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개막 4일째인 10월10일부터 부산국제영화제는 한층 더 두터워진다. 극장과 해변에서 거장의 영화와 세계적인 스타들이 관객들과 만날 때, 다른 한 쪽에서는 부산프로모션플랜 (Pusan Promotion Plan, 이하 PPP)을 통해 신작 프로젝트를 들고 부산을 찾은 감독들과 제작·투자자들이 머리를 맞대기 때문이다. 아시아필름마켓 기간에 열리는 PPP는 지난 15년간 아시아 신작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대표적인 행사로 자리매김해 부산국제영화제의 또 다른 축이 됐다. PPP가 영화산업 종사자와 기자에게만 관심이 허락된 자리는 아닐 것이다. 신인감독과 유명 감독의 프로젝트들이 골고루 소개되는 이 행사는 영화팬들에게도 세계영화의 지형도를 미리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다.
차이밍량의 신작 <소년의 일기>
올해 PPP는 접수된 약 150편의 프로젝트 가운데 총 27편을 선정했다. 30편을 선정한 지난해에 비해 3편이 줄었다. 영화제 측은 선정작품이 많으면 관계자들의 관심에서 소외되는 작품이 있기 때문에 편수를 조정했다고 밝혔다. 먼저 가장 눈에 띄는 프로젝트는 차이밍량과 오기가미 나오코, 옥사이드 팡의 신작이다. 차이밍량의 11번째 작품이 될 <소년의 일기>는 고급 아파트를 홍보하는 ‘인간 광고판’ 남자가 주인공이다. 아내는 도망갔고, 남자와 아이들은 도심에서 살 곳이 없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쇼핑몰이나 백화점에서 시간을 보내고, 남자는 여름날의 도심에서 8시간씩 서서 일을 한다. 그의 몸에 달린 광고판에는 ‘베네치안 로맨스’, ‘파리의 센 강변’ 같은 이름을 가진 아파트가 새겨져 있다. 차이밍량은 “현실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인간을 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오랜 동지인 리캉셍이 주인공을 맡을 예정이다.
<카모메 식당>과 <안경>으로 알려진 오기가미 나오코는 일본 만화를 좋아하는 프랑스의 두 소녀가 대륙을 횡단해서 일본에 가겠다고 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버섯 수박>을 선보인다. 프랑스, 벨기에, 독일, 폴란드를 지나는 동안 도시의 별난 사람들과 마주치며 일어나는 갖가지 소동을 담을 이 영화는 2006년에 있었던 실화가 소재다. 오기가미 나오코는 “청소년기를 지나며 모두가 한번은 느끼는 좌절감, 그 충족되지 못한 열정을 표현하기 위해, 별난 옷을 입은 프랑스 소녀들의 달콤쌉싸름한 로드무비를 선택했다”고 연출의 변을 밝혔다.
옥사이드 팡은 미스테리 공포영화인 <사이코 브라더스>을 내놓았다. 살인사건을 조사하던 범죄전문기자가 의문의 영상메시지를 받게 되면서 사건의 이면에 말려드는 내용이다. 홍콩과 한국의 합작으로 진행될 <사이코 브라더스>는 아마도 PPP 선정 프로젝트 가운데 최초일 3D영화다. “입체 이미지가 관객의 깊이 감각에 대한 환상을 극대화시키는 동시에 평범한 공포영화에 부차적인 매력을 더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팡은 설명한다. 이외에도 <향혼녀>로 제43회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몽골 이야기>로 1995년 몬트올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시에페이감독이 신작 <붉은 석탄>을, 캄보디아의 거장인 리티 판이 베트남 전쟁 당시 캄보디아에 낙오된 미국 흑인 군인의 이야기인 <사육>을 소개할 예정이다.
이재용 감독 <폴링 인 러브>
한국감독의 신작들도 흥미롭다. 이재용 감독은 <폴링 인 러브>(가제)를 통해 재벌가에 시집간 여인의 위험한 사랑이야기를 그릴 계획이다. <정사>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등 상류층 사회의 욕망과 갈등을 그렸던 전작의 결이 이어질 듯 보인다. 판타지 액션영화인 <전우치>를 연출했던 최동훈 감독은 신작 <도둑들>을 통해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와 같은 범죄영화로 돌아온다. 한국과 중국의 9명의 도둑들이 세계 최고의 보석을 훔치기 위해 싱가폴 카지노에 모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유하 감독의 신작 <질풍>(가제)은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여형사의 이야기이며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김경형 감독은 <소말리아>를 통해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된 어민들의 탈출기를 그릴 예정이다. <주홍글씨>의 변혁 감독은 파리를 무대로 한 여성의 성장기를 담은 <블루 베이비>를 준비했다.
2010년은 전세계 영화제에서 PPP의 성과가 뚜렷하게 나타난 해였다. 칸영화제에서는 2008년 PPP 프로젝트 선정작 <모래성>(부준펑)과 2007년 PPP 프로젝트 선정작 <비, 두려워 마>(판당디)가 비평가 주간에 초청됐고 <모래성>과 함께 2008년 PPP 선정작에 오른 대만의 <피노이 선데이>(호위딩)는 제12회 타이페이영화제에서 뉴탤런트경쟁 부문에서 특별 언급을 수상했다. 이밖에도 2010년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수상작인 <허니>(세미 카플라노글루 감독)와 넷팩상 수상작인 <타이페이의 하룻밤>(아빈 첸) 또한 PPP 선정작이었다. 이런 성과들은 PPP에 선정된 신인감독의 프로젝트 또한 눈여겨 봐야하는 충분한 이유다. 올해 PPP에는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펀드(이하 ACF) 후반작업지원을 통해 완성된 영화 <우주의 역사>로 올해 로테르담영화제 타이거상을 받은 태국의 여성 감독 아노차 스위차콘퐁과 선댄스와 베를린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았던 <바빌론의 아들>의 모하메드 알-다라지 감독, 비스바덴과 파리 등 다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한 그루지야의 신인 감독 게오르게 오바슈빌리, 데뷔작으로 마라케시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은 말레이시아 감독 샬롯 림레이쿤등 떠오르는 신성으로 기대할 만한 감독들이 부산을 찾을 예정이다.
올해 PPP의 특징 중 하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제작지원 프로그램인 ACF(Asian Cinema Fund)와 더욱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는 점이다. ACF는 장편독립영화 인큐베이팅펀드, 장편독립영화 후반작업지원펀드, 다큐멘터리 제작지원 AND 펀드등 3개의 프로그램을 통해 아시아의 재능있는 신인 감독을 발굴,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올해 ACF 인큐베이팅펀드에 선정된 아시아 프로젝트 가운데 3편이 PPP 선정작 목록에 올랐다. 방글라데시의 모스타파 사와르 파루키, 우즈베키스탄의 욜킨 튀치에프, 말레이시아의 샬롯 림레이쿤이 올해 ACF와 PPP에 동시에 선정된 주인공이다. 아시안필름마켓의 남동철 실장은 "부산영화제가 아시아의 신인감독을 발굴하는 역할이 큰 만큼, 인큐베이팅펀드를 통해 기획개발만을 지원하는 게 아니라, 완성이 되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ACF 선정작을 PPP에 포험시켰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올해부터 PPP에 선정된 감독들의 전작을 미리 볼 수 있게 마련된 온라인 스크리닝은 제작, 투자, 배급 관계자들에게 편리한 시스템이다. 말하자면, 올해 PPP의 모토는 ’더욱 밀접한 만남’과 ’실질적인 제작’일 것이다. PPP는 또 다른 진화를 준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