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과 왕가위의 <화양연화>가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각광받은 것과 달리 올해
칸의 아시아영화는 폭넓은 호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개막 전 일본영화 9편이 경쟁부문 3편을 포함해 각 부문에 고르게 포진, 관심을 끌었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대신 동시대 아시아를 대표하는 감독들 가운데 올해 칸에서 주목받은 이들은 차이밍량, 허우샤오시엔, 모흐센 말흐말바프
등 3인이다. 이들의 영화를 하나로 묶는 키워드를 발견하긴 힘들지만 각자 개성이 뚜렷한 스타일은 그들의 다음 행보에 기대를 갖게 만든다.
현대인의 고독 - 차이밍량의 <거기 몇시니?>
차이밍량은 기복이 없는 감독이다. 이번에 내놓은 영화 <거기 몇시니?>(What Time Is It There?)는화면 속에 최소한의 요소만 채워놓고 외로움과 상실감에 빠지게 만드는 차이밍량 스타일을 여실히 보여준다. 등장인물들도 변함없다. 감독은 이번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1992년 내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당신은 내 첫 영화를 보지 못하셨다. 1997년
<구멍>의 첫 촬영을 하기 전날 이강생의 아버지가 오랜 지병에 고통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음해 영화제를 위해 비행기를 탔을
때 이강생이 잠든 표정을 봤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멜랑콜리가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는가? 이 영화는 2000년
12월6일 타이베이에서 촬영에 들어가 2001년 2월7일 파리에서 촬영을 마쳤다.” <거기 몇시니?>는 차이밍량이 자신의 아버지와
이강생의 아버지를 그리며 만든 영화다. 그러나 정작 영화에서 아버지가 등장하는 장면은 첫신과 엔딩, 딱 두번. 첫 장면에서 아버지는 홀로 만두를
먹다 아들이 자는 방을 흘끗 쳐다보더니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운다. 마지막 장면, 죽은 아버지가 파리에 나타난다. 아들인 이강생과 만난 적
있는 여자가 홀로 프랑스여행을 하다 지쳐 잠든 사이 아버지는 호수에 떠내려가는 여자의 가방을 들어 그녀 옆에 놓아두고 멀리 사라진다. 이 두
장면 사이를 채우는 것이 이강생과 그의 어머니와 파리로 떠난 여자이다. 어머니는 죽은 남편이 그리워 베개를 허벅지 사이에 끼고 자위를 하고,
이강생은 파리로 떠난 여자를 생각하며 눈에 띄는 시계마다 전부 파리시간에 맞추는 이상한 행동을 하며, 파리여행을 하는 여자는 낯선 분위기에
지쳐 몸과 마음이 아프다. 상영시간 내내 지독히도 쓸쓸한 세 사람을 관찰하는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나와 이강생의 아버지를 그리며’라는
자막을 읽는 순간 비로소 눈물이 쏟아지는 영화다. ‘현대인의 고독’이라는 주제에서 차이밍량은 독보적 경지에 이른 예술가이다.
움직이는 카메라의 파격 - 허우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
차이밍량이 비교적 고른 호평을 받은 반면 허우샤오시엔의 신작은 많은 사람을 당황케 했다. 움직임이 없는 카메라, 일정한 거리를유지하는 시선, 오래 한자리에 머무르는 태도 등은 그간 허우샤오시엔 영화의 형식미를 대변하는 특징들이었다. 그러나 <밀레니엄 맘보>(Millenium
Mambo)에서 그는 카메라를 움직인다. 움직일 뿐 아니라 들고찍기도 하고 클로즈업도 사용한다. 이런 형식적 파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기자회견장에서도 질문은 이같은 변화에 집중됐다. 허우샤오시엔은 이렇게 말했다. “주변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겪는 생로병사의 사이클과
리듬이 우리 세대보다 몇배 빠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특히 젊은 여성의 경우 딱 들어맞는다. 꽃처럼 그들은 피자마자 시들어버린다.” 서기가
맡은 <밀레니엄 맘보>의 주인공 비키는 그런 여자다. 그녀에겐 젊은 남자친구가 있다. 남자는 비키에게 집착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비키는 은행에 있는 돈을 다 쓸 때까지만 연애를 계속하겠다고 결심하고 나이가 지긋하고 이해심 넓은 또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한다.
발랄해야 마땅한 젊은 여자의 연애담이지만 <밀레니엄 맘보>는 엔딩에 이르기 전까지 좀처럼 환한 바깥세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왕가위
영화가 아닐까 싶을 만큼 화사한 색조가 어우러진 실내풍경이 비쳐지지만 <밀레니엄 맘보>는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유지하며 혼란스럽던
젊은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다. 그리고 2000년 직전의 상황이 배경인 이야기는 마지막 순간 2010년에 회고하는 과거사임이 밝혀진다. 허우샤오시엔은
<밀레니엄 맘보>가 <상하이의 꽃>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지만 전문가가 아니라면 그 변화의 방향을 뒤쫓기 쉽지 않다. 80년대
자전적 요소가 배어 있는 영화들과 달리 90년대 허우샤오시엔이 걸어온 길은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어왔다. <밀레니엄 맘보>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상상보다 끔찍한 현실 -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간다하르>
이란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간다하르>(Kandahar)는 10대 중반부터 정치활동을 했던 감독의 이력을 새삼 돌아보게 했다. 형식은로드무비이지만 아프가니스탄 국경 근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지뢰로 죽어가는 충격적인 현장을 다큐멘터리처럼 엮어냈다. 직접화법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않았음에도 주제는 선명했고, 전개를 예측하기 곤란한 픽션으로서의 재미나 낯선 이국 풍경을 재치있게 잡아냈다. 국내 개봉했던,
동화 같은 판타지영화 <가베>와는 딴판이다. 내전중에 탈출해 캐나다에서 새 삶을 시작한 아프가니스탄의 저널리스트 나파스는 절망스런
편지 한통을 받는다. 거기에는 다가오는 개기일식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여동생의 소식이 담겼다. 나파스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예전에 탈출했던
길로 다시 들어갈 결심을 한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의 국경지역에 위치한 피난민 캠프를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영화는 그 길에서 시작되고, 나파스의
눈을 통해 드러나는 고통의 현장들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 된다.
마흐말바프 감독은 작품의 모티브를 현실에서 찾았다. 자기 딸과 동갑내기인 12살의 아프가니스탄 소녀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던
것이다. 그는 최소한으로 제작진을 꾸려 간다하르에 들어가 밤낮으로 사막을 휘젖고 다녔고, 그동안 버려진 동물처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야 했다. 애초 마흐말바프의 친구들과 동료들은 이 영화의 기획을 우려했다. 납치와 테러의 위협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흐말바프는 “영화의
주제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휴머니즘”이라며 제작을 강행했다. 실제로 촬영을 막 끝냈을 때 제작진은 일단의 무장세력과 마주쳤다. 마흐말바프는
다행히 아프가니스탄 옷을 입고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터라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 나란히 배치된 한 장면이 웅변적이다. 하늘 저 멀리 낙하산을 타고 뭔가가 흔들흔들 내려온다. 언뜻 보면 사람 하반신 모양의
마네킹이다. 지뢰로 다리를 잃은 수많은 피난민들에게 의족이 되어줄 일종의 구호품이다. 낙하산이 땅에 닿을 무렵, 다리를 절룩대는 수많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새로운 다리를 먼저 차지하려 경쟁적으로 달려든다.
칸=글 남동철 기자· 이성욱 기자|한겨레 문화부·사진 손홍주 기자
·통역 이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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