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피치&캐치를 통해 옥랑문화상을 지원받아 생애 두 번째 영화(<간지들의 하루>)를 만들었고 덕분에 영화를 계속 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작품 피칭을 앞두고 축사를 위해 연단에 선 이숙경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이 객석에서 다가올 순서를 기다리는 신인감독들과 눈을 맞췄다. 운영을 담당한 김영 프로듀서는 2022년 수상작 <콘크리트 녹색섬>이 올해 영화제에 월드프리미어로 상영된 사실을 짚으며 “피칭작이 제작되어 연어처럼 영화제로 되돌아오는” 보람을 전했다. 8월27일 피칭 본심 현장에 낭보도 날아왔다. 지난해 피치&캐치상 수상 후 제작에 박차를 가했던 백승빈 감독의 <아이 엠 러브>가 29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경쟁작으로 발표된 것이다. 영화제 예산 축소, 후원사 재편 등의 변화 속에서 예년과 달리 극영화, 다큐멘터리 부문을 합해 시상하게 됐지만, 어려워진 영화제 살림살이에 대한 아쉬움을 덮을 만큼 기운찬 감독들의 음성이 장내를 채웠다. 총 88편의 참가작 중 피칭 무대에 오른 작품은 7편. 작품당 피칭 시간은 7분으로 극영화의 경우 시나리오와 작품 기획서, 다큐멘터리의 경우 러프컷 편집본과 기획서를 심사위원이 미리 검토한 상황에서 본심이 진행됐다. 심사위원은 김일란 감독과 정재은 감독, 장선영 영화사 진진 부장, 정상민 아우라픽쳐스 대표, 최재원 앤솔로지 스튜디오 대표가 함께했다.
지금, 청년의 자리를 묻다
올해 본선에 오른 작품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경향이 보인다. 전반적으로는 동시대 청년들의 사회적·심리적 위치에 대한 문제의식이 두드러진다. 우선 저임금 예술인, 고시생 등이 직업 및 생계 불안에 지쳐 도시를 떠나는 서사가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 고루 발견됐다. <고양이 배꼽> <워킹홀리데이 인 라보스타> <파인딩 페루자> 모두 성공 강박과 정상성의 궤도를 이탈해 인생의 돌파구를 찾는 2030 세대의 모습을 그린다. 가족 돌봄으로 발 묶인 ‘영케어러’가 어머니의 고향으로 향하는 <현관 앞의 아이> 역시 로드무비 구조를 취한다. 기후 재난으로 완전히 고립된 군상을 그리는 <여름잠>은 사뭇 대조적이다.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이자 고발자, 젊은 성노동자와 퀴어의 안위에 관심을 기울였다. <용주골>과 <착지연습> 모두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투쟁을 넘어 일상의 지속 가능성을 들여다본다.
여성의 시선으로 꿈꾸는 한국영화의 미래는
<현관 앞의 아이> 강지승 감독을 바라보는 심사위원들.
피칭 후 비즈매칭을 통해 현장에서 제작, 배급사와 미팅을 나누고 돌아간 창작자들 모두에게 아직은 긴 레이스가 남아 있다. <워킹홀리데이 인 라보스타>의 이재은, 임지선 감독은 “기한 없이 작업하는 지친 날이 이어질 때 피치&캐치가 달릴 수 있는 목표가 돼주었다. 지원 당시만 해도 분량과 완성도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는데, 멘토 피드백을 통해 몇달이 걸릴 작업을 꽤 단시간에 해내서 앞으로 헤쳐나갈 용기를 얻었다”는 소감을 전했다. 이례적으로 출연자와 함께 무대에 올랐던 <착지연습>의 마민지 감독에겐 “문단 내 해시태그 운동, 미투운동 이후 트라우마로 힘들어 한 탁수정 작가와 피칭에 함께 참여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느낀” 기회이기도 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피치&캐치는 여성영화의 창의적인 시선을 독려하는 핵심 플랫폼으로 성장해왔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 이수연 감독의 <해빙>, 한준희 감독의 <차이나타운>, 임선애 감독의 <69세>, 손원평 감독의 <침입자> 등이 관객과 만날 수 있도록 지원했고, <반짝이는 박수소리>(감독 이길보라), <이태원>(감독 강유가람), <버블 패밀리>(감독 마민지), <피의 연대기>(감독 김보람), <장기자랑>(감독 이소현) 등 주요 다큐멘터리 작품들의 산실로도 기능했다. 여성 영화인이 주도하는 참신한 극장용 콘텐츠의 제작 활성화를 목표로 2010년 12회 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인 뒤 15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피칭의 열망은 제작 현실화로 이어지고 있다. <갈매기>를 연출한 김미조 감독의 가족 로드무비 <경주기행>이 2022년 피치&캐치 수상 후 현재 촬영을 완료했고, 지난해 수상작인 <생명의 은인>(감독 방미리)은 후반작업 중, <매드 댄스 오피스>(감독 조현진)는 촬영 중이다. 기획·개발 피칭 프로그램인 피치&캐치에 성평등 단편영화 제작지원 프로그램 ‘필름×젠더’가 결합한 올해를 시작으로, 앞으로는 박남옥상까지 더해 3개 부문을 결합한 ‘창작지원 허브 프로그램’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신작 투자 중단, 영화제 예산 삭감 등 제작 일선의 기온은 냉랭하지만, 현시점에서 서울 지역 최대 규모로 기록된 피치&캐치 사업의 의의는 작은 영화들을 적소에 안착시킨다는 데 있다. 피치&캐치 객석에 자리한 창작자, 관계자, 관객들은 잠시 한 방향을 바라보면서 같은 꿈을 꾼다. 다양성, 독창성, 그리고 인권 감수성의 기준을 높이는 영화들이 제때 극장에 도착해주기를. 여성의 목소리가 한국영화에 대범한 성공과 실패의 흔적을 더 자주 새기기를.
다큐멘터리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 폐쇄 결정을 둘러싸고 “창녀, 퀴어, 빨갱이” 등으로 낙인찍힌 이들이 하나로 뒤섞여 연대하는 과정을 담았다. 연대자들이 성노동자의 목소리를 립싱크하고, 성노동자들은 연대자의 얼굴을 빌려서 함께 메시지를 전달한다. “지금이 아니면 안되는 이야기를 가감 없이 담아보겠다”(홍지연)고 전한 <용주골>의 두 감독이 영화사 진진이 후원하는 시우프(SIWFF)상을 수상했다.
<착지연습> 마민지 감독
<버블 패밀리>의 마민지 감독이 미투운동 이후 성폭력과 맞서 싸웠던 피해 여성들의 일상 복귀 과정을 따라간다. 2016년부터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백해온 탁수정 미투 활동가가 직접 작가로 참여해 미투운동 이후의 일상생활에 대해 들려준다. 이날 마민지 감독과 무대에 선 탁 작가는 “싸우고 난 여자에게도 괜찮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파인딩 페루자> 김예영 감독
에티오피아 사막 소녀와 한국 골방 창작자의 10년간의 우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우울증과 ADHD로 긴 여행을 떠났던 애니메이션 작가, 김예영 감독이 직접 출연한다. 조혼 위기에 처한 16살 소녀 페루자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한국 영화제에 참석하며, 에티오피아 내전에서 생존해 다시 나타나기까지 긴 시간을 엮었다. 감독이 그린 애니메이션 푸티지가 시선을 끈다.
극영화
<현관 앞의 아이> 강지승 감독
어머니를 간병하는 과정에서 “삶이 멈춘 듯했던”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강지승 감독이 써내려 간 로드무비. 모계 가족사의 비밀을 좇는 구조로 혈연, 돌봄, 여성의 사회적 굴레 등에 대해 질문한다. 낯선 이모와 조우한 주인공이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가면서 겪는 내적 성장을 그린다. 부산영상위원회의 제작지원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워킹홀리데이 인 라보스타> 이재은, 임지선 감독
<성적표의 김민영>으로 주목받은 이재은, 임지선 감독이 신작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연이은 공무원 시험 실패로 낙담한 32살 백수 주인공이 낯선 마을에서 잉어빵 트럭을 운영하게 되는 이야기로, 전작에서 보여준 장점을 확장한 기획으로 보인다. 다채로운 캐릭터와 통통 튀는 감수성, 유머, 엉뚱하지만 따뜻한 시선이 버무려졌다. CGV상 수상작.
<고양이 배꼽> 안선유 감독
10년차 고양이 집사인 안선유 감독의 첫 장편이다. AI 시대, 도무지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무명 그림작가 주인공이 시골로 떠나 어린 시절의 자신과 만난다. 있는 듯하지만 끝내 보이지 않는 고양이 배꼽처럼 꿈을 좇다 지친 청년을 주인공 삼아 자아실현의 과장된 의미를 지적한다.
<여름잠> 송예찬 감독
기후 재난으로 인해 사회문제가 극대화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삼는다. 인류가 겨울잠처럼 여름잠을 자기 시작한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여름잠에 든 인류에 걸맞은 상품을 운용하는 보험회사 팀장 캐릭터 등 장르적인 아이디어가 두드러지는 극영화로, 동시대 기후 불안을 미래적 관점에서 재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