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빛나게 하는 건, 무엇보다 안성기(54)와 박중훈(40)이라는 두 배우이다. 영화 속 최곤과 민수처럼, 둘은 20년을 선후배이자 친구로 일주일에 세번 이상씩 만나며 배우 생활을 함께 나눴다. 또 최곤처럼 안성기는 80년대 초중반, 박중훈은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남자 배우 1인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 뒤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안성기는 주연을 고집하길 포기하고 ‘남우조연상’을 기꺼이 받는 길로 나가는 동안, 박중훈은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찰리의 진실>)에도 출연했고 충무로에서 주연을 지키고 있지만 흥행작이 나온 지 오래 됐다. 그런 두 배우의 모습이 몇 차례 영화 속 인물과 겹쳐 보이면서 영화는 자연스럽게 관객 곁으로 내려와 앉는다.
지난 7일 시사회의 무대 인사에서 박중훈이 “저나 안성기 선배나 오랫동안 누워 있었거든요”라고 하자 안성기가 “나는 그래도 서 있었어”라고 우스개를 했다. 하루 뒤인 8일 <한겨레>와 만났을 때, 박중훈은 “저는 가운데에 누워 있었고, 형님은 주변에서 서 계셨다”고 ‘정리’했다. 그런데 놀라운 건, 88년 <칠수와 만수>부터 시작해 <투캅스>(93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99년)까지 둘이 함께 출연한 영화들은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뒀다. 둘이 함께 출연한 네번째 영화 <라디오 스타>도 각종 매체의 반응이 뜨겁다. ‘주변에 서 있던’ 안성기가 가운데로 들어오고 ‘가운데 누워 있던’ 박중훈은 일어서게 되는 영화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고목나무에 꽃 피워야죠?”
안성기=<라디오 스타>는 나나 중훈이나 직전 출연작과 너무 붙어 있었어. <강적>과 <한반도> 모두 나온 게 최근이잖아. 그래서 우려스럽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둘이 함께 나오니까 관객들이 관점을 달리 해서 봐주는 것 같아. 7년전 안성기와 박중훈이 함께 나왔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가서 ‘어, 둘이 오랜만에 하네’하는 식으로. 우리가 너무 가까워서 그런 이미지가 이 영화에는 맞을까 우려도 했는데 좋게 봐주는 것 같고. 둘의 화학반응이 크긴 큰가봐.
박중훈=처음 시놉시스에는 가수만 등장하고 매니저는 없었죠. 안 선배 없이 회의를 하면서 여기에 매니저를 두자는 얘기가 나왔고, 그 비중이 처음엔 단역이다가 조연 정도로 가자, 그러다가 누가 좋겠냐, 내가 안 선배가 어떻겠냐 제의를 했고 다들 좋겠다 그랬죠. 그러면서 둘의 이야기로 가자, 이렇게 됐고 그 과정에서 내가 제작자도 아닌데 안 선배에게 뒤띔을 해 드렸지.
안=바로 좋다고 했어. 내가 워낙에 버디 무비를 좋아해. 거기에 이야기 구조도 아주 재미나게 돼 있고. 중훈씨와 같이 작품 한다는 게 굉장히 즐거울 것 같고. 무엇보다 우리한테 너무 맞을 거다 싶은 게, 20년을 같이 생활한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또 최곤처럼 바닥까지 치진 않았지만 둘 다 번쩍 하는 시기를 거쳤던 데 대한 감성을 갖고 있고.
박=(자리를 옮겨 앉으며)그런데 이 자리 조명이 너무 세다.
안=이 사람이 이런 게 많아요. 영화 속에서 최곤이 “난 허리가 안 좋아서 아무 침대에서나 자면 안 되는데” 하잖아.(웃음) 최곤이 ‘헉, 헉’ 하면서 침 뱉는 것도 중훈이 생활이고. 그 외에도 우리 실제 모습에서 나온 에피소드가 많아요. 최곤이 사람 패서 경찰서 가서 조사받을 때 민수가 옆에서 ‘제가 때린 걸로 믿고 싶습니다’ 그러잖아. ‘믿고 싶다’는 게 실제는 중훈이 말투이고.
박=실제로 제가 과거에 사고를 쳐서 조사 받을 때 ‘제가 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습니다’라고 한 적이 있거든요.(웃음)
안=아들이 이 영화 편집본을 보고는 평소 아버지 모습이 제일 많이 나온 영화라고 하더라고. 나도 평소의 말투와 표현 방식이 많이 들어갔거든. 영화에선 최곤이 말수가 적고 민수가 계속 설레발을 떠니까 둘이 바뀐 것 아니냐고 하던데 실제론 나도 설레발이 많거든. 중훈이도 실제론 생각에 빠져 시무룩하게 있는 시간이 많고.
20년 동고동락 주인공들 우리와 비슷
박=영화에서 최곤이 가수왕 된 88년엔 제가 청춘 스타였거든요. 최곤처럼 아이들이 나를 쫓아다니고. 또 최곤이 성격이 까칠하잖아. 그때 나도 그랬거든. 성격도 뭘 잘 못 참는데다 청춘스타가 일종의 권력자니까 참을 필요도 못 느낀 거고. 지금은 반성 많이 하죠. 영화 속 최곤도 계속 성질 내지만 회한이 많을 거야. 그런 내면의 일치가 있어요. <황산벌> 이후로 내 히트작이 없는 것도 그렇고.
안=누워 있었지.(웃음)
박=형님은 누운 적은 없고 비틀거렸다고만 하는데 심하게 누워 계셨지. 아니 서 계셨는데 주변부에 서 계셨지.(웃음) 난 누울지라도 주변부는 싫다, 그랬던 거고. 영화가 인간을 얘기하는 거지만, 제가 영화를 통해 배우기도 하거든요. 이 영화 찍으면서 스스로에게 보내는 반성이 많았어요. 안 선배와 이준익 감독과 작품 얘기보다 사는 얘기를 더 많이 했던 것 같고. 그래도 아직 변치 않는 건 훌륭한 배우의 꿈이죠. 저는 방법론에서 할리우드에서도 성공하는 꿈이 강해지면 강해졌지 약해지진 않았어요.
안=거기선 실제 나이를 크게 안 따지고, 또 넌 젊어 보여서 20대도 연기할 수 있으니까 가능해. 난 주름 때문에 그런가. 내 나이대로 보더라고.
박=형님은 어리게 보기 힘든 게 아무리 모르는 척해도 눈빛이 세상을 알고 있는 눈빛이니까.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걸로 계속 가려고.(웃음)
청춘스타때 급한 성격 반성하죠
안=그동안 중훈이와 함께 출연한 영화가 세편인데 모두 잘 됐고, 그게 5년 단위로 나왔거든. 그런데 이 영화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후 7년만이야. 그 사이에 5년이 됐는데 왜 작품 하자는 사람이 없냐, 그런 말도 했고. 2년이 더 지나서 임자가 찾아왔지. 그래서 둘이 앞으로는 5년마다 하지 말고 10년에 두편 하자, 그러니까 이번엔 3년 안에 하나 하자 그러고 있어.
박=<투캅스> 후속편을 다시 해본다고 하면, 지금 경찰서장이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으니까 곧바로 찍어도 형님 나이가 경찰서장을 넘는데 몇년 뒤면 경찰청장 나이 아냐?(웃음)
“일어나 함께 걸어가야지”
안=그럼 숀 코넬리가 액션 연기 하냐?(웃음)
박=배우의 연기력이 느는 건 어느 단계에서 끝인 것 같아요. 그 뒤부턴 배우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안 선배가 이번에 한 연기는, 연기가 일정 수준에 오른 어떤 배우도 할 수 있는 난이도의 연기지만, 어느 배우도 그런 느낌을 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미 프로가 된 운동 선수들에게 중요한 게 동계훈련이라고 치면, 배우에게 동계훈련은 촬영 없을 때의 삶이거든요. 거기서 안 선배에게 많이 배웠고. <라디오 스타>가 잘 된다면 아! 결국 지금 연배에, 50대 중반에 다시 꽃을, 고목나무에 활짝 벚꽃을 피우시다니.
안=아직 젊은 나이지.(웃음)
박=이 영화가 잘 된다면 형님은 최전방 미드필드 하다가 수비수 하다가, 다시 스트라이커 역할을 하는 거죠. 저는 계속 스트라이커를 하는데 골이 안 들어가니까 공격형 미드필더 정도로 자리매김하고픈 생각이 있죠. 스트라이컨데 골 못 넣을 때는 부담이 엄청 나거든요.
안=난 약간 비껴있는 것도 좋아하고 그게 또 재밌어. 계속 가운데 있으면 삶이 힘들잖아. 가운데에 누워있다는 게 계속 리딩 액터로 가면서 버틴다는 말인데, 어서 일어나서 기력 찾아서 약간 빠져나와 같이 걸어가면 좋지 않겠니?
박=포지션을 바꿀 필요가 있어. 의도적으로 바꾸는 건 무리지만. 그런데 내가 많이 컸다. 대 안성기 선배를 두고 누워 계시다고 말하질 않나.
안=내가 많이 죽은 건가.(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