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창작 과정에서 특정 작품을 염두에 두지 않았더라도, 소재나 큰 틀의 유사성 만으로 ‘한국판 OOO’, ‘해외판 OOO’라는 별명으로 불린 영화들이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어떤 영화로부터 다른 영화의 기억을 불러내고 있다면, 적극적으로 비교 감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되지 않을까. 한국 버전의 해외 영화, 해외 버전의 한국 영화로 불렸던 네 가지 사례를 모았다.
봉준호 <기생충>
클로드 샤브롤 <의식>
한국 영화 100주년의 해에 유의미한 선물을 남긴 <기생충>. 영화를 향한 찬사와 질문이 쏟아지고, 봉준호 감독은 레퍼런스로 삼은 몇 편의 영화를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여러 매체가 주목한 작품은 한국의 고전기 감독 김기영의 후기 영화 <하녀> <충녀> <육식동물>이다. 과연 계단의 시네마를 열어젖힌 김기영의 후예답게 <기생충>의 계단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간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비해 덜 말해지고 있으면서, 본 사람이라면 분명히 떠올리지 않기가 힘든 영화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이 있다는 점. 실제로 봉준호 감독은 황금종려상 수상 소감에서 앙리 조르주와 클로드 샤브롤이라는 두 프랑스 영화감독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특히 한 상류층 가정에 가정부로 취업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과 봉준호의 <기생충>은 자본주의가 낳은 계급 우화의 뼈대를 공유한 한줄기 영화다. 하물며 계단은 <의식>에도 나온다. 가정부 소피(상드린 보네르)는 계단 위쪽의 작은방에 살고, 방 안엔 조그만 텔레비전 하나가 있다. 친절한 상류층 가족은 앞과 뒤가 다른 위선을 보여주며, 고상한 취미를 향유하지만 그들의 지리멸렬한 진짜 삶은 다를 바가 없다. <기생충>의 전복적인 서사와 통하는 사건 역시 <의식>의 백미다.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소피가 우체국 직원 잔느(이자벨 위페르)와 벌이는 참극은, 끝내 웃음 아닌 찝찝한 허무의 정서를 남긴 <기생충>과 일맥상통한다.신동석 <살아남은 아이>
다르덴 형제 <아들>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 상실감을 견딜 수 없던 부부는 아들 은찬이 구했다는 친구 기현(성유빈)에 어쩐지 마음이 기운다. 인테리어 가게를 운영하는 성철(최무성)은 오갈 데 없는 기현을 데려와 도배 일, 장판 일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첫 출근 지각도 모자라 휴대폰 게임까지, 성실함이라곤 보이지 않던 사춘기 아이 기현은 내키지 않는 듯 천천히 일을 배워 간다. 이쯤 되면 유사한 줄거리를 가진 다르덴 형제의 영화 <아들>이 떠오르기 마련. 사실 성철과 미숙(김여진) 부부에게 기현이라는 존재는 달가울 리 없다. 그는 아들이 죽게 된 이유이자 아들의 부재를 거듭 상기시키는 존재기 때문이다. <아들>에도 비슷하게 난감한 상황이 등장한다. 프랜시스(모간 마린느)에게 목수 일을 가르치는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는 프랜시스가 죽인 아이의 아버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올리비에는 프랜시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았고, 기현은 성철 부부를 처음부터 은찬의 가족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살아남은 아이>는 후반부 기현의 폭로로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게 되면서 갈등의 양상이 복잡해진다. 디테일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그럼에도 아들 죽음과 관련된 아이와의 아슬아슬한 동거,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의 스타일 등 두 작품은 꽤나 닮아 있다. 두 영화가 집요하게 좇는 물음이 쉽게 답할 수 없는 윤리와 관련한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데이빗 핀처 <조디악>
봉준호 <살인의 추억>
할리우드판 <살인의 추억>이라 불리는 영화가 있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추리극 <조디악>이다. 두 영화는 끝내 범인이 잡히지 않았던 실제 미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물론 최근 <살인의 추억>의 실제 사건인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 이춘재의 검거로 온 국민이 다시 한번 충격에 빠졌지만 말이다. <조디악>은 미국의 연쇄살인마 조디악 킬러를 추적하는 경찰들의 수사가 거듭 미끄러지는 순간들을 빚는다. 심지어 끝내 매듭지어지지 못한 채 미궁에 빠진 허무와 공포감을 주시한 결말은 두 영화가 상당히 비슷하다는 인상에 이르게 만든다.
<조디악>보다 4년 먼저 만들어진 <살인의 추억>을 데이빗 핀처가 참고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대신 <살인의 추억>은 과학 수사가 미흡하게 이뤄지던 당시, 진범 검거보다는 사건의 마무리에 급급했던 경찰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중심이라는 점이 다르다. 상업성과 완성도 면에서 모두 빼어난 <살인의 추억>이 시종 담담한 서술을 하는 핀처의 <조디악>에 비해 많은 유머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차이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출한 두 감독의 명실상부한 대표작인 <살인의 추억>과 <조디악>. 밀도 있는 연기와 연출에 대한 찬사가 여전하다는 사실에서 두 영화는 한 쌍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콜린 트레보로우 <안전은 보장할 수 없음>
장준환 <지구를 지켜라!>
<안전은 보장할 수 없음>은 2014년에 국내 개봉을 했다. 집계된 관객 수는 단 42명.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고 코웃음을 친다면 손해다. 이 영화가 컬트 팬들의 꾸준한 지지 아래 있는 <지구를 지켜라!>를 닮았단 사실을 접한다면 구미가 당길지도 모르겠다. 외계인 음모론자인 괴짜 병구(신하균)가 과도한 집착 증세로 벌이는 일련의 태도들은 꾸준히 관객에게 실소의 빌미를 제공했다. 그런데 이 '터무니없음'으로 차곡차곡 쌓아온 영화의 결은 엄청난 전복을 거치곤 위대한 '진정성'을 획득한다. 팬들이 매료된 <지구를 지켜라!>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것일 테다. 보잘것없는 것을 한순간에 대단한 무엇으로 만들어 버리는 대담한 상상.바로 그 매력이 콜린 트레보로우 감독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음>에도 있다. 시작은 이렇다. 시간 여행을 함께 떠날 파트너를 구하는 엉뚱한 신문 광고. 이 광고를 낸 자를 취재하기 위해 떠난 수습기자 다리우스(오브리 플라자)는 광고의 주인공인 괴짜 케니스(마크 듀플라스)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명분을 숨기고 케니스와 친분을 쌓는 다리우스는 진지한 목표를 경청하면서 점차 인간적인 신뢰를 갖게 된다. 게다가 늘 누군가에게 미행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엉뚱한 남자에게서는 어쩐지 병구의 향기가 강하게 풍긴다. <지구를 지켜라!>와 유사하다고 말한 것부터가 강력 스포일러가 될지 모르겠으나, 세상의 무수한 괴짜들을 위로하는 영화의 천성만큼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