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프로그램을 보면서 ‘마음이 설렌다’는 말처럼 진부한 표현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주 영화제의 시네마스케이프 섹션에 단편을 출품한 감독들의 이름을 되새기면 마음이 설렌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할말이 없다. 현존하는 가장 고령의 감독인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데뷔작인 <두오로 강의 노동자들>이나 브라질과 페루의 유망주인 <키메라>와 <황금니>같은 에릭 로샤 (그는 브라질 시네노보의 아버지인 글라우버 로샤의 아들이다)와 다니엘 로드리게즈의 단편도 있다. 특히 가이 매딘과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이름을 지나 루마니아의 거장인 루시안 핀틸리에의 2006년도 단편(<배중률: 중간 배척의 원리>)을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마음이 설레인다’를 넘어서 ‘심장이 들뛰는’ 단계에 이른다. 이들을 어찌 다 소화시킬 것인가. 이들을 어찌 다 놓칠 수 있을 것인가.
가이 매딘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늘 무의식으로 점점 침몰하는 유령의 배를 탄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꿈과 판타지와 기억의 검은 집을 짓고 사는 악동 감독의 손에서 창조되는 네오 리얼리즘의 거장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 이자벨라 롯셀리니가 직접 각본을 쓰고 모든 주연 인물을 연기하는 <내 아버지는 100살>에서, 이자벨라는 자신의 아버지를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해마에 비유하며 거대한 복부를 떠올린다. 시종일관 그로테스크한 ‘빅 팻 벨리(Big Fat Belly)’로 나타나는 로셀리니의 복부에 대항하여 데이비드 셀즈닉, 알프레드 히치콕, 페데리코 펠리니와 찰리 채플린의 환영이 나타나 영화에 대한 격한 토론을 벌인다.
쟁쟁한 영화사의 주역들을 영매해주는 가이 매딘의 흑백 화면은 로베르토 롯셀리니의 <무방비 도시> 조차 무의식의 방에서 튀어나오는 한 조각의 침전물처럼 낯설고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뒤틀리고 이그러졌지만 여전히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하는 10대 아들의 고백과 같은 것. <내 아버지는 100살>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져 있기 보다는 유머와 환타지로 화답하는 가이 매딘의 네오 리얼리즘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태국의 감독들이 쓰나미 참사를 기리기 위해 뭉쳤다. 그런데 이 와중에 참으로 아핏차퐁, 그 만이 튄다. ‘망고 따. 카카오 따. 밥 먹어. 몸 씻어. 화장실 닦아. 집 만들어.’ 아이들의 목소리에 맞춰 한 남자가 분주하게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닌다. 흡사 아이들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는 듯 보이는 이 남자는? (사실은 유령이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친애하는 당신>이나 <열대병>의 서정미학이 아닌 이미지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관계를 비틀고 무성영화의 슬랩스틱적인 속도 감각으로 쓰나미의 참사를 기린다. 대참사를 코미디의 속도 감각으로 변주하는 감독의 시선은 귀여움을 지나 어찌보면 불경스럽게 보이지만, 그곳에는 오고가는 밀물과 썰물의 원리처럼 대참사가 밀려 와도 다시 삶을 챙겨가는 태국의 현재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해야 하는 인간의 숙명이 함께 충만하다. 그러니 고이 잠드소서, 아시아의 유령이여. 그리고 아핏차퐁의 장난기도 함께.
위 두 감독에 비하면 루시안 핀틸리에는 단연코 정도를 택한다. 제목도 어려운 ‘배중률’이란다. 형식논리학의 용어로서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고, 다른 하나가 거짓이면 다른 하나는 참이어야 하는 논리. 중간이나 제 삼자는 인정되지 않는 논리법칙. 2차대전의 막바지 러시아 평원에서 독일군 장성이 루마니아 군대를 시찰한다. 독일군 장성과 그의 수행 장교를 위해 차려진 식사 자리에서 독일군 장교는 들소 머리가 새겨진 우표를 핀셋으로 집어 우표의 역사와 가치에 대해 한껏 늘어 놓는다. 세상에서 단 두개 밖에 없는 우표. 불어를 쓰고 자신이 귀족의 혈통임을 자랑하는 장교앞에서 그러나 아뿔싸, 우표는 사라지고 만다. 자신들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 루마니아 장군은 병사들에게 옷을 벗을 것을 명령하지만 오직 오직 한 군인만이 옷을 벗지 않겠다고 버틴다. 손안에 든 새가 죽을 것 같냐 살 것 같느냐를 시험당하는 예수처럼 그는 옷을 벗지 않으면 우표 도둑이 되고, 옷을 벗으면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이율배반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며 모두 공산주의에 투항했지만 혼자서 프랑스와 미국에서 망명을 하면서 활동했던 감독 루시안 핀틸리에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은 왜일까? 냉정하면서도 단아한 화면짜기, 면도날같은 편집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 시종일관 헛간이라는 단 한 공간에서 펼쳐지면서도 끝까지 흥미진진함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영화는 거장의 영화 만들기가 무엇인지 한눈에 보여준다.
결론. 좀 호들갑스럽게 말한다면, 나는 요번 전주 영화제에서 루시안 핀틸리에의 작품 하나만 건져도 좋을 만큼 시네마스케이프 섹션이 좋았다. 영화 역사이든 자국의 역사이든 끊임없이 과거와 교감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이들 거장들의 재치와 재능과 재주는 시간의 부피를 뛰어 넘어 빛을 발한다. 그러니 또 진부하게 이렇게 말할 수 밖에. 놓치면 후회하시리라. 시네마스케이프 섹션. 놓치면 안된다. 거장들의 단편 모듬 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