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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한국영화 결산 [3] - 올해의 한국영화 베스트 5

1위는 <박하사탕>

80년 광주, 20년 만의 귀환

1. <박하사탕>

“내게 최고라는 느낌을 준 영화는 <박하사탕>뿐이었다. 사탕을 깨물수록 입안엔 피가 흥건히 고였다. 그 쓰라림 덕분에 홍등가의 불을 지피던 80년대 한국영화의 부끄러움을 잊을 수 있었다.”(박평식) 1월1일 개봉, 새 밀레니엄의 시작을 알린 <박하사탕>은 상징적이게도 덧나고 흉져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20년 전 광주의 상흔을 직시하는 영화였다.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절규로 시작된 과거로의 여행은 한국사회를 만들어온 흉측한 집단무의식의 정체를 고발한다. 타락한 도시에 관한 누아르 <초록물고기>로 데뷔한 이창동 감독은 두 번째 영화에서 아픔이 잉태된 근원으로 망설임 없이 다가섰고, 80년대의 자식 세대가 짊어질 부채감을 상기시켰다. 이런 시도가 처음은 아니지만 <박하사탕>처럼 우아하고 섬세한 표현이 등장한 건 전례에 없다. “문학과 영화와 역사, 이 세변의 꼭지점이 이뤄내는 팽팽한 긴장감”(정지연)은 <박하사탕>의 성과를 압축하는 표현이다. 장선우, 박광수로 시작된 80년대 리얼리즘의 유산은 이창동의 영화에서 새로운 세기에도 면면히 이어질 에너지를 발견한 셈이다. 스타급 배우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이 영화는 서울관객 30만명을 넘기며 장기흥행하는 이변을 낳았고 첫 주연을 맡은 설경구의 신들린 듯한 연기는 널리 호평받았다. 올해 칸영화제 감독주간 초청작.

2. <오! 수정>

“처녀막 지상주의. 어쩌면 의도와 우연 사이의 불순한 연애담. 가변차선 속 기억의 틀로 만든 성의 정치학. 지금 여기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가장 적확하게 헤집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홍상수의 냉소.”(심영섭) 홍상수 영화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한꺼풀 한꺼풀 벗겨간다. 벗은 모습이 우스꽝스럽거나 불쾌해도 어쩔 수 없다. 견고하게 우리 일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형편없는 기억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순간에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 수정>에서 홍상수 감독은 그 같은 믿음을 같은 장면의 반복을 통해 보여준다. 세 남녀가 축을 이루는 연애담은 ‘어쩌면 우연’과 ‘어쩌면 의도’라는 대조를 통해 발가벗겨진다.

순간의 만족에 대한 자연스런 끌림, 사소한 것에 쏟아붓는 적절치 못한 정열, 거짓에 얼굴 붉히지 않는 뻔뻔스러움, 처녀막에 대한 집착 같은 터무니없는 고정관념 등 홍상수의 세계는 이성이나 감정의 질서를 형체도 남지 않을 만큼 흐트려놓는다. 모래알 같은 소소한 사건들을 피가 흐르는 유기체로 변모시키는 과정에서 배우들도 베일을 벗는다. 정보석, 문성근, 이은주 등 <오! 수정>의 배우들은 기존 이미지와 전혀 다른 얼굴을 내비치는 것이다. <오! 수정>은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받아 널리 호평받았다.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 샤를르 테송은 “판도라 상자를 열어보는 것처럼 반복된 장면을 통해 인간의 복합성과 의식의 복합성이 영화라는 매체에 묻어나온다”고 평했다.

3. <반칙왕>

“유치하지도 억지스럽지도 않으면서 인간적 연민이 내어나온다. 한국 코미디의 전환점.”(심영섭) 송강호와 김지운 감독의 찰떡궁합은 <반칙왕>에서 절창이다. 우울한 소시민의 삶에 따뜻한 숨결과 환한 희망을 선사하는 <반칙왕>은 현실을 이기는 유머를 보여준 ‘울트라파워봉봉’ 코미디다. 김지운 감독의 익살은 부조리한 세상을 직시하는 데서 나오지만 그는 홍상수 감독과 달리 판타지의 힘을 적극 수용한다. 평범한 회사원이 반칙 레슬러로 각광받는다는 설정부터 비현실적이지만 조명이나 카메라의 움직임도 유쾌한 꿈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데뷔작 <조용한 가족>에서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가는 사건을 그린 김지운 감독은 <반칙왕>을 캐릭터 코미디로 만들었다.

송강호가 연기한 임대호는 눈물을 보이지 않지만 동정심과 애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남자다. 큰맘 먹고 한 사랑고백에 “술 드셨어요?”라는 차가운 반응을 얻자 그 길로 광화문 큰 길을 내달리는 그의 가면에 슬픔이 배어 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반칙왕>은 코미디가 현실도피가 아니라 ‘절망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영화다. <반칙왕>이 서울에서만 81만명 넘는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이 된 것도 남루한 현실을 잊게 해서가 아니라 불안한 소시민을 위로해준 탓일 것이다.

4.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제작비의 액수가 영화적 체험의 강도와 결코 비례하지 않음을 제대로 보여준 이 영화는 올 한국영화의 최고 ‘사건’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홍성남) 류승완 감독의 이 재기발랄한 데뷔작은 21세기형 독립영화의 모범사례로 주목받았지만 작품의 완성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4개의 단편이 릴레이로 이어지는 구조를 갖고 있다. 1부의 주연이 2부의 조연이 되고 2부의 조연이 3부의 주연이 되는 식. 각기 독립된 이야기가 4부까지 연결되면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 완성된다.

사소한 자존심 싸움이 발단이 돼서 감옥에 가고 깡패가 되고 복수를 하는 전체 이야기는 홍콩누아르에서 익숙한 메뉴지만 류승완 감독은 같은 이야기를 달리 전달하는 방법을 안다. 사실적인 액션과 액션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다큐멘터리 같은 생동감, 현실에서 막 건져올린 팔딱팔딱 뛰는 듯한 대사와 유머는 이 젊은 감독에게 큰 기대를 걸게 한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출연배우들은 대부분 낯선 얼굴이지만 카메라 앞에서 대단히 자연스럽다. 호평 속에 개봉한 이 영화에는 관객의 지지도 이어져 16mm장편영화로 장기흥행한 뒤 35mm로 블로업한 프린트로 확대개봉되기도 했다.

5. <공동경비구역 JSA>

“폐쇄회로에 갇힌 한국영화 스펙트럼의 확대.”(유지나) 2000년 최고의 흥행작 <공동경비구역 JSA>는 여러 면에서 <쉬리>와 비교되는 영화다. 아직 상영중이라 결과를 두고봐야 할 흥행성적도 그렇지만 영화가 기대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지형도는 극단적 대조를 이룬다. 남북화해무드에 이어 찾아온 이 영화에서 북한군은 죽여야 할 적이 아니라 동포로 다가온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 이런 태도에 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흥행에 실패한 전작 2편과 달리 <공동경비구역 JSA>로 하루아침에 ‘흥행감독’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소문난 영화광인 그는 이전까지 소수의 열광만 몰고다니는 ‘안 팔리는’ 감독으로 평가받았다. 성공의 배경에 심재명, 이은이 이끄는 제작사 명필름의 힘이 지대하지만 <공동경비구역 JSA>는 감독의 연출력이 빛나는 완성도 있는 영화로 평가받았다. 특히 송강호, 이병헌, 신하균, 김태우, 이영애 등 배우들의 연기호흡이 잘 맞아떨어졌고 코미디의 호흡을 놓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일본에 200만달러에 팔려 한국영화 최고 수출액 기록을 바꿔놓았고 내년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5. <춘향뎐>

“연륜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실험정신, 영화매체에 대한 진지한 고민.”(김소희) 한국영화사상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처음 진출한 <춘향뎐>은 ‘임권택-정일성-이태원’이라는 전통 충무로 세대가 남긴 뜻깊은 유산이다. 임권택 감독은 조상현 명창의 판소리를 영화에 고스란히 옮겨오는 영화역사상 보기드문 실험을 했다. 영상이 소리와 함께 흐르는 <춘향뎐>은 기존 <춘향전>과 달리 가능한 원작에 가까운 연출을 했다. 10대 배우들의 윤기나는 몸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흔히 강조되던 교훈적 분위기 외에 에로틱한 열정까지 담아냈다.

칸영화제 때 ‘이국적 시’라는 제목의 평을 쓴 <르 피가로>는 <춘향뎐>에 대해 “전체적으로 낯선 느낌을 원한다면 추천하고 싶은 영화. 황홀한 스펙터클이긴 한데 한편으론 당황스럽다. 동양영화에선 이렇게 연극적인 표현과 안무를 결합한 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야기와 무대의 이국성뿐 아니라 이들을 다루는 근본적인 독창성이다”라고 말했다. 국내 흥행에선 만족스런 관객동원을 못했지만 최근 프랑스에서 개봉한 것을 비롯 미국과 유럽에 차례로 선보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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