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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도망치는 남자,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리뷰
이우빈 2025-05-15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이하 <그 자연>)는 홍상수 감독의 전작 <>과 비교했을 때 무척이나 흥미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중년의 영화감독 병수(권해효)가 탑처럼 생긴 한 건물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던 <>과 비슷하게 <그 자연>은 우연히 방문한 여자 친구 준희(강소이)의 부모님 댁 인근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젊은 시인 동화(하성국)의 이야기다. 동화는 준희를 집에 데려다주러 왔다가 우연히 준희의 아버지(권해효)를 마주친다. 준희의 집은 시골에 있는 커다란 주택이고, 그 주변엔 울창한 산세가 드리워져 있다. 동화는 준희의 아버지와 산 중턱의 벤치에서 막걸리를 마시거나 준희의 언니와 식사하며 오후를 지내고, 밤에는 준희의 가족과 함께 닭백숙을 먹으며 술을 마신다. 그러다가 잠든다. 우연한 침입과 우연한 하룻밤. <>이 운명적으로 자신을 가둔 중년 남자의 이야기였다면 <그 자연>은 우연으로 인해 가두어진 청년의 이야기다.

홍상수의 영화가 으레 그래왔듯 우연은 진실의 창구가 된다. 겉보기에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던 동화가 그의 시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반쪽짜리 예술가임이 점차 드러난다. <>의 병수가 영화 제작사와의 다툼, 여러 여성과의 복잡한 관계, 경제적인 궁핍 등에 시달리는 현실적 인물이었다면 동화는 그 이름처럼 동화 같은 삶을 꿈꾸는 이상적 인물이다. 둘의 공통점은 현실이든 이상이든 간에 이 남자가 자신의 세계 안에서 도망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도망친 여자>의 감희(김민희)나 <수유천>의 전임(김민희)이 새로운 패턴을 발견하며 이런저런 공간을 주체적으로 휘저었던 것과 다르다. 이 남자들은 이 좁은 세계 안에서 빙빙 맴돌기만 하면서 영화를 이끈다.

권해효 배우는 <여행자의 필요> 개봉 당시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홍상수 영화 속 자신의 역할을 “감추는 사람”이나 “후회하는 인간”이라고 수사한 바 있다. 이를 토대로 볼 때 <도망친 여자> 이후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9번째로 등장하여, 이번에 단독 주연을 맡게 된 하성국 배우의 기능은 ‘못 도망치는 남자’ 정도로 규정해도 좋을 듯하다. 그는 <물안에서>나 <우리의 하루>에서도 영화를 찍거나 어떤 예술을 하려는 청년으로 등장하지만, 마땅한 결과를 내지 못하고 영화를 끝맺는다. <그 자연>도 마찬가지다. 한편의 시를 짧게 읊기는 하지만 준희의 가족들은 그의 재능을 의심하고, 잠에서 깬 동화는 산을 유유히 산책하며 담배를 피울 뿐 제대로 된 시작(詩作)에 임하지 못한다.

시라는 욕망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동화의 처지는 <그 자연>의 공간적인 구성과도 결부된다. <그 자연>은 준희의 집, 그리고 그 집 주변을 둘러싼 산책로와 산의 풍경을 좀처럼 연결하지 않는다. <>의 모든 공간이 나선형의 계단을 통해 들어가고 나서는 방들의 조합으로 꾸려졌다면, <그 자연>은 집에 있는 2층의 공간을 보여주더라도 그 2층으로 올라서는 길이라든지 산책로가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등을 가시적으로 연결해주지 않는다. 요컨대 끝없는 미로. 넓을수록 헤매게 되는 다이달로스의 미궁. 영화의 결말에서도 동화는 모종의 이유로 인해 미궁의 장력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 자연>은 분명 즐겁고 편안한 영화다. 대체로 넉넉하고, 웃음이 많으며, 충분한 여유의 감각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풍요로운 자연과 거대한 우연 속에서 인간은 외려 한없이 작아지고 속 좁아지며,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함에 큰 회한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물론 동화는 그 회한을 겉으로 표출하지 않는다. 권해효 배우처럼 대놓고 후회하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혹은 과거의 김상경 배우처럼 온갖 회전문을 돌아다니며 방황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관객은 분명히 그의 내재적 한계를 직시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무척이나 즐겁되 마음이 저릿한, 그런 영화와 인물로서 <그 자연>과 동화의 존재는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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