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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벌거벗은 눈, 김소희 평론가의 <프레젠스>

<프레젠스>

1519년 무렵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개척자와 선주민의 대립을 다룬 라브 디아스의 <마젤란>(2025)은 이례적인 방식으로 문을 연다. 작은 도기를 품에 안은 벌거벗은 필리핀 소녀가 강물을 거슬러 물일을 하며 고정된 카메라가 놓인 쪽으로 다가온다. 소녀가 카메라와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그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놀라 뒷걸음치며 달아난다. 그러는 동안 카메라는 그를 놀라게 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대신, 소녀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소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얼굴이 하얀 사람이 나타났음을 알린다. 사람들은 그가 신일 거라고 짐작한다. 역사는 대개 개척자를 중심으로 기록되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재현물에서도 이러한 구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마젤란>은 누군가의 시선으로 번역되기 이전에, 선주민의 시선으로 영화의 문을 열면서 익숙한 보기의 방식을 전환한다.

여기에서 선주민의 시선으로 보았다는 느낌에는 의심스러운 지점이 있다. 앞선 장면은 소녀의 반응을 보여줬을 뿐, 그의 시선에 비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가 누군가의 시선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카메라의 시점을 인물의 시점과 일치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응하는 얼굴을 보여준 뒤, 그가 선 위치와 구도에 카메라를 두고 그가 바라본 대상을 담는다. 하지만 <마젤란>에는 시점숏이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물이 무엇에 반응하는지가 생략되어 있다.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지만, 그것이 생략의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만약 마젤란의 모습이 소녀의 모습과 짝을 이뤄 배치되었다면 어땠을까. 마젤란을 연기한 건 잘 알려진 배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다. 대다수 관객에게 낯선 필리핀 배우와 유명 배우의 얼굴이 맞붙을 때, 관객은 관성에 따라 백인 남성주인공의 시선에 동화하게 된다. 소녀의 반응을 먼저 보여줬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결국 리액션의 원인이 된 대상을 완전히 삭제한 뒤에야 소녀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다.

한편 개척자의 얼굴이 생략된 자리에 놓인 것은 카메라다. 카메라는 소녀와 개척자 사이에 놓여 있으므로, 구도상 소녀를 놀라 도망치게 한 대상에 카메라도 슬며시 포함된다. 아직 마젤란이 등장하기 전이므로, 카메라 뒤에 있는 대상은 관객이다. 관객은 소녀가 마치 카메라를 통해 자신을 보는 사람들에게 놀라 도망친다고 느끼게 된다. 스크린 속에서 자신을 향해 마주 달려오는 기차에 놀라서 도망쳤던 관객은 누군가를 도망치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영화의 구도는 관객이 문명의 편에 속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라브 디아스의 카메라는 소녀의 시선으로 보게 하되, 그와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장소에 완강히 버티고 선다.

자기화의 오류 혹은 한계

<마젤란>

<마젤란>의 카메라는 인물과 분리되면서 그의 시선을 보존한다. 이러한 방식은 카메라가 인물의 시점숏과 분리 불가능하게 뒤섞이는 방식을 돌아보게 한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프레젠스>는 일인칭 카메라 시점을 전면화하며 파운드 푸티지 장르가 리얼리티를 구축해온 방식을 되비춘다. <마젤란>의 카메라가 포착된 대상의 시선을 인식하게 한다면, <프레젠스>의 카메라는 다른 모든 시선을 흡수한 유일한 시선이 된다. 이 시선은 한 가족이 빈집을 둘러보고, 입주하고, 다시 떠날 때까지 집 안에 머문다. 카메라와 동화된 미지의 존재는 카메라 뒤에서 내내 침묵을 지키기에,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그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 확증할 수 없다. 영화는 인물의 대사를 통해 시선의 주인이 클로이(칼리나 리앙)의 죽은 친구, 나디아라고 짐작하게 만든다. 하지만 시선의 주인을 파악하는 것이 영화의 핵심은 아니다. 시선의 주인이 누구라고 설정되었든, 카메라의 시점은 다른 무엇도 아닌 카메라의 시점일 뿐이다.

카메라가 유일한 시점이 될 때, 그 시선의 대상은 무력해진다.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2002)는 일인칭 카메라 시점의 원신 원컷 영화다. 캐릭터는 카메라 앞과 뒤로 분화되어, 뒤에서는 시점의 주인이 되고 앞에서는 시선을 위한 안내자 노릇을 한다. 카메라-캐릭터에 비친 대상은 카메라의 망막을 스쳐 지나간다. 카메라가 캐릭터가 되자, 거기에 비친 어떤 존재나 대상도 포커스에서 비켜난다. 관객은 긴 상영시간 동안 화면이 지속된다는 사실에 감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의 지가 베르토프를 비롯해 영화사 초기의 감독들은 카메라가 인간의 시선과 다르다는 데서 가능성을 봤다. 카메라는 인간이 보지 못한 것을 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디지털매체 전환기의 감독은 카메라의 시선이 인간의 시선과 비슷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내기를 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카메라는 인간의 시선을 흉내낼 수 없다. 설사 초소형 카메라가 부착된 안경을 캐릭터의 눈 위에 덧씌운다 해도, 거기에 찍힌 영상이 인물이 본 것과 일치될 순 없다.

<서치>

카메라 일인칭시점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시선의 연속성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카메라에 들어오는 대상에게는 주의를 덜 기울인다. 공포와 반전을 다루는 <프레젠스>에서도 포착된 인물과 개성은 관객의 추리를 위한 일종의 퍼즐로 소비된다. <프레젠 스>의 시도는 <서치>(2018)의 변형적 계승이다. <서치>가 고정 카메라로 행한 것을 <프레젠스>는 핸드헬드카메라로 행한다. 매체가 대상을 돕는 긍정적인 존재로 그려진다는 점도 중요한 공통점이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 모두 아시아계 미국인 가족을 대상으로 삼았다. 캐릭터의 사연이 대상화되기 쉬운 매체 중심 영화들에 아시아계 배우들이 주요 캐릭터로 등장한 것은 단지 우연일까.

일인칭시점은 넓게 보면 자기화 경향과 맥이 닿는다. 자기화는 타자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윤리적인 태도의 하나로 말해지지만, 오늘날 이것은 되도록 쉬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과 맞물린다. 영화계를 중심으로 한정해 말하자면, 자기화의 정점에 할리우드영화가 있고 그 끝에 <아바타> 시리즈가 존재한다. <아바타>가 공백기를 지나 재개되면서, 나비족의 얼굴은 처음의 이질성을 잃고 향수의 대상으로 치환된다. 나비족 뒤에는 할리우드 배우들이 존재한다. 캐릭터에게 거리낌없이 이입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익숙하지 않은 외양을 하고 있음에도 표준화된 할리우드의 서사와 캐릭터를 연기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러한 경향은 10여년이 지나 배우들이 고르게 인지도를 얻은 최근 작품에서 더 두드러진다.

불편함의 필요

<프레젠스>

2015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마련한 특별전에 초대된 라브 디아스 감독과 <씨네21>을 통해 만난 바 있다. 그는 영화를 만들 때마다 어려움의 요소를 일부러 하나씩 삽입한다고 말했다. 필름에서 디지털로 매체가 전환되면서 이전보다 영화 촬영이 쉬워진 환경에 대응하는 그만의 방식이다. 당시에는 그가 말하는 불편함의 요소가 제작자의 입장에만 관련된 이야기라 생각했지만, 관객으로서도 어려움의 요소가 필요하다는 말이었음을 뒤늦게 짐작하게 된다. 길게는 8시간에서 9시간에 달하는 상영시간은 제작자에게서 관객으로 전이되는 어려움의 명백한 증거다. <마젤란>의 상영시간은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지만, 그는 여전히 어려움의 요소를 탐구한다. 선주민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내내 헐벗은 채 등장한다는 점은 제작자에게도 관객에게도 일종의 허들이다.

소녀가 카메라로부터 달아난다는 인상은 소녀의 복장 없는 복장으로 인해 강화된다. 소녀를 비롯한 대부분의 마을 사람은 더러는 문신이 그려져 있지만 맨몸인 상태로 등장한다. 이는 선주민의 실제 생활 방식을 적절히 구현한 묘사라 해도, 문명화된 관객의 시선에 생경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묘사는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여기에는 대상화가 이중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재현 방식은 원주민을 대상화하는 관습에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든다. 선주민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주로 정신착란 상태에 놓여 혼잣말을 하거나 연기 스타일이 과장되어 보이는 점도 관객의 동화를 물리치는 요소다.

<마젤란>이 일으키는 거리감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대상화와는 차이가 있다. <마젤란>의 대상화는 대상화하지 않기의 허울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한다. 오늘날 요청되는 윤리는 누군가를 대상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결코 이해하거나 다가설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보존하는 데 있다. 어떤 대상은 자기화의 욕망으로부터 끝내 미끄러진다. 장 루슈의 <신들린 제사장들>(1955)은 아프리카 토착민의 낯선 하우카 풍습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포함된 작품이다. 사람들은 살아 있는 닭이나 돼지의 피를 마시고, 약에 취해 비틀거리며, 거품을 물고 몸을 뒤튼다. 영화비평가 빌 니콜스는 장 루슈가 카메라에 담은 이들의 모습이 관객의 눈에는 미개한 것으로 비칠 수 있음을 예상치 못한 결과라고 말하지만(<다큐멘터리 입문>), 장 루슈는 그러한 위험을 알고 있음에도 그대로 밀고 나간 쪽에 가깝다. 영화에서 묘사한 풍습은 엄연히 존재한다. 다만 자극적인 풍습만이 이들의 전부가 아님을 영화는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는 편안함이 지나쳐, 불편함을 개발해야 하는 시대를 산다. 마이클 이스터의 책 <편안함의 습격>이 겨냥하는 바도 이것이다. 물론 불편함에 관한 논의는 불편함만큼 불편하지 않다. 영화에서 불편함은 불쾌감과도 연결된다. 영화는 불쾌감을 장르적 쾌감으로 바꾸도록 교육해왔다. 수많은 공포영화에서 끔찍한 장면은 얼마나 매혹적인 것으로 드러났던가. 이제는 불쾌감을 불쾌감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한 때인지 모른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1975)은 쾌감 없는 불쾌감을 실험한 대표적인 사례다. 영화는 파시즘을 정면으로 다루며,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강도 높은 폭력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물론 불쾌한 이미지 자체가 권장할 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는 계승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불편함과 불쾌감의 이미지들이 지나치게 안락함을 추구해온 세계에서 다른 신호로 읽히게 되었음을 짚고 싶다.

<프레젠스>

<프레젠스>는 불편한 장면을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어쩌면 누군가는 카메라가 나디아의 시선을 대체한 것이 아님을 앞서 눈치챌 수 있다. 직접 카메라를 잡은 소더버그의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남성적 시선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격한 반응은 대부분 라이언(웨스트 멀홀랜드)이 클로이의 방에 함께 있는 순간에 드러난다. 라이언이 클로이가 마실 음료에 몰래 약을 타려고 시도할 때, 카메라는 염력으로 사물을 쓰러뜨리며 개입한다. 그러나 클로이와 라이언이 서로에게 탐닉하는 순간, 옷장 뒤에 숨어 있다가 아예 눈길을 돌려버리는 시선은 무언가 이상하다. 사춘기 소녀의 호기심으로 사랑을 나누는 친구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을 만도 하건만 못 볼 것을 본 듯이 서둘러 피한다. 카메라는 죽은 자의 시선을 경유하면서도 그들이 그리워할 살아 있는 이들의 얼굴을 충분히 오랫동안 바라보지 않는다. 카메라 캐릭터는 오직 사건 해결에만 골몰하고, 이에 따라 가족들은 잠재된 사건의 맥락에서만 다뤄진다.

영화의 방식은 다소 어지러움을 유발한다는 것 외에는 관객을 전혀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앞서 비판적으로 언급한 장면도 윤리적인 카메라 운용의 하나로 받아들여질지 모른다. 그러나 재현해야 할 것과 재현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이런 식으로 분리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프레젠스>의 불편함은 재현이 아닌 제작의 맥락이 독식한 모양새다. 감독은 시선의 연속성을 위해 카메라를 끊지 않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내린다. 카메라를 든 감독이 자처한 고난이, 더는 보여줄 것이 남지 않은 감독의 고백에 가까운 선택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카메라를 든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찍은 것으로 말해야 한다. <프레젠 스>의 카메라는 본다는 것을 행동하는 것으로 곧장 치환하려 시도하지만, 그것은 카메라의 몫이 아니다.

<프레젠스>가 강조하는 카메라의 무고함은 제임스 캐머런이 “<아바타>에는 AI 생성 이미지가 쓰이지 않았다”라고 강조한 바와 함께 AI 영상물 시대에의 대응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 영화와 AI 관련 논의에서 불편함은 자주 생략되는 부분이다. AI 생성 이미지가 주는 ‘언캐니 밸리’는 편리함의 추구로부터 생성된 불편함을 뜻한다. 거기에는 영혼과 아우라를 잃은 껍데기로서의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영화도, 그림도 아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영화 이미지 체계의 중심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제 영화에 요구되는 것은 불편함을 통해 불편함을 넘어서는 방식을 발견하는 일이다. 모든 것을 자기화해서 흡수하는 편리함을 넘어 분리의 불편함 혹은 불쾌감을 감수하는 것. 그 답은 카메라 뒤가 아니라 앞에 있다. 아직은 카메라 뒤의 존재가 아니라 카메라 앞의 존재를 말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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