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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엉큼한 아버지, 무서운 어머니, 연약한 남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짐 자무시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 황금사자상을 수여했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인 편이었으나 이 결과를 이변으로 받아들인 이들도 적잖았다. 은사자상을 수상한 카우타르 벤 하니야의 <힌드의 목소리>(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에 가족을 잃고 구조를 요청하다 사망한 아이의 실화를 재구성한 영화)가 환기하고 호소하는 당대 긴급한 현실을 외면한 선택이라는 반발도 이어졌다. <힌드의 목소리>를 관람하지 못한 상태로 이러한 반응에 의견을 더하긴 어렵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 한해 말하자면, 이 작품이 짐 자무시의 전작들과 비교해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뤘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다만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는 자무시 세계의 속성이 그의 영화로서는 다소 이례적인 설정과 접속하며 일으키는 흥미로운 진동이 있다. 그것이 안기는 감흥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짐 자무시의 필모그래피에서 옴니버스는 익숙한 구성이다. 초기작 <미스테리 트레인>(1989)이나 <지상의 밤>(1991)의 에피소드들은 각각의 장소에서 ‘같은 시각’ 일어난 일들로 이루어진다. 시간의 동시성은 한 모텔의 다른 방, 혹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잇는 최소의 연약한 선이자, 세상의 수많은 편린 중 하필이면 이들을 엮는 필연적인 고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에피소드들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채로 공존하고, 그것의 논리적인 이유는 감독조차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 영화에 서사를 교차하려는 시도는 없다. 한편 <커피와 담배>(2003) 속 11개의 단편들은 시간이 아니라 ‘커피와 담배’라 는 무용하기에 더욱 체념할 수 없는 쾌감의 물질을 공유하지만, 이 이야기들 역시 그저 흩어져 존재하는 누군가의 한순간일 뿐이다. 짐 자무시의 옴니버스 우주에서 의미로 연결되지 않은 채 공존하는 삶의 파편들은 개별적으로 노래하고 그리하여 고독한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 어머니, 쌍둥이 남매의 에피소드로 나뉜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기조는 짐 자무시의 옴니버스 전작들과 좀 달라 보인다. 에피소드들은 ‘같은 시각’에 벌어진 일도 아니고, <다운 바이 로>(1986) 속 탈옥수들의 행보처럼 동떨어진 사연이 결국 한데 모여 발생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미국, 아일랜드, 프랑스에서 촬영한 세 개의 에피소드는 영화 내에서 서로 얽히지 않지만, 이들을 접착하는 모티브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 무려 ‘가족’이라는 범주, 인간사의 뿌리 깊은 상투, 끈질기게 의미를 전제하고 요구하고 동원하는 화두가 에피소드들을 관통한다. 의미에 저항하는 찰나에 몰두하고 거처의 안정성보다 길의 변동성을 사랑해온 감독에게 썩 어울리는 주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짐 자무시 영화의 생동감이 세계의 흐름을 그저 바라보는 태도에 기반한다면, 가족은 애초 그 상태를 견지하기 어려운 소용돌이 아닌가.

세개의 에피소드에는 자녀들이 차를 타고 부모 집을 방문했다가 떠나는 설정과 함께 세부 요소들도 반복된다. 가족들이 입은 붉은 옷, 손목에 찬 롤렉스 시계, 물을 둘러싼 대화, 액자 속 과거 사진, 특정한 관용구, 도로에서 마주친 스케이트보더…. 그 패턴은 알레고리나 상징 같은 것이 아니라 삶의 작고 단순한 면면의 변주, 농담과 유머의 조각일 뿐이다. 오래전 자무시의 표현을 따르자면 주류 서사에서 일반적으로 “버리는 부분만을 가져가는” 그의 기질이 여기서도 고수된다. 차이가 있다면, 무의미한 세부의 반복을 기이한 추동력으로 삼아 텅 빈 여정에서 충만함을 길어낸 <브로큰 플라워>(2005)나 예리한 감각과 대담한 보폭으로 밀어붙여 아름다운 운문의 구조를 성취해낸 <패터슨>(2016)에 견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 그것의 활동은 구조의 긴밀함을 도모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느슨함을 지적하는 일련의 감상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주인공들의 성질부터 다르다. 인물들은 그간 짐 자무시의 세계를 추진한 여행자나 이방인과 거리가 멀다. 그들은 방랑자도 좀비도 흡혈귀도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로 향하는 ‘자녀들’이다. 모호한 행로에서 피어나는 우연, 돌발적인 사고, 이합집산의 소동 등이 들어설 가능성 없이 이들의 길은 고정된 목적지, 부모의 집으로 귀결된다. 그러니 이 길의 의미는 이미 지루하고 명백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동시에 공허한 것이기도 하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끝에 이르러 우리는 아버지(톰 웨이츠)의 집을 나와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들 제프(애덤 드라이버)가 짓는 아리송한 표정처럼 멀뚱하게 묻게 된다. 가족의 만남에서 그들이 나눈 건, 혹은 우리가 경험하고 즐긴 건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안 만날 수 없으므로 만난다는 동어반복적인 대답 외에 이 재회를 수식할 새로운 말은 없어 보인다. 이 영화의 비범함은 공허해서 씁쓸한데 씁쓸해서 헛웃음이 터지는 이러한 자문자답에 서사의 층위가 아니라 오직 움직임에 대한 영화적 감각, 자무시 특유의 능청스러운 운동성으로 도달하는 방식에서 나온다. 그 역량이 눈부시게 발휘된 에피소드는 단연 ‘아버지’ 파트이고, 자무시의 세계에서 처음 맛보는 분위기는 ‘어머니’ 이야기, 가장 평범하게 다가오는 세계는 ‘남매’ 부분이다.

아버지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제프와 에밀리(마임 비아릭)가 차를 타고 아버지 집으로 가는 초반, 앞좌석에 나란히 앉은 남매,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그 동선과 함께 스쳐가는 바깥 이미지가 교차한다. 남매의 자동차는 한적한 도로를 따라 예정된 목적지로 매끄럽게 달리는 중임에도 이 장면의 구성에는 이상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대화하는 남매를 차 앞창에서 비춘 숏들은 과장을 보태, 옛날 영화가 정지한 자동차 뒤로 배경을 흐르게 해서 그것의 운동성을 가장하던 방식의 감흥을 일견 상기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이를테면 자동차와 인물과 풍경의 동시성과 일체성을 연출하지만, 그럴수록 분리와 간격을 노출 혹은 전시하는 장면의 인위성이 문득 일깨우는 질문, 이 차가 놓인 지대, 향하는 곳은 어디라고 해야 하는가. 남매의 차가 아버지 집으로 뻗은 길 위에 있다는 범상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대목은 불쑥 그런 반문을 불러들인다. 남매의 차는 아버지의 집으로 나아가지만, 그것의 무의식은 다른 곳을 응시하기 때문일까.

세 에피소드의 자동차 장면마다 자무시가 야심 차게 삽입한 스케이트보드 타는 청년들의 광경도 그 감흥의 연장선상에서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꿈결처럼 출현해 느린 속도로 펼쳐지다 어느덧 사라지는 이들의 광경은 아버지에게 점차 가까워지는 별반 내키지 않는 행로의 방향성을 바꾸거나 멈추지는 못해도 그 길의 경직된 속성을 경이로운 리듬으로 잠시 단절하고 망각하게 하는 무목적적 활동이다. 자무시는 스케이트보더의 “야생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감수성”이 우리를 “폐쇄된 세계 밖으로” 데려가는 “호흡”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씨네21> 1538호). 이들의 자율적이고 몽환적인 움직임은 남매의 차가 곁눈질하는 이탈의 욕망을 현현하는지도 모른다. 짐 자무시는 그러한 이탈의 욕망을 번민과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경탄하며 기꺼이 매혹될 아름답고 순수하고 심지어 평온한 심신의 운동으로 그린다. 이것이 자무시 세계의 성정이다.

남매의 말처럼 가스비도, 전기세도 못 내고 연금도 못 받는 아버지의 처지를 반영하듯, 정비되지 않은 눈길을 지나 도착한 그의 집 내부는 낡고 좁고 어수선하다. 오랜만에 만난 세 사람 사이에는 대화라고 할 수도 없는 어색하고 난감하고 우스운 말들의 껍데기만 오간다. 꽉 막힌 실내에서 그처럼 내용 없이 이어지는 시간을 요컨대 롱테이크로 담아 가족의 생태계를 주시하는 감독들도 있겠지만, 자무시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그는 이 작은 공간을 지속해서 분할하고 세 사람의 위치를 거듭 이동시키며 이토록 따분한 상황과도 역동적으로 유희할 수 있는 최대치의 운동을 상상해본다. 거실 안, 천을 뒤집어쓴 소파와 테이블 너머 놓인 의자 두개, 그리고 호수가 보이는 창가에 자리 잡은 의자 하나, 이렇게 네개의 의자를 축으로 인물들은 화면 안에서 셋에서 둘로, 둘에서 하나로, 다시 둘이나 셋으로 흩어지고 모이는 식으로 끊임없이 재배열된다. 아버지 집 내부를 구성하는 프레이밍은 이처럼 부산한 움직임에 친밀하게 반응한 결과다. 그 움직임은 인물의 내면에 접속하거나 메시지를 의도하지 않지만, 공간의 공기가 정체될 위험에 적극적으로 맞선다. 세 사람 중 누구도 한곳에 그대로 앉아 있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앉아야 이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짐 자무시는 변동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사실이 톰 웨이츠의 걸쭉한 음성과 코믹한 연기로 짜릿하게 각인된 장면이 있다. 아버지가 벽난로 앞 의자에 앉은 남매의 투숏에 끼어들어 그들 사이에서 느닷없이 도끼를 휘두르는 대목에는 그 의지가 쾌활하고 기발하게 각인된다. 아버지가 장작 패는 몸짓을 모방한 행위에 심취해 날카로운 도끼날을 점차 세차게 휘젓자, 경악한 딸이 프레임 밖으로 탈출해 맞은편 의자로 건너간다. 폭소를 참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 도끼질은 사뭇 진지한 것이기도 하다. 위협을 무릅쓰고라도 장면을 쪼개고 기동력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 세계가 못 견디는 건 고정성의 무료함이다. 카메라가 쟁반 위 물컵과 찻잔을 종종 한꺼번에 내려다보듯이 인물들을 조망할 만한 좌석이 이곳에는 들어설 수 없다. 이 에피소드가 견지하는 정신은 이야기 끝에서 놀라운 반전으로 다시 한번 의기양양하게 선언된다. 남매가 떠난 뒤, 후줄근한 천 아래로 고급스러운 소파가 드러나고, 아버지는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차림으로 계단에서 내려온다. 예상치 못한 변신은 뻔뻔하기 짝이 없지만, 왠지 근사하다. 그는 현관 앞에 주차된 고물차가 아니라 감춰둔 새 차를 타고 아들이 준 용돈으로 데이트하러 집을 나선다. <데드 돈 다이>(2019)에서 좀비 떼가 뛰어노는 흉흉한 세상을 관조하던 은둔자, 무대의 관찰자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 자식들에게 사기치는 탁월한 연기자, 무대의 주인공이 된다. 도입부 자동차 장면을 보는 동안 이탈의 욕망은 남매의 것인 줄 알았는데, 그 욕망의 진짜 주인, 진정한 실행자는 아버지였던 셈이다. 그가 이 에피소드를 현재진행형으로 만든다. 자신의 이야기를 가족의 고리타분한 울타리에서 영리하게 진취적으로 구한 그가 이 에피소드의 승리자다.

어머니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여러모로 두 번째 세계는 첫 에피소드에 대응된다. 아버지 파트가 새 소파를 낡은 천으로 덮으며 시작한다면, 어머니 이야기는 누운 자세로 긴 소파를 우아하게 점유하는 모습으로 출발한다. 둘 다 작위적이지만, 아버지는 음흉한 쪽이고, 어머니(샬럿 램플링)는 거만한 쪽이다. 아버지 소파의 비밀을 남매는 영원히 모를 것이고, 어머니의 소파는 자매에게 자리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큰딸 티모시(케이트 블란쳇)가 운전하는 차는 어머니 집에 당도하기도 전에 길거리에서 갑자기 정지하고 만다. 아버지 집으로 향하는 제프의 차는 그 행로에서 분리되려는 소망을 비쳤지만, 티모시의 차는 아예 멈춰버려 어머니와의 약속 시간을 지연한다. 스케이트보더들이 출몰하는 순간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청년들이 역시나 느린 속도로 도로를 춤추듯 미끄러지다 골목으로 종적을 감추는 장면이 정비사를 기다리던 티모시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광경은 이야기 바깥의 “호흡”이나 이야기를 흩뜨리는 단절, 잉여, 낭만이기보다 결과적으로는 이야기의 탈선을 부드럽게 차단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스케이트보더들의 장면이 지나가자마자, 마치 그 움직임에 마법처럼 반응하듯 티모시의 고장난 차가 수리 없이도 다시 작동하는 것이다. 어머니 집으로의 이동은 재개된다. 두 번째 세계의 숏들을 지탱하는 내적 규칙은 어머니의 기질처럼 실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아버지의 집이 너저분하고 빈곤한 모양새로 정체를 숨겼다면, 어머니의 집은 과시적인 깔끔함과 반질반질한 부의 표지로 속내를 은폐한다. 어머니가 식탁에 배치한 차와 알록달록한 케이크와 고급스러운 식기, 부감숏에 담긴 그것들의 완벽한 구도는 이 집의 공고한 질서와 다름없다. 둘째 딸 릴리스(비키 크리프스)가 외투를 아무렇게나 던지는 행동을 과장하고 어머니 몰래 케이크 크림에 손을 대도, 그 질서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는다. 인물들의 자리가 인과 없이 뒤섞이고 오락가락하던 아버지 집의 변화무쌍함은 어머니의 집에서는 꿈도 꿀 수 없다. 정해진 자리에 앉아 있던 딸들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어머니는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현관문을 닫는다. 자매가 떠난 후, 자무시는 알 길 없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미련 없이 문 안에 봉인한다. 굳게 닫힌 그 문의 형상은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안도할 만한 이미지다.

남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첫 번째 에피소드가 ‘가족’이라는 거대한 의미를 무의미한 운동만으로 잘게 조각내고 두 번째 에피소드가 운동을 통제함으로써 그 의미를 마비시킨다면, 세 번째 에피소드는 그 의미와 사색에 빠진다. 냉정히 지적하자면, 부모가 부재하므로 사색이 가능해진다. 이 에피소드는 굴곡도, 모호함도, 원기도, 따라서 재미도 덜하다. 부모가 비행기 사고로 갑자기 사망하자 쌍둥이 남매 스카이(인디아 무어)와 빌리(루카 사바트)는 그들의 물건들이 모두 치워진 집에서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신분을 숨기고 살았던 부모의 정체나 사고의 맥락을 비밀로 둔다고 해도 이 에피소드는 너무 투명하다. 부모를 상실한 집은 사기꾼 아버지의 집이나 폐쇄적인 어머니의 집보다 다가서기도 이해하기도 수월하다. 후회, 미련, 기억, 애도처럼 그에 대한 감정을 명명하기도 쉽다. 이를테면 부모의 침실에서 슬픔을 삭이는 쌍둥이 남매의 모습에 머물던 카메라의 시선이 빈집 구석구석을 한 바퀴 쭉 돌아볼 때, 그 운동성이 지시하는 정념은 감상주의적인 사설 같다. 규정적이기도 하다. 앞선 두 에피소드에서 인물들의 롤렉스 시계는 무궁무진한 사연을 숨긴 일종의 가면 같은 것이지만, 여기서 그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산으로 호명된다. 남매의 이야기는 가짜 신분증들로 남겨진 이들 부모의 모험담을 닮지 않는다. 기괴한 아버지, 무서운 어머니가 괴력을 발산하던 가족 옴니버스는 부모를 그리는 자녀의 슬픈 서정에 얌전히 안착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의 예사로움은 의아하고 아쉽다. 하지만 자무시는 이 엔딩에도 슬며시 자각 하나를 심어두었다. 가족의 의미는 가족의 죽음 뒤에야 온다. 그조차 산 자의 미화된 허상과 자기 연민이다. 그러니 다시 첫 에피소드로 돌아가 가족이라는 현재의 무의미한 진흙탕에서 신나게 뒹굴어보자! 이것이야말로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메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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