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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바보도, 괴물도 아니라면

새로운 청춘영화 <잉투기>의 신기하지만 곤혹스러운 에너지

엄태화 감독의 <잉투기>에서 어른들은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인터넷 격투기 동호회에서 ‘칡콩팥’이라는 아이디로 유명한 태식은 커뮤니티 라이벌이었던 ‘젖존슨’으로부터 대낮에 기습적으로 얻어터진 뒤 그걸 담은 동영상이 네티즌들에게 회자되는 공개망신을 당한다. 태식은 젖존슨에게 복수를 맹세하고 그를 찾아다니는 게 인생의 단기 목표인 백수 잉여인데도 그의 어머니는 그를 별달리 타박하는 기색이 없다. 자식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포기한 듯 보인다. 경매로 처분된 부동산을 접수하는 일로 돈을 버는 그의 어머니는 한국을 1%만을 위한 사회라고 원망하면서 코스타리카로 이민 갈 생각이다. 영화 후반에 태식이 ‘잉투기’라는 잉여들의 격투기 대회에 나가 젖존슨과 오프라인에서 재대결할 의지를 불사르며, 이제 뭔가 할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의지를 얻었노라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고 이민 가지 말자고 부탁을 하자, 어머니는 부드럽게 거절하면서 그렇다면 그녀 혼자만 이민을 가겠노라고, 보증금 5천만원에 월세 30만원 정도는 자기가 부담해주겠노라고, 가족이라고 꼭 함께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묻는다. 어머니의 제안에 대한 태식의 대답은 이랬다. “근데 우리가 언제 같이 살았어? 같은 집에 산다고 같이 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밥알을 입안에 머금은 채 다 큰 사내가 어머니에게 이런 투정 비슷한 지적질을 할 때 관객이 이 주인공을 좋아하긴 힘들다. 공감이 가진 않지만 혐오나 경멸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엄태화 감독은 그의 동생 엄태구가 연기한 이 태식이란 인물의 저렴한 정체성을 괄호치고 바라본다. 뭘 생각하는지 모르는 인간이지만 괴물 주제도 못 된다. 젖존슨을 죽이겠다고 부엌칼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그는 누굴 죽이기는커녕 누가 자기 앞에서 팔 동작만 크게 해도 움츠러드는 인간이다. 젖존슨에게 맞은 후유증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지만 본성이 원래 그런 쪽에 가깝다는 추측이 든다. 겁쟁이인 것이다. 눈에 살기를 가장하고 말과 행동을 거칠게 해도 그는 폭력적인 반영웅이 될 자질이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도 그는 누굴 죽이겠다고 설치고 다니며 선배이자 정신적 후원자인 희준의 말도 잘 듣지 않을 만큼 스스로 고립을 택하는 인간이다. 이 인간 앞에서 관객이 느끼는 건 난감함이다. 아마도 태식의 어머니가 자식에게 느꼈을 감정도 난감함이 아닐까.

괴물은 일종의 사회적 증상의 현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잉투기>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괴물이 되지 못하는, 말 그대로 잉여인데 겉보기에는 괴물이 되기를 갈망하는 듯 보인다. 태식과 희준이 인터넷 먹방으로 나름 유명한 여고생 영자를 만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난감한 캐릭터를 만나 당황한다. 킥복서 출신의 이 여고생에게는 격투기 도장을 운영하는 삼촌이 있다. 아마도 부모가 돌아가셔서 삼촌이 돌봐주고 있는 듯한 이 여고생의 삶도 요령부득이다. 인터넷에서 먹방을 운영하면서 빨간 가발을 쓰고 네티즌들과 말로 분탕질하는 이 소녀는 어른들의 제어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영자를 보살피는 삼촌은 영자에게 절절매는데, 집에서 가져온 음식들을 냉장고에 채워주면서 자기 집에도 좀 들르라고 완곡하게 부탁하며 영자의 눈치를 살핀다. 화면이 바뀌면 그는 영자와 함께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화면을 보며 키득거리고 있다. 격투기 도장의 관장으로서, 영자의 삼촌으로서 (김준배가 연기하는) 겉인상과는 달리 그는 어른의 권위감 있는 존재와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물이다. 영자가 출입문이 고장났다고 하면 군말 없이 와서 고쳐주는 고분고분한 후견인이다.

어른들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주인공들은 어른들의 훈계질을 거부할 자질이 있지만 그런 당당함으로 그들이 몰두하는 짓들은 그들 스스로도 병신 짓이라고 인정하는 것들뿐이다. 영자는 먹방을 진행할 때 네티즌 누군가와 채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충무김밥님, 저 이러는 거 부모님도 아시냐고요? 그러는 넌 이거보는 거 부모님이 아시냐?” 영자의 이 말은 나도 병신이고 너도 병신이라는 말이다. <잉투기>에서 무기력하기만 한 인물들은 자학을 긍정할 때만 생기를 얻는다. 태식과 희준은 영화에 처음 등장할 때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무기력으로 일관한다. 영화 첫 장면에서 얻어터진 태식은 늘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꾸부정하게 걸으며 눈을 틱틱거리는 행동으로 일관하고, 희준은 잉여짓을 하는 태식을 말리지 못하고 간섭하지도 못하면서 무력하게 따라다니기만 한다. 그가 처음으로 태식의 바보짓을 말리는 건 태식이 격투기 도장에서 들고 있던 칼로 도장단원들을 위협할 때뿐이다.

그들과 달리 영자는 처음부터 자학으로 일관하며 생기를 얻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학할 뿐만 아니라 남들의 자학을 보는 걸 재미있어 한다. 자신을 공격한 뒤 사라진 젖존슨을 태식이 찾아다닐 때 도우미를 자청한 그녀는 젖존슨과 오프라인에서 재대결을 원하는 태식에게 격투기를 가르친다. 영자의 행동을 애정으로 오인한 태식은 그녀에게 남자로 접근할 용기를 얻는다. 자신을 왜 도와줬느냐고, 나를 좋아한 것 아니냐고 태식이 묻자 영자는 직설로 되받는다. “그냥 좆나 재미있을 것 같아 그랬다. 왜? 젖존슨한테 처맞은 칡콩팥이 복수한다고 설쳐대면 웃기잖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아저씨만 심각하지 다들 좆나 비웃을걸.” 영자는 태식의 잉여짓을 존재증명으로 해석하고 스스로를 추락시키는 행동으로 받아들이며 그걸 즐긴다. 마치 그녀가 인터넷에서 희한한 행동을 하며 용돈을 벌고 병신 공동체를 운영하듯이 그녀는 태식의 행동을 응원한다.

감독 스스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에서 이영옥이 연기한 영자 캐릭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이 영화에서의 영자는, 류혜영이라는 매력적인 배우의 행동양식을 통해(그녀는 이미 양익준 감독의 <미성년>이라는 중편영화에서 비슷한 매력을 보여준 바 있다) 다른 색깔을 얻는다. <바보들의 행진>에서의 영자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속물 그 자체다. 그 영화에서 ‘여자는 떨이로 팔리기 전에 시집가야 한다’며 주인공 병태를 애태우던 영자는 그를 만날 때마다, 가진 것 없고 미래도 불투명하다는 병태 스스로의 결핍감을 자극하지만, 병태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어서 그와 딱히 결혼할 것이 아닌데도 군대에 가는 그를 배웅하며 마치 엄마처럼 병태의 무운을 빌어주는 작별인사를 한다. 그 영화에서, 병태는 자신이 억누르고 있는 세속적 욕망의 거울로서 영자를 본다. 동시에 정체가 불분명한 이상주의적 가치로 대학 생활을 상처로 덧칠하는 자신의 청년기와 달리 그녀에게서 유별나게 팔팔 끓는 젊음의 생기를 본다. 그것이 속물적 가치로 터질 듯한 생기라 하더라도 그건 자신의 현실과 미래의 결핍일지 모른다고 병태는 생각할 것이다. <잉투기>의 태식도 영자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병신 잉여짓을 하되 자신보다 훨씬 당당하게 그 짓에 임하는 영자에게 기대면서 태식은 영자를 짝사랑한다고 착각하지만, 영자는 가차 없이 그런 태식의 환상을 짓밟는다. 우리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그런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확언하는 것이다.

영화 말미에 태식과 영자, 그리고 희준은 자학에 가까운 퍼포먼스로 자신들을 일시적으로 구원한다. 희준은 잉투기에 나가 상대에게 실컷 얻어터지면서 비로소 살아 있다는 쾌감을 느낀다. 태식은 길거리에 나가 묻지마 폭력을 휘두르다가 반격을 당해 군중에게 엉망진창으로 두들겨 맞으면서 그때까지 상대의 주먹을 쳐다보지 못하던, 젖존슨에게 맞았던 후유증의 증상을 극복하게 된다. 영자는 인터넷 먹방 건으로 자신을 왕따시킨 자기 반 친구들에게 밀가루 포대를 들고 아침 자습 시간에 쳐들어가 밀가루를 급우들에게 처바르고 자신도 밀가루를 뒤집어쓴다. 카톡으로 태식의 묻지마 폭행 현장 소식이 알려지면서 희준과 영자 모두 그 곳에 도착하지만 영자는 휴대폰으로 그걸 촬영할 뿐이고 희준은 지켜만 볼 뿐이다. 태식이 이전과 다른 인간으로 진화하는 유일한 표식은 자신을 때리는 상대의 주먹을 피하지 않고 또렷하게 상대를 쳐다볼 수 있는 자학의 용기를 갖췄다는 것뿐이다.

<잉투기>에서의 주인공들의 이런 자학의 긍정은 좀처럼 맥락을 가늠하기 힘들기 때문에 난감하다. 이를테면 그것은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이나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 날>과 같은 옛날 한국영화에서와 같은 사회적 맥락이 없다. 있다면 도저한 개인주의, 고립과 자학과 심지어 자살로 귀결되는 개인의 상실감의 재확인일 뿐인데 이걸 어떤 공감이나 비판의 테두리로 묶으려 하지 않는 점에서 엄태구 감독의 결정을 사실주의적 태도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나는 종종 학생들의 내면에 있는 세속적 욕망의 두께에 놀라지만, 동시에 그 욕망의 두께에 비해 곁에서 보기에는 엄청난 그들의 무기력에도 놀란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젊은 세대를 향한 기성세대의 위로에 동감하지 않는 나는 그냥 난감한 심정으로 그들을 지켜보곤 한다. <잉투기>에서 받은 것도 비슷한 곤혹감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 심지어 동시대의 창작자들에게서도 그들의 내면을 모르겠다고 하는 관찰자적 초연함을 보게 되는 것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이 자학이 젊은 세대의 반항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반항이라는 어휘에서 기성세대의 감염된 언어의 흔적이 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의 행동양식을 설명하는 어휘를 갖고 있지 못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말은 가장 기만적인 어휘이고 연대나 공동체의 가치를 운위하기에는 기성세대도 그 말의 진정성을 설득할 꼴값들을 하고 있지 못하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에는 다 무기력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믿었을 뿐이다. 그게 이상적인 가치든, 세속적인 가치든 어쨌든 미래의 내가 실현할 수 있는 가치라고 믿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는 상당수가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라고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개인주의의 전도된 가치는 사회적으로 유일무이한 것으로 찬양되었다. 개인주의가 함축하는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개인의 가치는, 자기의 책임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자기가 지향하는 바를 향해 도전하는 씩씩한 개인의 가치는, 냉정한 승자독식 사회 시스템의 위선적 장애물에 막혀 실현되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오늘의 잉여 청년들은 그런데도 여하튼 개인주의의 위장을 쓰고 헐값에 미래를 팔아치운다. 그들의 개인주의는 고립주의로 떨어지고 기성가치의 부정은 쇄말주의에 함몰된다. 지질한 행동에 몰두하는 <잉투기>의 등장인물들이 자학과 자살의 연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그들 삶에 대한 정직성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기성세대로서 나는 이 영화의 전개와 결말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다. 사람이 사는 것에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너무 지질한 것은 아니었으면 한다. 지질한 것에 몰두하는 인물들에게서도 우리와는 다른 활력이 있기를 바란다. 그들이 제발 진정으로 재미있게 살기를 바란다. 세속적 가치에 매달리든, 이상적 가치에 매달리든, 우리가 동조할 수 있는 다른 재미있는 유형을 창조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괴물이 아니라, 괴물조차도 될 수 없는 불행의 주인공들이라는 걸 확인하는 게 고통스러웠다. 그들이 스스로 얻어터지기를 자임하면서 여하튼 삶의 활력을 스스로 충전해 다른 길로 빠져나가기를 바란다. 하긴 이 영화 속 인물들의 그 잘난 체하지 않는 자학이, 정직한 활기의 다른 얼굴이라면 긍정할 수도 있겠다. 격투기를 소재로 한 액션활극으로도, 서브플롯으로 로맨스조차도 성립할 수 없는 <잉투기>의 신기한 에너지를 마주하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곤혹감을 어쩌지 못하면서 그래도 영화를 통해서나마 뭔가 더 부숴버려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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