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식을 이틀 남겨둔 해질 무렵, 허문영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는 인터뷰하는 시간을 틈타 라면과 공기밥으로 거른 점심을 대신했다. 그처럼 바쁘게 지내고 있는 허 프로그래머는 “신작이 눈에 띄게 많아졌고, 중견감독의 노작과 독립장편의 성과, 화제를 모은 한국영화가 두루 섞여있다”는 총평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올해 부산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갖는 한국영화는 10편. 그중에서도 신연식 감독의 디지털 장편영화 <좋은 배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수작이었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감독인데다가 175분에 달하는 대작이어서(웃음) 빨리감기로 돌려보려고 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5분이 지나니까 딴생각 안하고 끝까지 보게되더라.” 이밖에도 <여자, 정혜>로 작년 부산영화제의 스타가 되었던 이윤기 감독의 신작 <러브 토크>, 오석근 감독이 <백한번째 프로포즈> 이후 12년만에 만든 <연애>, “올해 독립영화 최고의 성과”라고 단언하는 <용서받지 못한 자>, “사적이고 주관적인 대부분의 ‘새로운 물결’ 부문 영화들과 달리 장르적인 유희정신이 충만한” <썬데이 서울> 등이 올해 부산에서 첫선을 보인다. 허 프로그래머는 “전통적인 작가주의 못지 않게 한국적인 장르영화의 다양성에도 중점을 두었다”고 개봉작과 신작이 섞인 한국영화의 선정기준을 밝혔다.
말이 유독 느린 허 프로그래머는 이만희 회고전에 관한 설명으로 접어들면서 나름대로 속도를 한껏 높였다. 작년에 이미 상영이 결정되었던 이만희 회고전은 북한과 미국, 유럽까지 접촉했던 <만추> 프린트 수색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어도, <물레방아> <04:00-1950>이라는 잊혀진 걸작을 발견하는 성과를 올렸다. “<물레방아>는 사운드가 20분 정도 손상되어있어 연구자들도 눈여겨보지 않은 영화였다. 이번에 보았더니 당대 문예영화의 관습과 패턴을 완전히 뛰어넘는 혁신적인 영화였다. <04:00-1950>은 이만희가 반공전쟁영화를 통해 어떻게 실존주의적인 운명론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거기에 영상자료원에서 이만희 감독의 매우 사적인 영화 <휴일> 프린트가 발견되는 행운도 따라주었다. 허 프로그래머는 “부산에 왔다면 이만희의 영화 10편을 꼭 보고 떠나기를” 진지하게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