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용 아저씨는 춘천 육림극장의 영사기사다. 원래 나이는 쉰일곱, 호적 나이로는 쉰넷. 초로의 나이지만 열여섯에 시작한 영사기사 경력이
벌써 40년이 넘었다. 그를 만나러 육림극장을 찾아가는 길.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하여 한 시간 반 남짓, 춘천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찾아간 육림극장은 닭갈비 골목이 있는 춘천시내 명동, “개고기 팝니다” 팻말이 즐비한 중앙시장 옆에 있었다. 흰 페인트칠이 돼 있는 오래된
극장 외벽에는 아직도 사진 대신 그림 간판이 걸려 ‘상영프로’와 ‘다음프로’를 알리고 있었고, 극장 안 어둑한 매점에는 오징어, 팝콘,
바나나우유가 그늘 속에 놓여 있었다. 예쁜 제복의 여자직원 대신 매표구에도 점퍼를 입은 아저씨가 떡 하니. “심상용 영사기사 아저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말을 물으니 올라가보라 한다. 영사실은 어디에 있을까. 일요일 낮인데도 관객은 별로 없고, 어둠 속에 몇번인가 발길은 계단턱을
더듬는다. 영사실 창에선 예의 빛다발이 쏟아져나오는데 그곳으로 가는 문은 어디 있는 걸까. 영사실은 뜻밖에, 아니 어쩌면 원래 그런 것인지,
상영관 바깥에 따로 출입구를 가지고 있었다. 작은 나무문을 가만히 열자, 아저씨 한분이 반갑게 맞이한다. “나야, 내가 심상용이야.” 영사실
안쪽 소파에 마주앉아 그렇게 영사기사 심상용씨와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음날, 그 다음날까지 계속된 이야기.
까막눈 소년, 필름의 빛에 매료되다
1950년대, 춘천시내 1호 막국숫집 아들이었던 심상용씨는 학교를 가기 전 극장을 먼저 만났다. 말 그대로 그랬다. 집과 학교 사이, 그
길가에는 언제나 극장이 있었다. 극장 가까운 음식점이었던 그의 집에는 늘 극장 사람들이 막국수를 먹으러 왔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년에겐
쪼그려 숙제할 변변한 자리 하나 없었다. 6·25가 갓 끝났을 때의 얘기다. 소년에게 공부는 어렵고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극장이
있었고 늘 그를 귀여워해주는 ‘극장 아저씨들’이 있었다. 언제든 극장 문 앞에 서기만 하면 소년은 그냥 통과였다. 심심하면 모르는 아줌마
옆에 아들인 양 서기도 했다. 극장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편치 않던 소년의 ‘없는’ 의자 하나를, 아니 수백개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학교를 가는 대신 소년은 극장엘 갔다. 작은 아이의 오랜 시작. 소년의 영화에 대한 처음 기억은 ‘총싸움과 뽀뽀’다. 제목은 기억하지 못해도
어느 한 장면, 총싸움을 하다 남자가 죽어버리자 여자가 남자한테 ‘뽀뽀’를 해주던 한 장면은 아직껏 눈에 선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학교에 가는 대신 극장에 있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심상용씨는 거의 까막눈이다. 대강 읽기는 하지만 쓸 줄은 모른다. 자신만의 글자가 있어서 그가 ‘프린스’라고 써놓은
글자를 보고 다른 이들은 ‘슈즈’라고 읽는다. 그래서 그에게는 아직 영사기사 자격증이 없다. 35년 동안 공부하고 또 했지만 불합격, 불합격.
아침부터 밤까지, 휴일도 없이, 명절날 남들 “떡에 술에 잘 먹을 때”도 영사기를 떠나지 않았던 그는 60점에서 18점이 모자라 아직 영사기사
자격증이 없는, 그러나 100점짜리 베테랑 영사기사다. “대한민국 최고극장” 메가박스에서 그가 받는 월급 100만원의 두배를 그의 후배가
받고 있다고 그는 자랑스러워 한다. 영사기사 일이란 예나 지금이나 힘든 일이다. 중년의 영사기사에겐 더더욱. 최신장비를 갖춘 멀티플렉스들이
생겨나면서 일자리가 좀 늘긴 했지만, 30대 이하의 일손을 주로 원하고 있고, 게다가 기술발전으로 한명의 영사기사가 여러 관을 관리할 수
있게 되어 일자리가 크게 는 것도 아니다. 지방의 낡은 극장에 나이많은 영사기사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 심상용씨에게 극장 일을 하며 산
보람이 뭔가 물으니 “덕분에 글씨 공부한 것”이라고 답한다. 그의 낡은 영사기 옆에는 오랫동안 본 책 한권이 늘 놓여 있다. 영화를 틀기
위해서는 볼 필요가 없는 영사기사 매뉴얼. “그래도 40년을 했는데 자격증 하나 없으면 그렇잖아. 어떻게든 따려고 하지. 애들한테도 난
한글만 알면 대학 가는 거라 그랬거든.” 그래서 곁에 두는 책 한권이다.
한달 봉급 300원, 밥은 늘 밀가루 풀죽
‘가케모치.’ 자전거로 필름을 배달하는 <시네마천국>의 토토를 기억한다면 심상용씨의 극장 초년생 시절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1960년,
심상용씨는 이 극장 저 극장 영화필름을 배달하는 ‘가케모치’로 극장 일을 시작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노가다’…. 사기를 당해 집에서
하던 막국수 가게가 문을 닫은 뒤 어린 나이에 별별 일을 다 하던 때였다. ‘문화극장에서 가케모치를 구한다’는 친구 말을 듣고선 바로 시장통
극장으로 달려갔다. 필름 한권이 10분짜리일 때였다. 한달 봉급은 300원. “노가다 뛰면 하루 200원 주던 때”, 봉급을 타면 견습생
소년은 이발을 하고 신발을 사는 데 그 돈을 다 써버리곤 했다. 밥은 늘 밀가루 풀죽이었다. 그렇게 허기진 배를 안고 쉴새없이 문화극장,
소양극장, 육림극장으로 페달을 밟던, 자전거가 없을 땐 필름을 들고도 뛰던 어느 날, 그는 자전거에 필름을 싣고 가다 버스 밑에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도랑께로 굴러가는 필름이 물 속에 빠지기 직전, 그는 젖을세라 필름을 품에 꼭 안고 극장까지 뛰었다. 몸이 다쳤는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날, 영화는 1초도 끊기지 않았다고, 심상용씨는 아직도 자랑스레 그날 일을 이야기한다. 달리기 잘하던 ‘가케모치 소년’은
포스터도 붙이고 간판화가의 “빠레트도 닦고”, 극장이 좋아서, 또 먹고살 일이 필요해서 극장의 무슨 일이든 배우려 했다. 배우들 얼굴을
크게 그려붙이는 간판 일도 그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기도 글씨가 있”는 탓에 그는 까막눈도 할 수 있는 기계 일을 택했다. 영사기사.
글씨를 몰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는 열여섯 나이에 그렇게 영사기사가 됐다.
<또순이>부터 <클럽 버터플라이>까지, 나의 <한국영화회고록>
“도금봉 나오는 <또순이>”를 시작으로 그는 3년간 잡던 걸렛자루를 놓고 영사기를 맡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도대체 몇편의영화를, 몇권의 필름을 영사기에 끼웠을까. “다 이어붙이면 한 지구 세 바퀴는 돌겠지, 아마”, 그는 이렇게 짐작한다. 문희, 신성일,
최무룡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알랭 들롱이 최고 스타이던 시절, “짱개영화로는 <스잔나>, 액션물로다가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 외화로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콰이강의 다리>”가 그 시절 그의 마음을 훑고 지나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영화다. <미워도 다시 한번>을
틀 때인가는 관객과 함께 펑펑 울었다.
탄소막대에 불을 붙여 그 빛을 거울에 반사시켜 작동시켰던 60년대 ‘카본’ 영사기 시절, 그리고 “우리나라가 이기는 걸로 나오는” 전쟁영화
일색이던 시절, 그리고 관객도 대부분 단체관람 온 학생들이던 시절, 그가 빛을 불어넣는 필름들엔 키스신조차 거의 없었다. 그렇게 큰 파장을
불러왔던 <자유부인>도 “다 입고 있다 쓱 벗고는 끝”이었다.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 육림극장 1관의 영사실에는 새로 들인 최신식 ‘CP500
디지털’ 음향설비에서 <클럽 버터플라이>의 끊이지 않는 교성이 민망할 만큼 계속 흘러나오고 있지만 말이다.
60년대 초는 한국영화에서 흑백시대가 가고 처음으로 “총천연색 영화”가 나온 때였다. “칠십미리 시네마스코프” 외화들도 꼬리물듯 달려왔다.
<원탁의 기사> <왕중왕> <대장 부리바>. 영화가 펼쳐놓은 드넓은 세상을 보러 사람들이 너도나도 극장에 ‘영화구경’을 오던 때였다. 영사기사의
손놀림 또한 언제보다 더 신이 났다. 총천연색 영화 얘기에 흥을 내던 그가 80년대 와서 잠시 말을 멈춘다. 컬러TV가 나오면서부터, TV에
관객을 빼앗긴 시절인 것이다. 젊건 늙었건 사람들이 다 “테레비”만 보던 시절. 관객이 들지 않자 한국영화도 제작비를 많이 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영화도 별로였다. “팔십오년인가 육년인가, 규제가 풀리면서 러브신이 많아졌어. 그러니까 도로 관객이 늘었지.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된 거야.” 영화법이 바뀌어 제작자유화가 이뤄진 시기를 영사기 뒤의 산증인은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젖은 필름을 말려, 첫사랑을 영사하다
현재 춘천 육림극장에선, 80년대 들여온 한 시간짜리 필름용 일제 ‘마쓰다 제논 램프하우스’ 영사기를 한관에 두대씩 놓고 쓰고 있다. 순간전압
4500V의 이 일제 영사기는 영사기사를 한 시간에 한번씩 일어나게 만든다. 이야기에 푹 젖어들다가도 한 시간이 되면 심상용씨는 어김없이
일어나 능숙한 솜씨로 필름을 갈아끼웠다. 모터가 도와주긴 하지만 다 돌아간 필름을 되감는 일도 그의 몫. 그래도 좋아진 기계 덕에 식은
땀 날 사고는 별로 없다. 하지만 구식 영사기 시절엔 영사 사고는 피할 수 없는 불청객이었다. “한번은 정전이 된 거야. 카본으로 할 때니
영사기는 돌릴 수 있지. 근데 소리는 못 내잖아. 그게 무슨 외국영화였거든. 갑자기 소리가 안 나니까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렸지. 그때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괜찮다고, 우리가 뭐 영어를 아냐고. 그냥 자막만 보면 되니까 계속 틀어달라고 외치더라구. 그래서, 소리없이 조용히 한
시간을 그렇게 틀었어. 사람들도 아무도 안 나가고 영화를 다 봤어.” 지금 같으면 환불 소동이 벌어지고도 남을 일이건만, 그 시절 관객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그게 더 궁금해서 기꺼이 무성영화를 청했던 것이다. 10분짜리, 20분짜리 필름이 한 영화에도 여러 개 들었던
시절, 필름 순서가 뒤바뀌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그럴 때면 심상용씨는 재빨리 필름을 바꿔끼는 ‘즉석편집’을 하곤 했다. 관객은 실수가 있었던
건 추호도 모르고 ‘아, 아까 뭐 생각하는 장면이었나보다’ 하고 넘어가곤 했다.
각종 사고 대처에 능숙했던 그에게도 한번은 가슴 서늘한 순간이 있었으니, 때는 1968년, 심상용씨가 스물넷 청년이던 시절이다. 비가 거세게
쏟아지던 어느 날, 서울에서 남진이 나온다는 <저 언덕을 넘어서> 예고편이 도착했다. 필름은 모두 젖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상 위에 필름을
쭉 펼쳐놓고 그것을 말렸다. 겨우 말린 필름을 손때 묻은 영사기에 걸었을 때, 객석 위를 지난 빛줄기가 새겨내는 그림 속 여배우는 다름
아닌 그가 어릴 적부터 짝사랑하던 여인. 코흘리개 시절부터 한동네에 살며 “골려주며” 좋아하던 또래 짝사랑이 어느새 여배우가 되어 필름
속에 들어 있었다. 청년이 되어서도 잊지 못하던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손으로 스크린에 영사하며, “성공하니까 고향을 찾지 않는” 옛사랑이
희미한 빛으로 살아나는 걸 바라보며 청년 영사기사는 가슴이 무너졌다. 몇편의 영화에 출연한 뒤 1971년, 그녀가 결혼해 미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접한 뒤 얼마 안 있어, 우연인지 아닌지 그도 같은해 결혼을 한다. 신부는 친구의 사촌여동생. 4녀1남을 얻은 그는 어느새 큰딸에게서
태어날 첫 손주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필름, 나의 극장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천국>에서 마을 신부는 종을 쳐 키스신을 잘라내고, 토토는 훗날 신사가 되어 키스신만 모인 그만의 영화를 본다.
심상용씨에게도 그런 ‘필름쪼가리’들이 있다. 키스신은 아닐지라도, 영사실에서 일하면 흠집이 나거나 해서 이렇게저렇게 잘려나가는 필름들이
많이 있었다. 젊었을 적, 그 필름쪼가리들을 꼼꼼히 모으던 그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손수 환등기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일주일이 꼬박 걸려, 그는 깡통을 구해다가 전구를 넣고 필름쪼가리들을 걸어 환등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집에 광목천을 걸고 친구들을 불러
슬라이드를 틀어줬다. 묘한 기쁨이 몰려왔다. 그만의 작은 가내 극장이었다.
젊을 때 이미 맛본 이 ‘내 극장’의 달콤한 꿈은 1992년, 그에게 현실이 되었다. 시내 밖, 양구군에 있는 150석짜리 작은 극장을
주인이 내놓았을 때, 심상용씨는 마을금고에서 2천만원을 빌려 극장을 빌렸다. 다달이 100만원씩 삯을 내야 했다. 당연히 직원을 쓸 돈은
없었기에, 그는 춘천 시내에 아내와 세딸, 아들을 남겨두고 어머니와 큰딸과 함께 극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자리를 비울 때면 영사기는
다른 가족의 손에 맡겨졌다. 그때 익힌 실력으로, 그의 자녀들은 다 영사기를 돌릴 줄 안다. 심 기사에서 심 사장이 되었던 날들. 필름을
가져다주는 버스기사들과 술 한잔 기울이고 얼마 만인지 다시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던 그는 즐거운 극장장이었다. 내키면 동네 사람들을 불러
공짜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양구는 군부대가 있는 마을이었다. 손님은 주로 주말, 군인들과 그들을 면회하러 온 애인들. 그게 평일날 손님이
없는 이유였고, 2년 만에 그는 극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 속에 그가 다시 춘천시내로 돌아온 날, 그날 이후 양구의 그 작은 극장도
영영 문을 닫고 말았다.
양구를 떠난 그가 지금까지 일하고 있는 곳이 육림극장이다. 이 오래된 극장에는 관이 두개 있어서 1관, 2관, 두개의 스크린에서 두편씩
영화를 상영한다. 동시에 지어졌지만, 지금 이곳 두관의 영사기사 나이는 36년이나 차이가 난다. 1관에는 쉰일곱의 심상용씨가 있고, 2관에선
최석순이라는 이름의 스물한살짜리 젊은 청년이 영사기를 돌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최석순씨는 메가박스에도, 키노에도, 씨네큐브에도
가 있다는 아저씨의 많은 제자 중 한명이다. 이들은 꼭 부자지간 같다. 젊은 기사가 방금 영사기에 걸어놓은 필름은 높은 산을 오르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버티칼 리미트>. 2관 영사실에 있는 비디오로 ‘늙은 기사’가 자신이 나온 3년 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녹화테이프를
틀어주고 있는 동안, 스물한살의 ‘최 기사’는 폴더형 PCS를 열어 누군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나이 많은 극장, 1관과 2관의
너무나 다른 풍경. 아무도 꾸미지 않았지만, 세월과 사람살이의 얼개는 이처럼 춘천의 한 극장에 영화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에게도
저만할 때가 있었겠지. 이 청년도 그처럼 나이들어갈 테고. 상념에 잠기는 사이 의 리포터는 심상용씨의 집을 찾아, 그가 오랫동안
수집해 놓은 영화 포스터들을 보여준다.
늙은 기사의 작은 집,작은 꿈
좁은 영사실에서 보낸 40년 인생. 그의 남은 소망은 무엇일까. 모아놓은 자료를 쥐가 갉아먹는 걸 보면서, 심상용씨의 요즘 꿈은 바로 그
자료들을 전시해놓을 수 있는 ‘영화박물관’을 차리는 것이다. 옛날 멍석 깔고 영화 보던 시절 풍경부터 극장 풍경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볼
수 있는, 또 온갖 팸플릿, 포스터, 문화영화들을 볼 수 있는 그런 박물관. 강원대학교 옆에 있는 그의 ‘산 1번지’ 집을 찾았을 때,
그는 마치 그 박물관 모습을 미리 연출하기라도 하려는 듯, 옛날 16mm 영사기를 틀어 반공영화 <아! 잊으랴>를 보여주었다. 스크린은
방문에 압정으로 꽂은 <어둠 속의 댄서> 포스터 ‘뒷면’이었다. 흰 ‘빠닥종이’ 위에서 자그마한 탱크와 그보다 더 자그마한 군인들이 포화를
쏘아대며 오물거렸다. 영화를 보기 위해 직접 스크린을 달고, 방의 형광등을 끄고, 그리고 윙 돌아가는 영사기 소리에 가슴 설렘을 선사하는
그의 방은, 기꺼이 시네마천국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검은 개 한 마리가 지키고 있는 대문 옆 담벼락에는 <정무문>부터 <이태원 밤하늘엔
미국 달이 뜨는가> <탑건>까지 필름통들이 쌓여 있고, 돼지우리였다는 창고에는 수천장의 포스터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늙은 영사기사의 작은
집. “다 꺼내서 보여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 저게 정리하는 데만 2년이 걸린 거거든.” 보고 싶은,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함께 안타까워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작은 고집인 양 심상용씨는 한참 동안이나 영사기를 끄지 않았다.
저녁이 다가와, <아! 잊으랴>를 다 보지 못하고 기자 일행이 서울로 발길을 돌리려 하자, 그제야 그는 아쉬운 듯 가만히 영사기를 끄고는,
영사기 옆에서 찍은 스무살 적 빛바랜 사진 하나를 봉투에 담아 건네주었을 뿐이다. 그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엔 먼곳에서 날아온 노란 흙알갱이들이
마치 오래된 필름에서처럼 풍경에다 비를 긋고 있었다.
최수임 기자 sooee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