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오버> 시리즈, 19금 코미디의 대가
토드 필립스를 19금 코미디의 대가로 만든 <행오버> 시리즈. 결혼을 앞두고 벌인 총각파티 폭음의 여파로, 기억을 잃고 깨어난 친구들이 사라진 예비 신랑을 찾아 헤매는 이야기다. 1편인 <더 행오버>는 한국에서 정식 개봉한 적은 없지만 2009년 북미 박스오피스 총 6위를 차지할 정도의 대박 흥행을 낳았고, 한국에서도 꽤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며 유명해졌다. <행오버 2>, <행오버 3>로 이어지는 세 편의 시리즈 모두 토드 필립스가 연출했다. 전작 <로드 트립>, <올드 스쿨> 등을 통해 보여준 코미디의 재능이 십분 발휘된 <행오버>는 할리우드식 막장 코미디의 대표적인 영화로 남았다. 주연을 맡은 브래들리 쿠퍼, 에드 헬름스, 자흐 갈리피아나키스 세 배우의 인지도 역시 단숨에 상승. 대체 불가능의 조연 캐릭터 '미스터 초우'를 연기한 한국계 배우 켄 정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문제작 <보랏>으로 아카데미 문턱
토드 필립스의 이력 가운데, 영화 <보랏 -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이하 <보랏>)의 스토리 작가로 참여한 점이 눈에 띈다. <보랏>은 배우 사샤 바론 코헨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끼친 코미디 영화이자, 평단의 호불호를 가져온 문제작이었다.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띈 영화는, 카자흐스탄의 엘리트 기자 보랏(사샤 바론 코헨)의 원맨쇼 로드무비다. 사샤는 이 영화에서 카자흐스탄 청년의 영어 발음을 구사하며 낯선 미국 문화와 전근대적인 관념들의 충돌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인종차별, 반유대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몰이해와 쾌락주의 등 무지의 끝을 보여주는 캐릭터 보랏을 통한다. <보랏>은 미국인들이 200년 넘게 '특별한' 위치로 자부해온 자국의 긍지를 해체하려는 통찰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스탄이라는 국가에 대한 편협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다는 논란 아래 있기도. 공동 스토리 작가로 참여한 토드 필립스는 <보랏>으로 아카데미에서 각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됐다.
<조커>가 뜬금없다고?
DC의 야심찬 프로젝트 <조커>의 연출자로 토드 필립스가 발탁되고, <행오버>를 기억하는 이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행오버>는 분명 타율이 높은 코미디 영화지만 <조커>의 감독으로는 다소 뜬금없게 느껴질 법하다. 알려졌다시피 우려를 딛고 공개된 <조커>는 조커의 기원을 가장 어두운 방식으로 그렸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 지점에서 다시 사람들은 놀라고 있다. 하지만 토드 필립스의 필모그래피의 첫 줄을 보면 이해할지도 모른다. 그가 맨 처음으로 만든 영화 <헤이티드>는 역대 가장 논쟁적인 로커라 해도 좋을 GG 알린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GG 알린은 공연 중에 옷 벗기는 예사, 자해를 하거나 관중과 멱살 잡이를 하는 등의 기행을 일삼으며 공격적인 하드코어 펑크를 하던 가수. 첫 영화의 주인공으로 유별난 그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토드 필립스와 <조커>의 연결고리를 엿볼 수도 있겠다.
NYU 중퇴
토드 필립스는 뉴욕 영화학교에 진학했지만 졸업은 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 학교에 도착했을 때, 시나리오를 쓰는 데 혈안이 된 모두를 보고 다른 생각을 했다. “나는 그때 고작 18살이었다. 시나리오는 상당 부분 삶에서 끌어와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점의 나는 영화를 쓸 만큼의 충분한 인생 경험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후 필립스는 타인의 삶을 관찰한 영화 <헤이티드>를 만들었고, 영화 홍보를 하기 위해 학교를 중퇴했다.
선댄스 키드
토드 필립스는 세계 최고의 독립영화제라 불리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먼저 두각을 드러냈다. 1998년 연출한 두 번째 장편 <프랫 하우스>로 다큐멘터리 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프랫 하우스>는 남자 대학생의 사교 클럽 일상에 제대로 몸 담아 낯선 세계를 모험한다. 사회에 발을 딛기 직전의 대학생들은 이곳에서 심리 조작, 폭력, 여성 혐오에 물들어 가고, 다시 그들의 침묵이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프랫 하우스>는 당시 영화가 개척하지 않았던 지점의 민낯을 보여주며, 모든 면에서 강력하고 충격적인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맷 월쉬를 찾아라
그의 영화에 작은 역할이지만 꼭 등장하는 배우가 있다. 코미디언 겸 영화배우인 맷 월쉬. 국내 관객들에겐 낯선 이름일 수 있으나 많은 영화에서 조, 단역으로 비춘 그의 얼굴이 낯익을 수 있다. 미국 드라마 <부통령이 필요해>에 출연해 왔으며, 토드 필립스의 영화 <로드 트립>, <올드 스쿨>, <스타스키와 허치>, <스쿨 포 스카운드럴>, <더 행오버>, <듀 데이트>에 출연했다.
마틴 스코시즈
변방의 아웃사이더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걸작을 만들어온 마틴 스코시즈 감독. 이 거장을 향한 토드 필립스의 경외가 남다르다. <조커>의 레퍼런스로 가장 많은 언급을 받는 영화 두 편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와 <코미디의 왕>이다. 두 영화는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의 뒤틀린 존재 증명이 불러일으킨 불온한 사건들을 담고 있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조커'의 정체성이 이 인물들과 비슷한 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의 다른 코미디 영화 속에도 마틴 스코시즈의 영화를 오마주한 장면이 종종 등장했다.
<성난 황소>(위)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아래)
<조커> 11편의 레퍼런스
<조커>의 레퍼런스로 대두된 <택시 드라이버>와 <코미디의 왕> 이외에 참고가 된 여러 편의 영화가 더 있다. 토드 필립스의 인터뷰를 통해 밝혀진 영화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마틴 스코시즈의 <비열한 거리> <성난 황소>, 밀로스 포먼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월터 힐의 <워리어>, 시드니 루멧의 <뜨거운 오후> <네트워크> <도시의 제왕>, 파울 레니의 <웃는 남자>,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카메오 출연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 출연을 즐기는 감독들이 있다. 토드 필립스도 그중 하나다. 그의 첫 장편 극영화 <로드 트립>에서 풋 러버(Foot Lover)로, <올드 스쿨>에서 갱 뱅 가이(Gang Bang Guy)로, <행오버>의 1편과 2편에서는 미스터 크리피(Mr. Creepy), <듀 데이트>에서는 배리 역할로 깜짝 출연해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19금 코미디의 대가답게 예사롭지 않은 배역들이다.
희극은 반응이다 (feat. 에드 헬름스)
토드 필립스의 코미디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말. 희극은 행동(Action)이 아닌 반응(Reaction)에서 온다는 것. 그는 배우 에드 헬름스를 향해 '리액션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는 “술에서 깨어나 얼굴에 새긴 문신을 발견할 때나, 이가 빠져버린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에드보다 더 좋은 리액션을 보여주는 사람은 없다. <행오버> 시리즈의 숨은 영웅은 에드 헬름스”라고 말했다.
줄리엣 루이스
토드 필립스는 “여성 캐릭터들의 코미디를 만들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마 남성 캐릭터들이 주축이 된 <행오버> 시리즈로 인기를 끌게 되면서 나온 문답의 일부로 보인다. 이때 그는 “꼭 여성판 <행오버>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면서 한 배우를 지목했다. “만약 기회가 온다면 주인공은 줄리엣 루이스에게 맡길 것이다. 내 생각에 그는 가장 웃긴 여자 배우다. 물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줄리엣 루이스는 토드 필립스의 다수 영화에 출연해왔다. <올드 스쿨>, <스타스키와 허치>에서 신스틸러로 활약했고, <듀 데이트>에서 대마초를 파는 약사 헤이디 역을 맡아 주인공을 연기했다.
DC에 블랙 유니버스 제안
조커는 토드 필립스가 어린 시절부터 가장 좋아한 캐릭터였다. 혼돈을 가져오는 캐릭터로서의 조커, 파괴적인 에너지를 가진 조커를 사랑했던 그는, 자신의 영화 <워 독> 시사회에서 워너브러더스의 사람들에게 제안했다. “훌륭한 감독들을 섭외해서 예술성을 가진 DC 블랙 유니버스를 만들자”고 말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것만이 DC가 마블과 차별성을 둘 수 있는 방법이었고, 천문학적인 비용이 투여되는 CG의 굴레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지금의 <조커>를 탄생시킨 토드 필립스의 상상대로 블랙 유니버스의 명맥이 이어진다면, DC가 현재 영화 판도를 바꿀 키를 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