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봉 26년 만에 재개봉을 한다. 그동안 온라인에서 <쉬리>를 보기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역사가 워낙 길다. 오래전 삼성영상사업단이 영화사업과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를 철수하면서 삼성영상사업단이 투자배급을 맡았던 <쉬리>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담당자가 없어 사후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거다. <쉬리>가 1999년 개봉하고 난 뒤 VOD 서비스나 OTT 플랫폼에서 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판권을 가진 주체가 없어졌기 때문에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내게도 슬픈 일이었다. 방안을 모색하며 1년, 2년 시간이 흐르다가 지금에 이르렀다. 여러 채널을 통해 계속 수소문했지만 정확한 정보를 얻기 힘들고 핑퐁 게임처럼 다른 곳, 다른 부서로 보내질 뿐이었다. 도돌이표처럼 돌고 돌다가 마지막으로 이런 콘텐츠를 관리하는 상대측 변호사와 연락이 닿게 되어 함께 협의를 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작품이 극장에서 빛을 볼 수 있어 좋다.
- 하정우 배우와 관객과의 대화(GV)를 진행했다. 새로운 세대가 <쉬리>를 극장에서 처음 만나는 풍경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과거에 만들어진 영화를 현재 관객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영화를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가장 궁금한 일이다. 혹시 영화가 개봉했던 시대에만 통용된 작품은 아니었을까, 지금 관객들이 봐도 똑같이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걸까 같은 질문들이 굉장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너무 설렜다.
- <쉬리> 이전에 <은행나무 침대>가 있었다. 1996년 설 연휴에 개봉한 영화는 무려 4개월간 장기 상영을 하기도 했다. 이제 막 처음을 만들어가던 시기를 돌아본다면.
나는 시대적 행운아다. 예를 들어 내 영화가 70년대에 나왔다면 내가 지닌 소망이나 꿈이 현실적으로 이뤄지긴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70년대는 검열의 시대로서 영화제작이 무척 제한돼 있었기 때문에 젊은 영화인이 자기 의지만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내긴 어려웠다. 우리나라가 1988년 제작 자율화가 되면서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새롭고 창의적인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나의 노력과 실험도 더 힘을 받았던 것 같다. <은행나무 침대>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년만 이르게 만들어졌어도 원래 의도만큼 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도 그다음 <쉬리>로 나아갈 행운이 없었을 것이다. 정말 절묘한 일이었다.
- <은행나무 침대>부터 <쉬리>는 그 당시 흔치 않았던 복합 장르를 띠고 있다. 무협과 액션에 로맨스를 섞었다.
그때 내가 장르적 결합에 관심이 많았다. 여러 요소를 혼합하면 더 많은 관객의 다양한 관심을 충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했다. 그런데 여러 요소를 가져오다 보면 도리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 경우들이 생각보다 많다. 이것도 저것도 각자 제 역할을 못하는 경우들이 그렇다. 각 장르가 결함을 보완해줘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결함덩어리가 되는 거다. 이 말은 시나리오의 가장 핵심적인 고민이기도 하다. 이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결과적으로 시나리오를 계속해서 많이 써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자신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생각과 구성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에 장르적 재미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모르면 그 완성도를 최대치로 이끌어내기 어렵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1990년대는 한국영화에 대한 인지보다 외화에 대한 대중적 선호가 더 큰 시기였다.
할리우드영화는 꾸준히 강세이지만 1980년대부터 홍콩영화에 대한 선망이 컸다. 많은 한국 영화인들도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자랐다. 왕가위, 오우삼, 서극, 장이머우 감독이 이뤄낸 영화들은 하나의 물결처럼 극장가를 감쌌다. 나 또한 그랬다. 할리우드는 너무 멀잖나. (웃음) 괴리감이 크다. 자본, 기술, 시장 규모 등 격차가 너무 컸기 때문에 비교대상조차 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시아영화로 좁히면 그 포용성이 커진다. 제작 환경이나 문화적 수용성이나 우리를 대입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진다. 그리고 욕심을 갖게 되기도 한다. ‘저기는 저만큼 이뤄냈는데, 왜 우린 어렵지?’ 하면서. 그 욕심이 긍정적인 촉매제와 자극제가 되던 시절이었다.
영화의 상징이 시대를 대표하다
- <쉬리>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활용, 포토그래피 분석, 화학무기 등 첨단기술과 산업 정보를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많다. 액체 폭탄도 엄청나게 화려한 캡슐 안에 들어가 있고. 하이테크를 향한 90년대 말의 열망과 선망이 투영된 걸까.
이미지상 그렇게 비칠 수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관객 입장에서는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최첨단 기술을 차용한 장르영화나 콘텐츠가 많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들이 영화적 재료로 보여질 기회가 많지 않았을 뿐 그때에도 기술들이 많이 상용화되고 개발되고 있었다. <쉬리>는 이미 보편화된 기술에 근간을 두고 레이어를 쌓아간 작품이라 사이파이(sci-fi)적이라 일컫긴 어렵다. 액체 폭탄 역시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고.
- <쉬리>를 대표하는 상징을 꼽자면 단연 키싱구라미일 것이다. 로맨스를 이렇게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당시 많지 않았다. 어떻게 키싱구라미를 찾게 되었나.
보통 키싱구라미를 알고 그 뒤에 스토리를 풀어나갔을 거라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이명현(김윤진)이 어떤 직업을 갖고 있으면 좋을까 고민하던 중 그에게 도청 장치를 설치하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정보기관을 도청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를 어떤 직업으로 설정해야 이 문제를 더 수월하게 해결할지 보완점을 찾아나가다가 수족관을 떠올렸다. 물고기 속에 음파 감지를 할 수 있는 최첨단 도청 장치를 설정한다면 감쪽같이 모르지 않을까. 그렇게 물고기를 공부했고, 그때 키싱구라미를 만났다.
- 이 이후에 키싱구라미 열풍이 엄청나게 불었다.뉴스에도 나왔다. (웃음) 다 팔려서 못 판다고. 집에 수족관을 설치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기고 작은 어항에서 키싱구라미를 키우는 풍경도 흔했다.
- <은행나무 침대>에 이어 한석규 배우를 두 번째로 만났다.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로 선한 얼굴로 주목받던 그로부터 특전사 장교 출신의 국가정보원 요원의 거친 얼굴을 이끌어냈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배우를 캐스팅하는 과정에 가장 높게 평가한 가치는 이 배우가 현실감을 얼마만큼 전달해줄 수 있느냐였다. 그게 <쉬리> 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소라고 판단했다. 총격, 액션 등 장치에서 오는 현실감만큼 관객이 피부로 느낄 배우의 표정, 동작에서 오는 현실감 또한 중요했다. 전형적인 이미지를 따라갔다면 중원은 우락부락하고 근육질의 액션배우가 연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상생활에서 일반인과 섞여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생활감이 강한 첩보원을 두고 싶었다.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극적인 순간에 몰릴 때 직업적 면모를 끌어올릴 수 있는 배우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면모를 충족시키는 건 오직 한석규뿐이다.
- 하지만 박무영 역할은 뭐랄까, 최민식 배우의 섹시한 면모로 중무장했는데. (웃음)
유중원에 비해 박무영은 서사를 층층이 쌓아갈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보다 전사나 투사에 가까운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다만 1990년대를 돌아보면 그때 북한군에 대한 이미지가 완고했다. 간첩과 스파이, 악역과 악마의 이미지랄까. 나는 그 고정성을 뒤집고 싶었다. 그래서 남과 북의 차이가 잘 구별되지 않고, 고정관념을 뒤흔들 수 있길 바랐다. 이전에 <은행나무 침대>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북한 유학생들을 만났을 때 내가 품고 있던 상이 선입견이었다는 것을 깨달아서 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잘생긴 북한 공작원을 선택했다. 그게 최민식 배우다.
- 북한군 중에서 눈에 띄는 유능한 저격수 대부분이 여성이다. 초반부 훈련을 받는 군인이나 중원의 악몽에 나온 저격수, 또 마지막 반전까지도. 당시 분위기에 비추면 놀라운 장면들이다.
왜 한국영화는 관객들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할까, 그런 고민을 한참 많이 했다. 그리고 나만의 답을 냈다.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 것. 전형적인 스토리 문법과 이미지를 고민 없이 따르는 것. 익숙한 요소를 탈피하기 위한 노력이 당시 다른 국가에 비해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저격수나 스파이를 생각하면 으레 남성의 얼굴을 떠올리지만 이미 우리는 남성들의 액션을 너무 많이 봤다. 더 근사하고 세련된, 남성의 것에 못지않은 여성들의 액션을 보고 싶었다. 물론 내게도 엄청난 도전이었다. 전에 없던 장면을 상업적으로 녹여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잘 안착하면 더 업그레이드된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그 여성 저격수들의 무드도 구체적이다. 상냥하거나 구출을 기다리지 않는다. 뚜렷한 목표 설정을 위해 돌진한다.
여성들은 보통 총 쏠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총기와 일체감을 갖는 경험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총을 격발할 때 냉정하고 무서운, 혹은 무표정한 모습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총을 멋지게 쏘는 게 아닌, 총과 하나되는 감정을 분출할 수 있어야 한다. <쉬리> 속 여성들의 당당함은 무기 앞에서 거리낌이 없어졌기에 나온 것이다. 그래서 모든 배우가 촬영 전부터 4~5개월간 트레이닝에 들어갔다. 지금은 액션영화를 위해 훈련을 받는 과정이 자연스러워졌지만 당시엔 그런 사례가 거의 없었다. 액션 트레이닝도 <쉬리> 이후 새롭게 정착한 것이다.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한 당연한 수순이다. 배우가 직접 수행하지 못하면 대역이 해야 하는데 그 순간 현실감이 떨어진다. <쉬리>는 도심에서 대규모 총격 신을 촬영했지만 모두가 사격 훈련을 받아서 인물 하나하나가 자유롭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 총격전이 중요했던 만큼 미국에서 직접 프롭형 총(영화 촬영 용도로 개조된 실제 총기)을 대여했다. 할리우드 전용 총을 고수한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영화계에도 총기가 있었지만 충분히 현실적이지 않았다. 대규모 액션을 찍는데 총이 허술하면 모두의 몰입이 깨질 것 같았다. 전투 신만큼은 다큐멘터리만큼 생생하게 촬영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수월하지 않았다. 한국의 영화제작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았고 손상이나 도난 등을 걱정하기도 했다. 1990년대 말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신용도가 그 정도였던 거다. 그래서 과도한 보험료와 공탁금을 요구했고 상당히 많은 예산이 거기에 묶일 수밖에 없었다. 홍콩에도 비슷한 총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가서 사용해보았는데 그 기종이 지닌 힘이 내 기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불합리를 감수하더라도 진짜 총기를 쓰고 싶어서 렌털료 이외에 보험료, 보증금까지 내서 대여했다. 내 기억으론 25만달러(2025년 기준 3억6천만원) 정도였다.
그때의 영화가 지금을 만들기까지
- 작품성이나 기술면 외에도 <쉬리>는 한국 영화산업 전반에 거시적인 영향을 미쳤다. 1999년에 개봉한 <쉬리>가 23억원의 제작비를 들였다면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04년작 <태극가 휘날리며>의 제작비는 148억원에 달한다. <쉬리>를 통해 한국판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을 경험한 산업이 투자 규모를 대폭 높인 결과다. 한마디로 ‘한국영화도 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내 기억으로 <쉬리>의 순수제작비는 22억4천만원에 달한다. 거의 23억원이 든 셈이다. 이 수치도 1990년대 기준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기 때문에 일반적이라 보긴 어렵다. 평균적으로는 10억원 내외로 제작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100억원대까지 달했으니 5~6년 사이에 10배 이상 투자가 늘어난 거다. 한국 영화산업의 제작 흐름의 판도가 뒤바뀌기 시작한 거다. 특히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에까지 판매되어서 그 수익모델은 더 전세계적으로 변했다. 글로벌시장의 포문을 처음으로 점칠 수 있었다. 특히 그즈음에 김대중 정권이 들어섰는데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정권인 만큼 정부 차원에서도 예술분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문화를 일으켜야만 국가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기조가 컸다. 그렇게 영화를 포함한 예술 활동에 시드머니를 지원받을 수 있었고 밀레니엄 시대가 열리면서 순수 창작이 꽃을 피웠던 것 같다. 예술 발전이 곧 국가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무척 중요하게 작용한다.
- 대규모 투자의 시작점이 <쉬리>라면 <쉬리>는 어떻게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은행나무 침대>의 성공이 없었다면 나 또한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거기에 의존한 것만은 아니고 나만의 색깔이 뚜렷한, 이전에 아무도 해보지 않았던 시나리오가 큰 힘의 근거가 되었다. 독특한데 상업적인 면모까지 갖췄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난다. 분명 위험성이 큰 제작비였지만 <은행나무 침대>의 성적과 시나리오의 힘이 도움이 됐다.
- 상대적으로 작가주의적으로 투자가 이뤄진 느낌이다. 2020년대의 환경과 비교해본다면.
지금은 오히려 정반대다. 이제는 천만 영화가 많아졌고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보는 국가로 성장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영화가 숨 가쁘게 달려온 결과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다. 이렇게 산업이 위축되고 축소되면 감독을 신뢰하던 프로젝트는 패턴을 바꿔버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완전한 편집권을 가진 감독은 거의 없다. 이제는 연출까지도 산업화된 셈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어쩐지 이 변화가 불합리하고 불편한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작자가 감독의 의지를 완전히 배제하고 마음대로 편집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좀더 산업적 관점에서 중도를 맞출 수 있도록 다양한 관점과 의견이 배치된다는 뜻이다. 제작자와 투자사가 중심이 되어버린 현재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혹은 자연스러운 변화다. 따라서 이 사이에서 감독 스스로 자기만의 지혜를 키우는 게 중요하다.
- 오늘날의 극장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 진부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진부할수록 변함없는 명제라 할 수 있다. 다만 단순히 연출자의 시야 확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트레일러를 만드는 사람, 포스터를 디자인하는 사람 등 모두가 관객의 호기심을 일굴 수 있도록 전형성을 타파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나 관객은 새로운 것을 반응하고 지켜볼 준비가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