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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할아버지, 담뱃갑만한 작은 점포에 무표정한 얼굴로 하루종일 앉아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틀니를 물에 헹구고 별것 없는 찬에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침침한 백열등 아래 홀로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공원에서 ‘너무 예쁜’ 할머니를 만난 이후, 그의 삶은 달라진다. 염색을 하고 방청소를 하고 “이름, 표오를∼ 붙여줘어∼” 콧노래도 흥얼거린다. 안 뿌리던 향수도 뿌리고 인사 연습도 한다.할머니는 장구 한대와 조그마한 보따리 하나를 싸들고 할아버지 집으로 온다. 놀러온 것이 아니라 살러 들어온다. 그리고 두 사람은 촛불 두 자루에 술 한잔을 나눠 마시고 환희에 찬 첫날밤을 함께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글을 가르치고,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민요를 가르치고, 가끔은 좁은 골목에서 다정한 키스를 나누고, 더운날엔 ‘다라이’에 마주앉아 함께 목욕을 하고, 그러다 눈빛이 맞닿는 날이면 “넘어가네, 넘어가네…” 살을 섞는다. 사진관에서 웨딩드레스에 양복을 빌려입고 젊은 사람들처럼 폼나게 결혼
<죽어도 좋아>는 어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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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센의 희곡 <유령>의 젊은 화가 오스왈드는 마지막 장면에서, 여인은 물론 어머니와 이미 10년 전에 죽은 아버지 역시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정신병적인 고통에 이렇게 외친다. “어머니… 태양을… 태양을….” 100여년 전의 이 작품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유효한, 우리에게 점차 결핍되어가는 인간관계와 사랑의 소멸에 관한 공포를 이야기한다. 이런 증후는 전염병처럼 도시와 문명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 퍼졌으며, 현재의 문화에서도 많은 부분 입센이 말해왔던 일상의 균열에 관한 영향 아래 놓여 있다. 그러나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는 영향의 반대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생의 열망이다. 이것은 새로움이다. 지금 새로운 한국영화가 한편 완성되었다.이 영화는 70대 노인의 사랑에 관한 영화이다. 얼핏 들으면 진부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70대 노인의 열정적인 삶에 대한 예찬이자 현재의 우리에게 결핍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꽃섬>의 감독 송일곤, <죽어도 좋아>의 경이로운 힘에 감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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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죽어도 좋아>가 일반인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되던 날, 상영관인 모악관에는 칸 비평가주간에 선정된 작품이라는 소식을 들어서인지 해외 게스트들이 유독 많이 몰려들었다. 그중 ‘한국영화통’으로 불리는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상영관 앞자리에 착석해 영화를 관람했고 이 새롭고 진귀한 영화의 출현을 진심으로 반겼다. 그리고 며칠 뒤 서울에서는 프레스용 영문소개자료를 만들기 위한 토니 레인즈와 박진표 감독의 만남이 해외배급과 국내배급을 동시에 진행하게 될 미로비전의 아늑한 응접실에서 마련되었다. “어떻게 보았냐”라는 박진표 감독의 질문에 “좋았으니 여기까지 온 것 아니냐”고 응수하던 토니 레인즈는 <죽어도 좋아>가 자신이 프로그램 어드바이저로 있는 토론토영화제에 초청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으로 첫인사를 대신했다.토니 레인즈 아마도 당신을 외국에 소개하는 첫 자료가 될 테니 영화에 깊숙이 다가가기보다는 꽤나 기본적인 의문을 충족시키는 인터뷰가 될 거예요. 좀
토니 레인즈, <죽어도 좋아>의 박진표를 인터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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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있으면 가끔 가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싶은 영화가 있다. 여기 소개할 감독들은 인디포럼 상영작 중 바로 그런 작품들을 만든 감독들이다. 니체와 메를로 퐁티에게 편지를 보내고 후설의 <시간의식>을 영화화한 <반변증법>과 <시간의식>의 쌍둥이 감독 김곡·김선, 안데르센의 동화를 가지고 엽기 스토리를 꾸며내는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의 원숙현 감독, 그리고 가볍다 못해 경박할 정도로 연애에 관한 상상화를 그려낸 <삼천포 가는 길>의 윤성호 감독. 만나보니 그들은 과연,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괴짜들이었다. 김곡·김선 감독은 기자가 뭐래도 물을라치면 저들끼리 토의를 해댔고, 원숙현 감독은 미인대회 입상경력이 있는 연기전공자였다. 윤성호 감독은 매일 농구하고 술 마시는 게 무료해 재미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원숙현과 윤성호의 작품은 모두 첫 작품이고, 김곡·김선 감독 작품의 경우 실
인디포럼에서 만난 독립영화 감독 3인의 세상보기, 영화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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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어느 날. 화가인 효식은 테이블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서 ‘똑같이’ 그리는 데 몰두해 있다. 생계를 위해 시작한 뮤직비디오 편집 일은 뒷전이다. 마감을 독촉하는 실장의 전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사과를 그리고, 또 그린다. 케이블방송국에서 VJ로 일하는 미나와 통화할 때만 이젤 앞에서 자리를 뜬다. 그런 효식을, 후배 경숙은 짝사랑한다. 비디오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남자를 뿌리치고서 매일 효식의 화실을 찾지만 효식은 그녀를 귀찮아한다.고차방정식김곡, 김선(24)씨가 올해 인디포럼에 내놓은 <반변증법>과 <시간의식>은 실험영화에 가깝다. 내러티브를 갖추고는 있지만, 여러 번 짜깁기해야 이해가 가능할 정도로 복잡하다. 연출을 맡은 이들은 사실 “내러티브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는 것. 가벼운 크로키 정도로 봐달라는 것이다. 이들의 관심은 “철학사가 제기한 화두를
<반변증법>의 김곡, 김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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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비디오를 비디오데크에 밀어 넣은 뒤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눕는다. 곧 모니터 화면에는 <인어공주> 동화의 영상이 흘러나온다. 영화 속 영화인 <인어공주>에서 주인공 인어공주는 인간이 되기 위해 문어에게 몸을 바치고 그물에 걸려들어 쥐에게 하체를 갉아먹혀 사람의 다리를 얻는다. 인어공주가 문어에게 강간당하기 직전, 비디오 보던 여자는 잠시 비디오를 스톱시키고 욕조에 물을 받고 들어간다. 검은 옷을 입은 누군가의 팔이 그녀를 물 속으로 밀어넣자 곧 인어공주가 강간당하는 비디오의 화면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웃나라 공주와 왕자가 결혼을 할 때, 어느새 비디오를 보는 건 여자가 아니라 인어공주 인형이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모호하다. 점점 남성화되어가다 결국 남성의 성기를 달게 된 여자는 영화의 끝에 인어공주 인형을 불태워 죽이고 그 불로 담뱃불을 붙인다. 해피엔드를 보여주지 못한 인어공주를 없앤 뒤, 여자는 다시 처음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안고 분홍색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의 원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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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한번 못해본 한 남자와 한 여자, ‘그들’만의 상상기. 대학생인 ‘구보’는 섹스를 해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 그러나 상황은 절망적이다. 자신에겐 이성친구조차 없다. 고질적인 액취증으로 고민하던 친구 녀석조차 최근에 축농증이 심한 여자친구를 만나 사귀게 되면서 그의 고민은 커져간다. 유일하게 남은 솔로는 재석. 녀석에게 조언을 구할 겸 그를 찾지만, 기회비용을 고려하면 여자친구보다 에로비디오가 훨씬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라는 신조를 갖고 있는 재석은 인터넷에서 이성친구를 다운받는 세상이 오지 않는 한 자신이 이성을 사귀는 상황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고개를 젓는다. 그룹 god의 멤버 윤계상이 이상형인 ‘시목’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 포르노 비디오를 얻어 보게 되고, 지하철 안 화장실 자판기에서 콘돔을 사기도 하지만, 호기심에 대한 갈증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던 차에 초등학교 동창인 구보와 시목은 우연한 만남을 갖게 되고 둘은 예기치 않은 사건을 기대한다.치기발랄“우
<삼천포 가는 길>의 윤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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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어려운 ‘영퀴’ 하나. <나쁜영화> <거짓말> <링> <컷 런스 딥> <텔미썸딩> <반칙왕> <공동경비구역 J.S.A> <해변으로 가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후 아 유?> <복수는 나의 것> <아치와 씨팍>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바리공주>…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정답은, 모두 ‘복숭아’라 불리는 영화음악 공동체에 속한 뮤지션의 음악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삐삐밴드 출신의 강기영, 어어부프로젝트의 장영규, 유앤미블루의 방준석, 도마뱀 출신의 이병훈, 황신혜밴드의 장민승, 이 다섯 명으로 이뤄진 복숭아 구성원들은 그들 자신만큼이나 개성 넘치는 영화의 음악을 만들어왔고, 또 만들 예정이다. 영화음악계에서 꽤나 지명도를 얻어온 이들 다섯이 굳이 하나가 된 사연이 궁금하다. 궁금하니, 떠나보자, 도원(桃
영화음악 공동체 `피치사운드`의 실험적인 인터넷 아지트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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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영일명 달파란. 80년대 후반 국내 헤비메탈의 대표주자였던 시나위, 훵키한 록음악을 들려준 H2O의 베이시스트를 거쳐 95년 삐삐밴드의 <문화혁명>을 이끌었다. 이윤정에서 ‘고구마’ 권병준으로 보컬이 바뀐 삐삐롱스타킹까지, 펑크의 도발적인 에너지와 의도된 농담 같은 가사는 대중음악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DJ 달파란으로 선보인 독집 <휘파람별>은 테크노사운드의 화려한 실험장이었다. 첫 영화음악은 97년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 테크노 리듬과 어어부밴드의 노래를 비롯한 선곡 등 때로 건조하게, 때로 절절하게 내던져진 이들의 삶에 녹아든 음악은 이후 장선우 감독과의 공동작업으로 이어졌다. 테크노와 뽕짝의 흥미로운 조합을 보여준 <거짓말>을 거쳐,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준비중. 차기작은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이며, 권병준과 모조소년이란 팀을 꾸려 새 음반을 선보일 예정이다.장영규어어부프로젝트에서 거의 모
`피치사운드` 맴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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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시간은 네시였고, 우리가 모인 시간은 두시였다. 여름 냄새가 슬슬 풍기는 오후, 한겨레신문사 앞 한 밥집에서 미리 모여 각기 준비한 질문과 자료들을 확인하며 밥을 먹었다. 이름하여 ‘작전회의’였다. 각자 꺼내놓은 질문지, 감독의 필모그래피, <후아유>를 비롯해 참조해야할 영화들에 대한 자료까지. 어쩌면 실탄은 이미 충분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뾰족한 작전은 세우지 못한 채 배만 채우고 인터뷰 장소로 향해야 했다.영상원에서도 특히나 늙은 학생들이 많기로 소문난 영상이론과의 대표선수들이 총출동한 이 인터뷰는 어쩌면, 젊은이들이 바라본 젊은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감독과 제작자에게는 첫 ‘번개’의 배신과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학생 6명의 평균연령은 30살. <후아유>에 대한 소개와 짤막한 감상들을 나누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최호 감독과 심보경 프로듀서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영화를 즐긴 한명의 관객이자 또한 앞으로 영화를 업으로 삼고 싶은
영상원 대학생, 감독·프로듀서와 <후아유>를 논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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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바이준2> 아냐?김화범 심보경 이사는 <접속>의 프로듀서였기 때문에 이 영화를 기획하면서 아무래도 그 연장선상에서 차이점을 고민하셨을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 작가도 <접속>의 작가이고. 아무래도 <접속>과 비슷해질 수밖에 없는데.심보경 <접속> 얘기를 하면 감독님이 좀 싫어하실 거 같은데. 사실은 <접속>과 <후아유>를 생각했을 때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정말 ‘웰-메이드’영화가 어떤 것이냐였어요. 이야기 소재와 그것을 기술적으로 완성하는 측면이 저에게는 가장 컸고 음악이나 비주얼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물론 그걸 감독님이 굉장히 훌륭하게 잘하셨다고 생각해요. <접속>이 현대사회에서 소통되지 않는 현대인의 외로움에 방점을 찍었고 멜로와 사랑이라는 감정이 영화를 관통했다면 <후아유>는 청춘이라든가 정체성 문제에 대한 고민에 방점을 찍고 출발했어요. 그래서 <접속
영상원 대학생, 감독·프로듀서와 <후아유>를 논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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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서/ 심보경1967년생.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광고회사에서 광고기획 일을 했다. 언니(<명필름> 심재명 대표)의 권유로 영화라는 고난의 길로 접어들었다. 93년 <그여자, 그남자>의 홍보, 마케팅을 시작으로 명필름의 기획, 제작 전반적인 과정에 참여했으며 97년 <접속>으로 성공적인 프로듀서 데뷔전을 치름. <공동경비구역 JSA> 프로듀서를 거쳐 2000년 TTL 등의 광고를 제작한 화이트와 손잡고 디엔딩닷컴을 만들어 이사로 취임했다. 디엔딩닷컴의 창립작이자 3번째 프로듀싱작인 <후아유>의 개봉을 앞두고 이 자리에 불려나올 때만 해도 영화를 공부한 젊은 친구들과 좀더 속깊은 대화를 나누겠다고 생각했으나 문 열고 들어오는 순간 ‘학생들이 학생들이 아님’을 알고 조금 놀라다.최호/ 감독1967년생. 계원예고와 중앙대 영화과를 졸업한 뒤 영화집단 ‘장산곶매’에서 활동했고 91년 <닫힌 교문을 열며>를 공동연출했다
참석자들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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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의 꿈을 이루어 드립니다! 한국코닥주식회사와 <씨네21>이 공동 주관한 ‘이스트만 단편영화제작지원제도’가 올해 다섯 번째 지원작들을 발표했다. 선정작은 정서경 감독의 <전기공들>, 홍두현 감독의 <신도시인>, 조미정 감독의 <승부리 사건파일>이다. 올해 응모작은 모두 95편으로 지난해 81편보다 조금 늘었다. 이 가운데 8편이 본심에 올랐다. 당선작 3편 이외에 <엄마, 아름다운 5월>(서원태), <먼곳>(신상순), <별주부전>(조상범), <웃음을 참으면서>(김윤성), <발기부전을 위한 비디오>(신철호)가 막판까지 각축을 벌였다. 올해 심사위원은 오기민(마술피리 대표), 박찬욱(영화감독), 정성일(영화평론가), 김봉석(영화평론가)이 맡았다.
당선작 3편에는 한국코닥이 35mm 필름 1만자(시가 650만원 상당)를 제공하고, 이 필름의 무료 현상 및 인화를 영화진흥위원회, 서울현
제5회 이스트만 단편영화 제작지원작 발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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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다 이상하다, 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다”
정서경(27)씨는 “아직 제대로 영화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서울대 철학과를 4년 다닌 뒤 영상원에 입학, 현재 마지막 학년에 재학중인 그의 필모그래피는 “웬만하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몇편의 비디오영화”가 전부다. <전기공들>은 그가 필름으로 찍는 첫 영화. 필름 포트폴리오를 제출해야 하는 이번 공모에도 촬영스탭이 대신 신청했다. <전기공들> 시나리오는, 그러나 풋내기 작가의 작품 같지 않게 정교하고 매우 창의적이다. 서울대 재학 시절 단대 학생회 문화국장을 지냈던 정서경씨는 웹진 ‘달나라 딸세포’의 편집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당선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나.
=아니, 절대로 아니다. 면접관 4명이 다 이상한 분 같다. (웃음) 나보고 “경험도 없고 영화 찍을 의지도 없는 당신을 어떻게 믿고 필름을 주냐”고 그랬는데 뽑았다. 인기상인 것 같다. 면접 내내 면접관들이 굉장히 즐거워했다. 당선
제5회 이스트만 단편영화 제작지원작 발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