성계에서 퇴출된 명왕성의 존재와 결합되어 지옥이 되어버린 학교를 무덤으로 덮으려는 청소년들의 살육전으로 번져간다. 이 영화에서 신수원은 아이들의 죽음이라는 결론을 먼저 제시한 후 왜 이 아이들이 이렇게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 제기로 서사를 구성했다. <마돈나>도 비슷한 서사적 전략을 사용하지만, 이 영화에서 미나(마돈나, 권소현)라는 여성에 대한 비밀은 전작보다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연계된 사회의 얼굴을 폭로하는 장치가 된다.
계급 문제는 두 영화를 관통하는 테마지만 아이들 사이에 가로막힌 계급적 상황에 따른 차별의 도구, 서열화된 또래 집단이 만나게 되는 문제보다 미나와 간호사 해림(서영희)이 살아가는 척박하고 몰지각한 자본주의에 포획된 한국 사회의 기저에 편견이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미나는 태어날 때부터 갈색이던 머리카락 때문에 매질을 당했고 “당장 검은색으로 바꾸라”는 선생의 명령에 따라 머리를 물들인다. 하지만 잉크가 비에 씻겨 내리고 먹물이 손에 뚝뚝 떨어지는 것을 경험한 후 완벽하게 또래 집단으로부터 버림받게 된다. 그녀는 70년대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의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점점 삶의 후미진 곳으로 밀려난다. 콜센터에서 일할 때 과장에게 이용당하고, 화장품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일 때도 운전기사의 탐욕스러운 눈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임신 6개월의 몸으로 사창가 근처에 쪼그리고 앉았던 그녀는 창녀가 되었고 뇌사에 빠진 후에도 육신을 탐하는 자들의 손아귀에 놓인다. 이 기구한 인생역정을 겪으면서 그녀는 이름을 잃고 편견과 조롱에서 비롯된 ‘마돈나’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좋을지 방향을 잃게 된다. 사랑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모든 사람을 순수하게 받아들였지만, 그녀에게 남은 것은 고도비만의 몸과 원치 않은 아이를 잉태한 신원미상의 뇌사자에 불과하다.
신수원은 그녀의 정체성(그녀의 혈연관계와 그녀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을 추적하기 위해 간호사 해림을 등장시킨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아기를 유기했던 그녀는 마돈나를 알게 될수록 아기에 대한 죄의식과 대면하게 된다. 그녀의 공허한 눈동자,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동공이 분노를 거쳐 속죄와 구원을 향해 나아가면서 마돈나와 해림이 분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도입부에서부터 명확하게 드러난다. 타이틀-다리 아래로 카메라가 이동하면 버려진 마돈나의 처참한 모습과 으슥한 도시의 고가도로-수면에 어른거리는 해림의 얼굴-강에 서있는 그녀-물에 떨어지는 트렁크의 숏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은 마돈나가 분만을 하는 중에 해림이 홀로 출산을 하고 아이를 트렁크에 넣은 후 강에 던지는 숏-물에 가라앉은 트렁크-트렁크를 열고 아기를 구해 목에 감긴 탯줄을 풀어주고-마치 성모가 승천하듯 수면을 향해 올라가는 숏과 연결된다. 해림의 손에 죽었던 아기는 마돈나의 희생에 의해 구원되었고 해림으로 인해 마돈나의 아기는 생명을 얻게 된다. 두 여성이 동일시된 지위는 네번에 걸쳐 등장한다. 만삭의 배를 만지던 해림에게 “불쌍한 년”이라는 환청이 들린다-학교를 떠나던 날, 소녀 미나가 포커 아웃되면 해림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마돈나의 친구를 만난 후 버스 정류장에서 만삭의 모습인 그녀를 바라본다-마돈나의 침대에 누워 있는 해림에게 마돈나가 다가와 대화를 나누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네번의 대면은 소리, 뒷모습, 먼 거리의 정면, 나란히 앉은 거리로 좁혀지지만 결국 그녀들은 환상 속에서만 교감이 가능할 뿐 듣고 본 것이 실제라고 증명하거나 현실에서 마주할 수단을 지닐 수 없다. 그들을 잇는 유일한 것은 모성(애)이다. 잉태와 출산을 경험했지만 아기가 존재하지 않는 엄마 해림과 뱃속의 아기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 엄마 미나는 잃었던 생명과 잃을 뻔했던 생명을 이어주는 유일한 현실의 존재가 된다. 해림의 참회와 미나의 구원이 결론부에 제시되기 위해서는 아이는 살아야 하고 엄마는 성모의 지위를 획득하는 과정을 향해 나아가야 하고, 마돈나의 구속사역은 완수되기 위해 해림과 마돈나는 서로를 알아보아야만 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가볍지만 날카로운 반어법으로
<마돈나>가 삶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면서 수난과 구원의 과정으로 향해 갔다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죽도록 고생하면서 일을 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수남(이정현)의 삶을 블랙코미디의 톤으로 보여준다. 안국진은 나카시마 데쓰야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2002), <친절한 금자씨>(2005)에서 영감을 받은 장르의 혼종을 만들어낸다. 미래를 꿈꿀 수 없고 재능을 발휘할 수 없는 여성 노동자는 장르의 컨벤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규칙을 뛰어넘는 키치적인 가벼움의 화법을 통해 구성된다. 수시로 자리를 바꿔 등장하는 희극과 비극, 억척스럽지만 귀여운 수남의 웃는 모습, 속을 도무지 알 수 없는 나른한 말투의 통장, 소리를 지르면서도 조용히 말하고 있다는 남편의 진지한 모습, 손재주를 타고난 그녀의 기막히는 살인 솜씨 등 이 영화에서 오밀조밀하게 이어지는 세심한 미장센과 공포와 웃음을 가로지르는 타이밍은 아이러니와 그로테스크를 기반으로 한다. 이 영화의 서사는 <마돈나>와 마찬가지로 성실한 노동자인 수남이 연쇄살인을 저지르게 된 이유에 집중해서 진행된다. 그녀는 마을 통장이자 심리치료사를 포박한 상태에서 자신의 과거를 구술한다. 엘리트의 삶이냐 공순이의 삶이냐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시작된 그녀의 인생사는 자격증을 따도 쓸모없는 사회를 경험하고 고된 직장 생활 중 만나게 된 남편과의 사랑과 결혼으로 이어진다. 남편의 청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수술 때문에 집을 포기했지만 남편은 수술 부작용으로 인해 손가락을 잃게 된다. 절망한 남편을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벌어 집을 장만하지만 남편은 자살을 시도하고 집은 재개발의 이권 다툼에 휘말리게 된다.
아무리 힘들어도 남편을 위한 사랑으로 버티던 그녀를 위기로 몰아넣은 사람들은 해병대 군복을 입고 다니는 폭력적인 원사, 우아하고도 징글맞게 방해공작을 일삼는 통장,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세탁소 주인이다. 수남은 애초에 재개발에 따른 이권이나 공동의 삶에 관심이 없다. 그녀는 남편과의 자족적인 삶 하나면 만족하고 험한 노동 앞에서도 불평 없이 살아왔지만 불한당 3인조의 폭행과 고문을 견디다 못해 직업적으로 단련된 기술을 사용해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순전히 먹고살기 위해 단련된 손재주는 오랜 노동의 흔적이자 살인무기가 되는데 원사의 집으로 불붙은 신문을 던지고 세탁소 주인에게는 딱지를 눈에 꽂아버린다. 칼도 잘 다루는 수남은 통장에게 복어를 먹임으로써 독살에 성공하고 그녀를 의심하는 경찰의 목을 간단히 그어버린다. 그녀의 말간 얼굴에 숨겨진 광기와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는 그녀의 남편을 향한 사랑과 약속 때문에 가능해진다. 안국진은 심리치료-님과 함께-신혼여행이라는 세개의 챕터를 나눔으로써 수남의 과거-현재-미래를 옭아매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관통한다. 살인을 해야 그녀가 살게 되는 모순처럼 잔혹하지만 우스꽝스럽고 순진하지만 광포하고, 진지한 삶의 열정만큼 냉혹한 폭력의 경계를 횡단한다.
<위로공단>, 여성 근로자들의 현실에 카메라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여성 노동자를 장르의 반어적인 표현을 통해 보여준다면 <위로공단>은 굴곡진 현대사를 관통하는 여성 노동자의 삶과 그녀들의 목소리를 충실하게 기록한다. 노동자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지척에서 느껴질 만큼 증언은 생생하고 그가 새롭게 만들어낸 이미지는 목소리 사이의 간극을 이어가고 있다. 동일방직에서 다산콜센터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스물두명의 인터뷰이가 전해주는 노동탄압의 현장에 대한 증언-자료화면(사진, 영상, 연극 무대, 퍼포먼스 등 다양한 형식)-감독 자신이 찾아다닌 노동의 현장과 현재의 상황에 대한 기록-소녀들을 등장시킨 상징적 이미지-감독이 포착한 시적 이미지가 수시로 교차한다. 기록의 층위에서 관객들은 동일방직의 똥물 투척 사건이 일어난 70년대, 구로동 노동자들의 노조연대에 대한 탄압이 벌어진 80년대, 기륭전자의 노동자 투쟁과 사쪽의 야반도주사건, 홈에버의 노동 쟁의, 삼성전자와 백혈병 발병 사태, 항공사 승무원의 감정노동과 미적 노동, 메르스 사태와 병원 물리치료사의 고충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노동 현장에서 겪었던 여성들의 담담한 말과 호탕한 웃음, 탄식과 울음을 들을 수 있다.
덧붙여 캄보디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과 한국 회사에 최저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를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목소리까지 담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는 40년이 넘는 여성 노동자의 수난에 대한 지형도가 된다. 임흥순은 이들의 말에 주석을 달아가듯 윤곽선에 세밀한 선과 면을 덧대고 있다. 다양한 이미지가 불연속적으로 배치되거나 감독의 눈에 비친 공간에 대한 기록, 그의 마음에 맺힌 이미지가 교차로 삽입되는 형식이다. 기록과 잇대어 있는 임흥순의 이미지는 당대의 소녀들이 고통받았던 사실에 대한 위로의 마음처럼 느껴진다.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처럼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자매들이 얼굴을 더듬거나 눈을 가린 채 손을 잡고 험한 길을 걸어간다. 아름답고 고요한 숲길을 걷다가 지친 동생을 업고 가는 언니를 통해 실제의 목소리 바깥에 위치한 현실과 환상을 모두 끌어들여 그녀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있다. 증언이 다큐멘터리 본연의 위치에서 사실 전달에 충실하다면 가발 공장에 걸린 섬뜩한 가발과 마네킹, 불길하게 하늘을 가득 채운 까마귀떼와 공장지대를 어지러이 날고 있는 새떼, 도축장에서 잘려나가는 고기의 살점과 살덩이,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의 행렬, 방치된 폐허의 공간과 무심코 흩뿌리는 눈과 비의 흔적은 노동의 이면에 새겨진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가고 쉽게 변하지 않는 세상의 흐름을 내비치는 듯하다.
그리고 그녀들의 쉬울 리 없을 미래가
세 영화가 여성에 대해 접근한 방식은 다르지만, 이 사회에서 여성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문제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남과 미나를 표현하는 방법 중 몇 가지가 생각난다. 미나는 타인에게 몸을 굽히고 손을 부여잡고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했고(이 자세는 여러 형태의 폭력으로 변형된다), 손을 예쁘게 가꾸는 네일숍을 운영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휘어졌다. 수남은 허리도 펴지 못한 채 손이 불어터지고 살점이 너덜거리도록 장시간 일했지만 신혼여행을 위해 오토바이와 가죽점퍼를 산 것 외에는 물질을 위해 소비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손에 담긴 노동의 흔적과 삶의 오랜 피로, 그럼에도 쉽게 다가오지 않을 미래가 염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