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시나리오의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눈에 띄는 현상은 80년대 후반부터 확연해지는 세대간의 단절이다. 60년대의 작가들 중 70년대까지 활동한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반면 80년대의 작가들 중 90년대 이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이다. 그 원인에 대한 본격적인 규명은 훗날의 영화사가들에게 맡겨야겠지만 추측건대 아마도 80년대 후반부터 정착되기 시작한 젊은 기획자들 중심의 프로듀서시스템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젊은 기획자들이 한국 영화제작의 중심에 서게 된 90년대 이후에는 80년대 이전 작가들에게 작품활동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90년대 이후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감독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일단 시나리오를 쓰는 능력만 검증받으면 너나없이 모두 감독 겸업 선언을 하고 나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하나의 트렌드처럼 굳어가고 있는 현상이다. 이 역시 복잡다단한 요인들이 결합돼 나타난 현상인데 그 결과 전업적인 시나리오작가들의 영역은 대폭 축소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90년대 이후에는 80년대 이전처럼 다작(多作)을 하는 작가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선배세대의 작가들과는 절연되고, 제작편수는 줄어들고, 감독들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니, 웬만한 열정과 재능만으로는 작가로서 살아남기 힘든 곳이 바로 충무로다. 박계옥은 그런 격동의 90년대 중반에 데뷔하여 30살이 되기 전에 무려 8편의 작품들을 극장에 올린 전형적인 신세대 작가다.
박계옥이 영화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동국대 국문과 재학 시절 학내 영화동아리 ‘디딤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부터이다. 대학 졸업 이후 그는 영상작가전문교육원에 다니면서 쓴 습작시나리오를 가지고 영화사들을 순방하다가 당시 기획시대의 프로듀서로 일하던 차승재를 만나 충무로와 인연을 맺게 된다. 박계옥이 <너무 많이 본 사내 이야기>로 삼성영상사업단 캐치원 개국기념 시나리오공모에 입선한 것은 이미 차승재와 함께 <깡패수업>의 시나리오를 발전시키고 있던 중이었다. 기획시대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영화사인 우노필름을 차린 차승재는 창립작품인 <돈을 갖고 튀어라>의 시나리오작업에도 박계옥을 참여시킨다. 이 두 작품이 모두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코믹액션에 강한 신세대 작가로 자신의 존재를 충무로에 알리면서 현재 싸이더스라는 대기업으로 성장한 우노필름의 개국공신이 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런 이미지가 그리 탐탁지 않은 눈치다. “코믹터치가 있다고 해서 모두 코미디로 분류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저는 코미디보다는 휴먼드라마에 가까운 작품을 써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한순간의 오해로 운명이 뒤바뀐 건달과 의사의 이야기인 <스카이닥터>나 판사인 아버지와 변호사인 아들의 이야기인 <박대박>을 보면 그의 항변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포장은 코미디이지만 내용은 캐릭터드라마인 것이다. 고등학교의 문제아들과 음악교사를 다룬 <짱>이나 죽어가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교감을 다룬 <남자이야기>를 보면 상업영화의 컨벤션 안에서도 따뜻함과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왕성한 창작력의 젊은 작가는 지난해 차태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SBS 미니시리즈 <쥴리엣의 남자>를 발표함으로써 방송사쪽으로도 그 활동영역을 넓혔다. 아무래도 영화보다는 자체 검열의 수위가 높은 것이 공중파 방송이고 보니 나름대로 마음고생도 심했던 모양이지만 그런대로 높은 시청률을 확보해 성공적인 데뷔였다는 것이 중평이다. 대표작을 꼽아달라고 하니 박계옥은 지레 손을 훼훼 내저으며 난색을 표한다. “저는 이제 30대 초반이 되었고 아직도 신인작가일 뿐입니다. 그동안의 작품들이 흡족치 못했던 것도 에누리 없는 사실이고요. 언젠가 자신있게 대표작을 꼽을 수 있을 때까지 쓰고 또 써야죠.”
▣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95년 김상진의 <돈을 갖고 튀어라> ⓥ
96년 김상진의 <깡패수업> ⓥ
97년 전찬호의 <스카이닥터> ⓥ
양영철의 <박대박> ⓥ
양윤호의 <미스터 콘돔> ⓥ
98년 김상진의 <투캅스3> ⓥ
양윤호의 <짱> ⓥ
심승보의 <남자이야기> ⓥ
2000년 장문일의 <행복한 장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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