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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새로운 전환기를 맞다
2007-10-05

이상용 한국영화프로그래머의 추천작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중견 감독들의 영화는 임권택의 <천년학>, 이명세의 <M>, 김기덕의 <숨>, 재일교포 감독 최양일의 <> 등이다. 남도의 판소리와 운명적인 로맨스가 교차하는 <천년학>은 국민영화로 불리었던 <서편제>를 반복한다. <M>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후 추격전을 구현하는 세 번째 시도이다. <숨>은 김기덕 특유의 밀폐된 공간에서 사계절 퍼포먼스(말 그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다.)를 벌인다. 한국에서 제작한 최양일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 <>는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표방해 온 그의 하드고어 영화다.

중견 감독의‘차이와 반복, 젊은 감독의 장르적 변주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중견 감독들은 자신이 이룩해 놓은 영토를 다시금 확인한다. 임권택은 임권택이고, 이명세는 이명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로서의 반복’이다. 이명세의 <M>은 추격전의 구조를 고스란히 취하고 있지만 이번에 벌이는 추격전은 주인공 한민우의 기억 속에서 홀로(혹은 유령과) 벌이고 있는 사투다. 자신의 스타일을 반복하는 중견 감독들은 매너리즘에 빠진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매너리즘이 감내해야 하는 상황은 정반대이다. 2000년대 이후 급속도로 성장한 한국영화의 산업과 자본의 위력 아래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세상과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반복되는 스타일의 변화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고 싶은 열망을 전해준다. 상징적인 예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천년학>의 CG 화면일 것이다. <서편제>의 경우 무수한 헌팅을 통해 사라져 가는 장소를 붙잡아 내었다면, <천년학>은 이미 사라진 것을 CG를 통해 되살려 낸다. 옛 풍경은 사라졌지만 영화의 테크놀로지를 통해 영화의 마지막에서 강은 다시 흐르고, 학이 난다. 그것은 임권택의 비전이자 새로운 영화 테크놀로지를 통해 복원되는 이미지의 세계이다.

젊은 감독들은 영화 장르의 영토 위에 새로운 시도를 접목한다. 멜로, 조폭 장르는 정윤철(<좋지 아니한가>), 한재림(<우아한 세계>)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풍성해 진다. 이제 장르는 <극락도 살인사건>처럼 한국영화 시장에서 제대로 선보이지 않았던 스릴러 장르를 구현하고자 하거나, 기존에 친숙해진 장르를 새롭게 구성하는 방식으로 양분되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성공 이후 한국 영화의 새로운 흐름은 장르를 새롭게 비틀어 가는 방식을 선호한다.

물론 이러한 흐름에서 비켜서 있는 다수의 영화가 있다. 장률의 <경계>, 김동현의 <처음 만난 사람들>은 경계인의 시선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탈북자가 이주 노동자와 만나게 되는 <처음 만난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보수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몽골의 초원에서 탈북자 순희와 몽골 사내의 만남 역시 중심을 벗어난 자들의 조우인 것이다. 이들은 “사소한 것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선 정치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로빈 우드의 말을 실천한다. 하지만 한국의 문화 전반에 있어서 이러한 목소리는 점점 소수의 목소리가 되어 가고 있다.

산업화의 격랑을 헤쳐가는 주변인의 시선

오늘날 새로운 감성의 감독들이 공유하는 것은 사소함에 대한 집착이며, 사소함 속에 침윤되어 있는 가치의 발견이다. 이승영의 <여기보다 어딘가에>, 박준범의 <도다리>는 세상과 불화하는 젊음을 진솔하게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간 영화가 양해훈의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다. 결말부에서 마술처럼 사라지는 주인공의 모습은 비록 도피를 선택하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마술처럼(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싶은 감독의 고민을 보여준다. 세상과 결별해야 한다면 치기어린 젊음은 어떻게 안녕을 고할 수 있을까. 이 고민은 안슬기의 <나의 노래는>나 윤성호의 <은하해방전선>에서도 던져지는 질문이다. 사소함에 집착할수록 영화는 삶을 벗어날 수가 없다. 삶의 응시야말로 오늘날 영화의 책무가 되어 간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은 소설가 헨리 제임스가 <비극의 뮤즈> 서문에서 “삶과 삶이 있다.”고 말한 것처럼, 삶과 삶 사이에 놓여 있는 예술(영화)의 자리다. 때로는 예술과 예술 사이의 자리(김병우의 <Written>)를 고민하면서, 한국영화는 산업화의 격랑 이후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상용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