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정보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31-10-06
- 사망1975-04-13
- 성별남
소개
이만희 감독은 1931년 10월 6일 서울의 하왕십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연극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연극계에서 활동하다가 1956년 안종화 감독의 조수로 일하게 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한다. 안종화 감독에 이어 박구, 김명제 감독에게서 연출 수업을 받던 그는 임원직 감독의 <인력거>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면서 이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배우 김승호의 추천을 받아 1961년 <주마등>으로 감독 데뷔를 하게 된다. 그는 영화계 주변 동료들로부터 연출 능력은 인정받았지만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던 감독이었다. 그러나, 1962년에 <다이알 112를 돌려라>를 발표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얻기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가져온 또 다른 행운은 촬영감독 서정민과의 만남이었다. 박력 넘치며 깔끔한 연출력을 인정받았던 이만희 감독은 서정민 촬영감독을 만나면서 정교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자신만의 영상 세계를 펼치는데 성공하며 전성시대를 열어간다.
두 사람의 전성시대는 1963년 <돌아오지 않는 해병>으로 포문을 연다. 당시 최대 규모의 제작비를 들인 이 영화는 전쟁 영화로는 최초로 20만 관객 동원 기록을 세우며 세상을 놀라게 한다. 이만희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당시 감독으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연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의 기쁨도 잠시, 이만희 감독은 <7인의 여포로>로 영화 감독으로는 최초로 ‘반공법위반’이라는 죄목으로 구속되기에 이른다. 1964년 말에 필름압수와 구속영장 신청으로 시작한 <7인의 여포로>의 법적 공방은 다음 해에 구속되었던 그가 집행유예로 풀려나면서 막을 내린다. 그리고 영화는 <돌아온 여군>으로 개명되어 개봉되지만 흥행에는 실패하고 만다. 반공영화를 만들고도 반공법위반이라는 시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만희 감독은 고집스럽게 다시 전쟁영화와 ‘반공영화’로 되돌아간다. 1966년 <군번없는 용사>와 1967년 <싸리골의 신화>는 이러한 그의 고집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힘든 시련을 겪고 난 1966년, 이만희는 생애 최고의 해를 창조해낸다. 주변사람들에게 "정말 다양한 영화들을 다 해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그는 보란듯이 다양한 장르를 누빈다.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잊을 수 없는 여인>과 나도향의 원작을 영화화한 문예영화 <물레방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전쟁영화 <군번없는 용사>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만추>가 모두 이 해에 탄생했다. 그의 기세는 1967년까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다양하면서도 완성도를 잃지않는 탁월한 연출력을 과시라도 하듯 자그마치 11편의 영화를 쏟아놓았다. <만추>의 뒤를 잇는 또 하나의 대표작 <귀로>와 <방콕의 하리마오>와 같은 대중적인 작품을 섞어놓으며 이만희 전성시대임을 다시 한번 증명한 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계에 한파가 불어닥치기 시작한 60년대 말, 이만희 역시 이 어두운 그림자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매해 꾸준히 서너편의 영화를 만들던 그는 1969년 홀연히 영화계를 떠나 버린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쇠사슬을 끊어라>로 돌아온다. 만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액션영화 <쇠사슬을 끊어라>는 영화에 대해 변화된 그의 태도를 반영하듯 보다 더 유희적이며, 냉소적인 유머감각을 선보인다. 다시 영화계로 돌아온 이만희는 영화만들기에 집요하게 매달리지만 그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다. 결국 1975년 4월 3일 <삼포가는 길>의 편집실에서 쓰러진 그는 열흘간 병마와 싸우다 4월 13일 45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