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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의 문이 열리자마자 한국 영화계는 1천만 관객 시대라는 무지개 다리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 다리 너머엔 황금궁전이 없었다. 관객 수, 스크린, 해외판매 등이 꾸준히 늘었고, 3대 영화제에서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했으며, ‘욘사마’를 타고 한국 배우들이 일본에 상륙했지만, 입맛 까다로운 관객을 만족시키는 영화는 점점 줄어들었고, DVD 시장이 무너져내려 부가판권 수익에 대한 기대도 무망해졌으며, 원초적 욕구의 배설처로 관심을 모았던 제한상영관도 전멸했다. 기대와 절망, 상승과 추락, 환호와 야유가 교차했던 한국 영화계의 올 한해 10대 이슈를 뽑아봤다. /편집자
1. CJ의 독주와 극장자본의 힘 증가 - “CJ 독주냐? 3강 체제 구축이냐”
CJ엔터테인먼트가 프리머스를 인수하고 시네마서비스가 주춤거리는 사이 한국영화의 최대 산맥으로 우뚝 섰다. 이와 함께 오리온그룹의 쇼박스가 시네마서비스를 능가하는 성과를 이뤄 기존 CJ-시네마서비스의 2강구도에서 CJ-시네마서비스-
2004년 한국 영화계 10대 이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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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극장용 장편 감독작부터 7분짜리 뮤직비디오까지
1. <마녀배달부 키키>(魔女の宅急便, 1989)
마녀인 엄마와 인간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키키는 13살이 되던 날 완전한 마녀가 되기 위해 바닷가 소도시로 수행을 떠난다. <마녀배달부 키키>는 마녀수련(우편배달부 일)에 돌입한 소녀 키키가 사춘기 소녀로서 당연히 겪을 만한 정체성 혼돈을 겪으면서 하나의 인간(마녀)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가쿠노 에이코의 원작동화를 애니메이션화한 <마녀배달부 키키>는 원래 젊은 지브리 스탭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지던 작품이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까지 맡아 완성하게 되었다(이때 작화감독으로 참여했던 곤도 가쓰야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다시 작화감독을 맡으며 복귀한다). <이웃집 토토로>로 고조되어 있던 지브리의 흥행신화가 폭발하듯 시작된 첫 번째 박스오피스 성공작이었으며(총관객 246만명), 강하고
26개 키워드로 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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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탐색여행, 원정)
미야자키 작품들이 ‘탈일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일본적인 롤 플레잉 게임의 전형(주인공이 길을 떠나 한명한명 새로운 캐릭터들을 만나면서 목적을 향해 여행하거나 모험을 겪는 것)이 드리워져 있다. 이것은 하나의 캐릭터에 집중하기보다는 공동체적인 주인공의 경험을 중시하는 미야자키의 세계관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Retirement(은퇴)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노노케 히메>를 감독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 이야기했고, <센과 치히로…> 역시 미야자키의 은퇴작으로 홍보되었다. 이에 대해 방한한 스즈키 도시오 PD(사진)는 “미야자키 감독은 ‘대체 관객이 얼마나 와줄 것인가’ 하는 기분으로 매 작품이 개봉할 때마다 ‘은퇴할 작정’이라고 말하지만, 손님이 많이 들게 되면 그런 겸허한 기분은 다 사라지고 다시 열심히 다음 작품을 준비하게 된다”고 웃으며 설명했다.
Steam Punk(스
26개 키워드로 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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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SF 화가들의 일러스트레이션. 지브리는 19~20세기 초에 서구인들이 상상했던 비행도구들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는다.
Flight(비행)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에 대한 글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표현은 ‘비행의 쾌감’이다.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날아다니는 날틀과 추락에 대한 두려움 없이 비상하고 하강하는 역동감을 즐기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하야오의 작품들을 대변하는 이미지다. 다만 <센과 치히로…>에서는 <바람계곡의…>나 <천공의…>의 날틀이나 <마녀배달부 키키>의 빗자루 등 인간을 태울 만한 도구없이 용(하쿠)에 의해 비행이 행해지는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변모했고, <하울의…>에서 괴조(怪鳥)로 변신해 날아다니는 하울의 모습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다만 <하울의…>에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않아 매너리즘에 빠진 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천공의…>나 <바람계곡의…>
26개 키워드로 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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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의 9번째 장편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18살 소녀 소피가 황무지 마녀의 저주로 90살 노파로 변하고, 젊은 마법사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청소부로 취직하면서 시작된다. 소피, 마법사 견습생 마르클과 저주에 걸린 허수아비, 불의 악마 캘시퍼로 구성된 대안가족은 괴조(怪鳥)로 변신해 전쟁터에 뛰어들어야 하는 ‘집주인’ 하울의 운명에 얽혀들고, 그 운명론적 모험 속에서 소피는 90살의 지혜를 익히며 성숙해간다. 이것은 언뜻 익숙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험담이다. 하지만 그 모험담은 예전과는 조금 다른 듯도 하다. 주인공들은 이제 종종 변덕을 부리거나 우울해하고, 마법의 힘으로 외모를 바꾸거나 세상을 움직이려 들며, 그들을 품고 가는 이야기는 가끔 엉뚱한 곳으로 새어나가버린 다음 느긋하게 한참을 머물다가 본궤도로 돌아온다.
미야자키는 이제 “살아라!”(<모노노케 히메>)라고 부르짖지도 않고 “네 이름을 소중히 여기며 살라”(<
26개 키워드로 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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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에서 브래드에게 짝을 찾아주기로 약속했었다”
조지 클루니 일당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라 그런지 한결 느슨해진 두 번째 기자회견. 아무래도 화제의 초점은 새로운 커플로 등장한 캐서린 제타 존스와 브래드 피트에게 모아졌고, 영화의 유일한 악당 앤디 가르시아는 다소 의기소침한 모습. 민감한 이슈들과 제작 전반에 관한 질문들을 솜씨 좋게 처리한 프로듀서 제인 와인트롭의 기지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그룹의 유머는 조지 클루니를 따라가지 못했다고 전해야겠다.
-주드 로가 가장 섹시한 남성으로 뽑힌 것에 대해 당신이 상당히 열받았다고 조지 클루니가 말하더라.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브래드 피트 l 뭐 나보다는 맷이 신경을 상당히 썼지. 리스트에 오르려고 뒤에서 물밑 작업도 많이 했고. (웃음) 아마 맷도 내년에는 순위가 좀더 올라가지 않을까. 주드 로야 누가 봐도 멋진 남자다.
-영화 속 연인인 커플 관계를 연기하는 데 특별히 신경쓴 점은 없었나.
브래드 피트 l 기본적으로 대
미리 만난 <오션스 트웰브> [3] - 배우 인터뷰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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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연기라기보다 우리가 놀던 모습 그대로다”
유례없이 200여명의 미국 내 기자들과 해외 기자단이 공동으로 참여한 <오션스 트웰브> 기자회견장은 서로 질세라 경쟁이라도 하는 듯한 배우들의 입담 경연장이었다. 조지 클루니, 맷 데이먼, 돈 치들이 한팀을 이룬 첫 번째 기자회견, 정신없이 오고가는 농담과 진담을 도저히! 다 옮길 수 없음이 유감일 따름이다. 하지만 각종 음향효과 제공까지 서슴지 않은 맷 데이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선은 역시 ‘미스터 오션’, 조지 클루니가 제압했다. 이 모든 판을 짜고 기자회견장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들으면 유감스럽겠지만, 누가 봐도 이건 정말 배우들의 영화다.
-유럽이 라스베이거스보다 더 쿨했나. 하다못해 선글라스나 양복 스타일이라도.
조지 클루니 l 호텔이 쿨했다.
맷 데이먼 l (여전히 이상한 목소리) 감독이 콜하면 우리는 응할 뿐이지.
돈 치들 l 맷 말대로 감독이 톤을 정했다. 대충 안전하게
미리 만난 <오션스 트웰브> [2] - 배우 인터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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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한 도적들이 돌아왔다!
<비포 선라이즈>도 <비포 선셋>으로 돌아오는 세상이지만, <오션스 일레븐>만큼은 <오션스 트웰브>가 되어 돌아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왜냐고? 3년 전 조지 클루니와 일당의 <오션스 일레븐>은 누가 뭐래도 꿈같은 딱 한번의 파티, 일생 단 한번뿐인 한탕과 같은 영화였기 때문이다. 장담하지만 1960년 오리지널 <오션스 일레븐>을 만든 랫 팩 스타들에게 물어도 같은 의견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기어이 한탕을 더 뛰고 말았다. 이유도 더없이 상식적이다. 지난번 훔친 돈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3년 전의 대형사고로 고향에서는 얼굴이 팔려 유럽으로 무대를 옮긴 이들의 두 번째 범죄를 내년 1월7일 국내 개봉에 앞서 팜스프링스 시사회에서 엿보았다. 그리고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 맷 데이먼, 돈 치들, 캐서린 제타 존스, 앤디 가르시아를 만났다. 뻑적지근한 한건 뒤의 뒤풀이가 흔히 그렇듯,
미리 만난 <오션스 트웰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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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매우 사적이고 주관적인 2004 베스트10 / 정성일
<철서구> 왕빙
나의 올해의 영화. 이제 폐광이 된 마을에서도 살아가야 한다. 단 한대의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왕빙은 그들의 삶의 리듬 안으로 들어간다. 9시간에 걸친 (상영)시간의 ‘심금을 울리는’ 영화적 체험.
<열대병> 아핏차풍 위라세타쿤
영화를 반으로 접은 다음 앞과 뒤의 순서를 바꾼다. 거의 젖어들어가는 듯한 숨결로 꿈을 꾸는 정글 속에서의 몽환적 세계. 나는 부산영화제에서 이 영화의 표를 그만 구하지 못했다. 거의 죽어버릴 듯한 심정으로 웹사이트를 뒤지던 나에게 표를 팔겠다고 나선 분께 다시 한번 감사, 꾸벅.
<2046> 왕가위
이 영화가 그저 그렇다고? 천만의 말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아비정전>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중이다.
<카페 뤼미에르> 허우샤오시엔
오즈에게 보내는 허우샤오시엔의 마음의 뜻이 담겨 있는 영화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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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성을 보여주는 디지털 장편의 매력
허문영 l 디지털 장편은 예전에는 이야기 매체로 일정한 결함이 있는 듯했으나 올해는 완결된 구조의 영화들이 나왔다. 그중 <마이 제너레이션> <양아치어조> <신성일의 행방불명>의 세 영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감독이 지닌 영화 매체에 대한 관심과 세계관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양아치어조>는 비교적 관습적인 이야기 방식을 채택하면서도 자기 번민의 감독적 독백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건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신성일…>은 감독의 개성에 걸맞게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고도의 우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전체적으로 디지털 장편에 대한 기대나 호감은 그것이 지닌 물질적 제약 때문에 오히려 주류영화들보다 등장하는 인물도, 공간도 함께 살고 있다는 영화의 동시대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정성일 l 그것과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시실리 2km>의 성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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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영화의 이상한 경향들
정성일 l 다른 해와 달리 올해 이런 이상한 경향, 증후가 있었구나라고 감지한 게 있다면.
김소영 l TV와 영화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일종의 망각술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기 과거를 잊어버리고 과거의 사람을 새로운 정체성으로 만난다. 망각이 역사적으로 비정치화되는 거라고 볼 수 있는데.
허문영 l 상반기 좌담할 때 김소영 선생이 말한 한국영화의 세트에 대한 집착을 그 이후로 유심히 보게 됐다. 이를테면 여름 공포영화 대부분이 세트에서 촬영을 했던데 예컨대 어떤 학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외딴 곳에 세트를 지어놓고 공포를 만든다. <역도산>이나 <바람의 파이터>는 아예 무대를 일본으로 옮긴 경우에 해당하고. 괴담 유행의 시초였던 <여고괴담>은 그래도 의정부의 학교에서 직접 찍었다. 지금은 세트로 도피하거나 아예 무대를 딴 곳으로 옮겨간다. 이는 영화의 때깔을 높이려는 의도와 함께 제작비 규모의 상승과 밀접한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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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혼란스런 작가주의의 좌표
정성일 l 한국영화의 작가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중의적인 의미로 김기덕과 연관지어서 표현하자면 김기덕이 있기 때문에 홍상수가 덜 외롭고 박찬욱이 자기 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이다. 올해 단편영화를 심사하고, 영화아카데미 입학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느낀 건 박찬욱의 영향력이었다. 많은 차세대 영화지망생들이 박찬욱의 자장권 안에서 장면을 카피하고 영감을 받고 있다. 작가주의 담론을 논하기 위해선 임권택, 홍상수, 김기덕 옆에 그를 놓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칸이 주는 상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올드보이>는 공감하기 힘든 영화였다. 그냥 재미있는 상업영화였다. 그것도 많은 결함을 갖고 있는. 그런데 이제 그 영화가 많은 비평담론들에서 예술적으로 나아갈 좌표처럼 이야기되고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영화처럼 이야기될 때 대중성과 B급영화들이 가져야 할 자리와 예술성의 문제가 혼돈스러운 자리로 떨어져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됐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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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영화의 진화를 말한다
정성일 l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산업적으로 대중적으로 가장 기대된 영화가 <역도산>이라면, 올해의 감독은 누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걸로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김소영 l 한국영화에서 여자를 때리는 폭력적 남성은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부분적 현상이었지만, 일관된 주제는 주변화된 남성성이었고 그게 힘없는 아버지로, 또 그를 바라보는 아들로 나타났다. 문제는 주변화된 남성성이 자기 연민과 자기 구원을 위해 여성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게 한국 문화의 장치라는 점이다. 그 정점이 <서편제>였다. 여자의 눈, 딸의 눈을 멀게 하고 거기서 숭고한 아름다움을 끄집어내는 장면이 민족적 미학으로 받아들여지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 생긴 관심이 주변적 남성성이 여성을 학대, 착취하지 않고 어떻게 주체성을 확보해나가느냐였다. 액션영화에 대한 관심도 여기에 있었다. 남성성의 곤경이기도 하고 젠더의 곤경이기도 한 봉쇄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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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지도를 펴 드는 것은 대부분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다. 달리는 속도도 경치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일보다 여행에서 중요하지 않다. 2004년의 대단원을 맞은 <씨네21>도 그런 마음으로 세 편집위원을 한자리에 초대했다. 상반기를 결산하는 좌담 이후 6개월 만의 자리였다. 박스오피스와 국제영화제의 어마어마한 기록들이 부추기는 연말 자축연의 공기는 아랑곳없이, 이날의 주제어는 영화와 작가와 시장이 봉착한 ‘곤경’이었다. 가장 최근에 도착한 한국영화 <역도산>에 대한 소회로부터 거슬러올라간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정성일 영화평론가, 허문영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의 대화를 옮긴다. /편집자
<역도산>: 합작 영화에 대한 우려를 극복하다
정성일 l 가장 최근에 본 영화부터, 그러니까 엊그제 본 <역도산>부터 거꾸로 올라가면서 시작해보는 게 어떨까. 한해 내내 사람들이 기다린 영화이고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