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배경, 어떤 과정을 거쳐 프로듀서로 입문, 어떤 작품에 참여했나.
국문과를 나온 나는 어느 날 카피라이터를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공채시험을 봐 화천공사에 들어갔다. 거기서 <구로아리랑> 카피라이터를 한 게 영화 일의 시작이었다. 1년간 기획실 일을 배웠는데, 영화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생소하고 어색하고 힘들었다. 관두고 사보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 글을 썼다. 그런데 영화 일은 마약과 같더라. 동아수출공사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영화 홍보 일을 시작했다. <천국의 계단> <원초적 본능> <늑대와 함께 춤을>…. 한국영화를 하고 싶었는데 외화가 훨씬 많았다. 3년 넘게 일하니 지겨웠다. 배급 일이 하고 싶어졌다. 다시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금을 타서 그 돈으로 일본에 갔다. 배급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대학에 창작쪽 과만 있더라. 3개월 만에 돌아와 1년간 프리랜서로 일했다. 기회는 그무렵 찾아왔다. 이춘연 대표가 강우석 프로덕션에 사람이 필요한데 가보라고 한 것이다. 거기서 <마누라 죽이기> <투캅스2> 등 하고팠던 한국영화 일을 하며 너무너무 즐거웠다. 밤새워가며 신나게 일했다. 강우석 프로덕션이 시네마서비스가 됐고, <홀리데이 인 서울> <투캅스3>를 했다. 그러다 뜻맞는 사람과 손잡고 제작자보다는 일반적 의미의 ‘프로듀서’ 일을 하고 싶었던 차에 김상진 감독과 ‘좋은 영화’를 차리며 독립했다. 첫 작품이 <주유소습격사건>이다.나는 영화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일반인’에서 출발한 사람이다. 영화는 하고 싶은데 영화를 공부하지도 않았고 인맥도 없고 그런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 아무 영화사나 문을 두들겨서 일단 일을 시작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지금 우리 회사에도 홈페이지에 계속 글을 올리던 서른이 넘은 신입사원이 다니고 있다.
프로듀서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 언젠가 이런 영화를 만들어봐야지 하고 떠올린 영화가 있다면.
관객이 외면하지 않는 영화. 감동을 주든 즐거움을 주든 6천원인가 7천원을 낸 것에 대해 실망하지 않는 영화. 촌스럽더라도 돈 아깝지 않은 재미난 영화다. 난 자꾸 코미디를 하게 됐는데, 사실은 미스터리를 좋아한다. 복선이 교묘하게 깔린 미스터리영화처럼 진짜 재미난 영화를 하고 싶다.
왜 프로듀서를 하는가? 어떤 재미? 어떤 의미.
사실 프로듀서란 게 피를 말리는 직업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 상대하는 일도 어렵고. 나는 내성적이고 철이 덜 나서 상처를 많이 받는다. 하지만, 영화에는 뭐랄까 꿈이 있다. 의 판타지, 어느 세대나 좋아하는 <인디아나 존스>, <델리카트슨>이 불어넣어주는 그 희망…. 그런 걸 내가 관객에게 줄 수 있다는 게 좋다. 자지러지게 웃게 만들고, 울고 싶은 이들은 펑펑 울리고, 아님 기가 막힌 아이디어로 눈 동그래지게 하는 그런 것 말이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 사건? 어떻게 헤쳐나갔나.
동아수출공사에 있을 때가 슬럼프였다. 일본에 갔다 온 게 큰힘이 됐다. 일본에서 <드라큐라>를 봤는데, 너무 좋았다. 나는 그런 처절한 멜로가 좋다. 연인들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그 모습이 참 아름답더라. 영화는 해야 되겠다고 새삼 생각했다. 영화는 이미 내 삶의 한 부분이었던 거라. 결혼한 여자에게 결혼이 삶의 한 부분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자연스럽게 말이다. 영화를 하기 전 난 좀 비관적인 사람이었다. 근데 80%가 나빠도 20% 좋은 것을 끄집어내 극대화하는 게 프로듀서의 일이다. <주유소습격사건>도 범죄영화에 폭력영화지만 새롭고, 이제껏 없던 캐릭터영화라는 걸 보았던 거다. 그런 영화 일을 하면서 나는 많이 밝아졌다. 영화 일과 함께 나는 내 인성이 좋아짐을 느낀다.
그간 경험에서 ‘이것만은 고치겠다’고 생각한 충무로 관행이 있다면.
너무 많다. 우선 감독들이 정신무장을 해야 한다. 영화 만드는 일에서는 감독이 가장 중요하다. 제작자는 터전을 만들어 줄 뿐이다. 일본에서는 디테일한 소품까지 다 롤콘티 안에 짜놓고 나서 촬영에 들어간다. 프리프로덕션, 프로덕션, 포스트프로덕션의 개념, ‘제작’ 개념이 감독들에게도 있어야 한다. 촬영횟수가 많다고 영화의 퀄리티가 높나? 2시간 영화면 만자 정도 필름이 드는데 20만자, 30만자 쓴다는 건 감독이 뭘 찍을지 모른다는 거다. 몇회 촬영 때 어떤 장면을 어떻게 찍겠다, 까지 다 나와 있어야 한다. 콘티는 그림이 아니다. 또 하나, 지방극장까지 박스오피스가 깨끗하게 오픈돼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 현실은 그렇게 되기에는 한도 끝도 없이 문제가 산적해 있다. 이 두 가지만 일단 써달라.
나의 스승, 나의 교범은.
강우석 감독이다. 강우석 감독은 흥행감독으로서 특별한 감각이 있다. 그건 쉽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는 편집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난 항상 “편집할 때 데려가주세요”, 하는데 그쪽에도 프로듀서가 있기 때문에 잘 안 데려가 주신다. 근데 꼭 가보고 싶다. 편집의 노하우를 배우고 싶다.
3세대 프로듀서들이 해야 할 일, 담당해야 할 몫은 무엇인가.
혜택을 고루 분배하는 일이다. 앞에 있는 우두머리만 혜택을 받는 건 싫다. 누구나 영화 하면 돈도 벌고 사회적인 명예도 누릴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무조건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만을 요구하는 건 얼마나 주먹구구식 발상인가. 동아리 모임도 아니고 말이다. 제대로 산업화가 되려면 환경이 먼저 조성돼야 한다. 경제적인 환경 말이다.
지금 준비중인 작품.
<선물>은 웃음과 울음을 다 가져갈 수 있는 정통 멜로다. 요즘 멜로가 많이 나온 끝이라 고민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그 영화들과 차별성이 있다. 세련되게 일상을 표현한다기보다는 촌스러우면서 감정을 폭발시키는 정공법 멜로인 것이다. 3월24일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2월7일 크랭크인 한 <신라의 달밤> 같은 경우는, 김상진 감독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상태다. 김혜수, 이성재, 차승원 등 캐스팅도 편안하고 무엇보다 인생이 담겨 있어 좋다. 모범생이 깡패가 되고 깡패가 선생님이 되는 삶의 아이러니 말이다. 그런 일들이 참 많지 않은가. 그것을 포착하는 영화다.
최수임 기자 sooee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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