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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9일 전국 예술영화전용관 체인 아트플러스 8개관에서 동시 개봉한 다큐멘터리 <송환>이 17일 서울 중앙시네마에서 재개봉된다.
김동원 감독의 <송환>은 비전향 장기수들이 출감해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과 북한으로 송환되는 과정을 담은 작품. 지난달 29일 종영(목포 제일극장은 이달 13일까지 상영)할 때까지 2만4천여명의 관객을 동원해 다큐멘터리로는 역대 최고의 흥행 성적을 낳았다.
독립영화 전문배급사 인디스토리는 관객들의 추가 상영 요청이 잇따르자 중앙시네마와 협의해 재개봉을 결정했으며 월∼목요일 하루 한 차례씩 상영할 예정이다.
상영시간은 <송환> 공식 홈페이지( www.songhwan.com)나 중앙시네마 홈페이지( www.jacinema.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02)743-6053 (서울=연합뉴스)
다큐멘터리 <송환> 오는 17일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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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칸영화제는 한국영화를 전략적인 주목 대상으로 선택했다.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밍이라는 것이 두루 훑어보는 균형과 집중적인 이슈 만들기를 기본 목표로 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지금 서구인들이 보기에 한국영화만큼 후자의 측면에 잘 부합하는 아이템도 드물 터이다. 좋은 일이다. 영화인들끼리 서로 자신의 일인 양 놀라워하면서 수상의 가능성까지 점쳐보는 한담도 즐거워 보인다. 올해 두명의 취재기자를 칸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던 <씨네21>이 그곳에서 벌어질 풍경들을 다채롭게 보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미리 흐뭇하다.이런 유의 외국 ‘잔치’는 길게 보면 15년 이상, 짧게 보아도 10여년 가까이 축적된 다각도의 노력이 맺어내는 하나의 결실이다. 1980년대의 임권택, 이장호, 박광수, 장선우, 배창호로부터 조심스럽게 명명되기 시작한 ‘한국영화 르네상스’는 그뒤로 단 한번의 심각한 후퇴없이 지그재그로 폭과 깊이를 넓혀왔다. 만약 누군가가 앞으로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 우리 사회가 할
다시 상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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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시절이 수상하면 정치 얘기에 침 튀기다가 피 튀기도록 논쟁을 벌이기가 일쑤다. 그건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정치란 것이 밤을 새서 얘기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관심한 이에게는 저들만의 놀이에 지나지 않을 것인즉, 아까울 정도로 재미있는 일을 인류에게 공평하게 분배하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신 그들에겐 다른 재미를 주지 않았던가. 다수의 애호가들이 모여서 밤을 새워 설왕설래를 해도 지겹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음악, 그중에서도 기타를 꼽을 수 있다. 언제나 무대의 중심에 있으면서 불끈 솟은 기타의 카리스마에 매혹되지 않을 사람은 드물다. 게다가 기타 뒤에는 록이라는 괴물이 버티고 있는 바람에, 이제 막 기타 실기에 입문한 녀석이나 재재발거리며 귀동냥으로 기타리스트의 족보를 꿰는 녀석이나 록의 정신 아래 가슴을 치며 병나발 불며 핏대를 올리는 것이다. 한번쯤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 그 덕에 아티스트 문희준이 엄하게 욕먹긴 하지만.기타에 대해
기타의 카리스마에 매혹되다, <기타닷컴> www.guita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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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드라이빙 액션배급 메가 엔터프라이즈플랫폼 PS2언어 영어 음성/ 한글자막도난신고된 파란색 쿠페가 근처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겉보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두 형사를 태운, 동체 옆의 하얀 줄이 인상적인 1974년형 빨간색 포드 그랜 토리노는 주차구역을 박차고 힘차게 도로로 나선다. 이렇게 해서,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는 베이시티의 수호천사 콤비, 스타스키와 허치의 활약은 이번주에도 어김없이 시작된다.<스타스키 & 허치>는 오언 닐슨과 벤 스틸러가 출연한 리메이크영화가 4월 말 국내 개봉예정인 동명의 70년대 TV시리즈를 소재로 한 게임이다. 출렁거리는 디스코 음악과 전형적인 아메리칸 스타일의 만화 이미지를 활용한 컷신이 70년대의 분위기를 한껏 되살려내는 이 게임은 맵을 확인하며 범죄자를 추격하거나, 보호 대상이 차량을 호위하며 달리는 스타스키의 ‘드라이빙 액션’과, 악당의 차량이나 게임 도중 등장하는 보너스 아이템을 쏘아 포인트를 올리는 허치
영화보다 먼저 만나는 그때 그 2인조, <스타스키 & 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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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포털 사이트의 만화서비스‘다음’(www.daum.net)에서 만화를 서비스한다는 사실을 꽤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들어가보지 않았으면서도 무언가 ‘창작만화’를 서비스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2003년에는 준비한 국제세미나의 웹 캐스팅을 부탁하기도 했다. 당연이 무산되었지만, 나는 그때 왜 무산되었을까 의심하지도 않았고 다음의 만화코너에 들어가볼 생각도 안 했다. 얼마 전, 인터넷 사이트를 서핑하다, 다음에 ‘대한민국 대표 온라인 만화웹진’이 주간지로 창간되어졌다는 게시물을 보고, 다음만화코너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깊은 절망과 충격을 받았다. 다음만화코너는 거의 완벽한 온라인 만화방이었기 때문에. 그곳은 거대한 디지털 인프라를 활용한 만화의 새로운 시도도 없고, 변변한 신인작가의 작품 하나 없고, 제대로 된 저널조차 없는 거대한 만화의 무덤과 같은 만화방이었다. 그 안에는 1970∼80년대의 명랑만화에서부터 시작해, 이른바 만화방 만화라 불리는 대량생산만화에 잡지에 연재되었던
만화방과 만화웹진을 착각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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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순수하게 취향으로만 따져본다면, 약간은 가학/피학적인 데가 있다. 신자들은 그저 마음 평온한 상태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라고 기도하지만 이 영화는 그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를 가능한 한 잔혹하게 재현한다. 그래서 현실은 차라리 하이퍼 리얼이 된다. 일상의 작은 토막을 확대하여 기괴하게 보여줌으로써 일상을 낯설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하이퍼 리얼리즘이던가. 뭐 하러 이렇게 만들었을까. 9·11 이후의 미국인의 심리 속에 들어 있는 어떤 불안감의 발로인가. 아니면 다시 한번 십자군 원정을 떠나야 하는 시기에 나온 일종의 징집나팔인가.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O.S.T를 여는 음악인 <올리브 동산>을 들어보면 뭔가 진군의 북소리 비슷한 것이 연상된다. 이 곡의 시작은 매우 음산하고 암울하다. 밑으로 흐르는 저음의 스트링 위로 약간은 신경증적인 이국적 관악기의 지속음이 올려진다. 예수의 고독과
신경증적인 진군의 북소리,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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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적 열정(primitive passions)? 새로운 기술이 전통문화의 기호를 대체하는 때, 넓게 말하면 역사와 문화의 변혁기에 등장하는 것이 원시적 열정이다. 여기에서 ‘원시적’이라는 말은 어떤 권위를 가진 기원 혹은 낙후된 것을 뜻한다. 이에 따라 원시적 열정이란 잃어버린 순수한 기원 혹은 뒤처진 어떤 것으로서의 원시적인 것을 되찾으려는 열정이다. 서양의 시선은 타자 안에서 낙후성이나 기원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중국 혹은 동아시아에서는 그러한 서양의 원시적 열정을 스스로 내면화하는 과정이 진행되어왔다.레이 초우는 중국영화에서 원시적인 것이 머무르는 장소로 여성, 자연, 어린이에 주목한다. 그리고 1930년대 완령옥 주연의 무성영화에서부터 60년대 문화대혁명기 마오쩌둥과 홍위병의 모습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이미지를 거쳐, 80년대 첸카이거와 장이모 등의 영화를 공동체, 국가, 일, 학습, 사랑, 혁명, 젠더 등과 같은 범주가 뒤섞이는 교차점으로 읽어내려 한다.초우가 책에서 중점
문화번역으로서의 현대 중국영화 읽기, <원시적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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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 <바람의 전설> 을 보고 낡은 몸 담론에 대해 생각하다나는 ‘봄’이 좋다. 봄은 단아하면서도 미세한 서성거림이 있다. 묵은 기운을 흘려보내고 새 기운을 받아들이는 행사를 그렇게 온화하게 치러낼 수 있다니! 그래서인지, 나도 봄바람을 맞으면 겨우내 가시를 돋우었던 마음의 옹이도 새순으로 변한다. 봄은 묵은 시간의 쳇바퀴 속으로 새로움이 회귀하는 소리없는 춤처럼 느껴진다. 말없던 지상의 모든 생명이 일제히 자신의 존재증명을 하는 침묵의 군무. 수다쟁이 인간도 말을 반납하면 저 춤의 대열에 낄 수 있을까? 행여 모를 일이다. 4월에는 시금치처럼 입을 닫고 봄바람에 자빠트려져볼 일이다. 몸이 하는 말이 들릴 때까지 드가처럼, 드가처럼 열심히 춤을 몽상해볼 일이다.언제 처음 춤을 추었는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춤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불온 삐라처럼 드문드문 파편으로 박혀 있을 뿐 온전한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때, 포크댄스라는 걸 전교생이 마당에 모여 했다. 아침 조회 끝
입이 아니라 몸을 해방하라, <바람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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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쥐떼가 나타났댄다. 1980년에는 한국이더니, 이번에는 이라크의 팔루자랜다. 미군 합참의장 리처드 마이어스란 자는 미군이 지난 3월31일 발생한 미국 경호회사 직원 4인의 시신손상사건의 범인 체포를 위해 팔루자에 들어갔지만, “우리가 찾아낸 것은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거대한 쥐떼들의 소굴이었다”라고 말했단다. 1980년 8월, 광주의 학살자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려 할 때, 외국기자들은 주한 미군사령관 위컴에게 한국 사람들이 과연 전두환을 지지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자 위컴은 한국인들은 쥐떼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지 그를 따라갈 것이라면서, 이미 한국인들은 쥐떼처럼 전두환 뒤에 줄을 서고 있다고 말했다. 위컴도 미국에 돌아가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으니, 미군 최고지휘관의 자격 요건에 혹시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쥐떼로 보는 탁월한 감식안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절망감마저 들게 된다. 학살, 그 모진 일은 학살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지
팔루자, 쥐떼, 그리고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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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아름답다’는 표현을 실생활의 대화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정작 일상생활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기 드물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그 표현을 쓸 일이 적어졌기 때문일까. 대체로 우리가 즐겨쓰는 감탄사들은 “멋지다. 끝내준다. 죽인다. 섹시하다. 장난 아니다” 이런 수준인 듯하다. 돌이켜보니 역시 ‘아름답다’라고 말해야 할 경우를 굳이 저렇게 과격하고 거칠게 표현한 적도 없는 것 같다. 이처럼 평소에 아름답다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으니 아주 간혹 만나는 아름다운 자연풍광 앞에서도 결국은 “끝내준다. 죽인다” 따위의 표현이 더 자연스럽게 쓰이곤 하는 것이다.진실로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가 박상륭 선생의 표기에 따르면, ‘아름다움’의 원래 표기는 ‘앓음다움’이다. ‘앓음’이란 알다시피 ‘육체적, 정신적 아픔, 혹은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애쓰는 상태’이다. 그런고로, ‘아름다운 사람’이란 ‘아픔과 고난을 이겨낸 사람답다’는 뜻이 된다. ‘아름다움’의 어원에 대한 다른 주장도 여럿
아름다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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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텁지근한 베이징의 초여름이었지요. 당신을 만난 지도 어느덧 2년이 가까워집니다. 18살 때 주린 배를 움켜쥐고 북한을 탈출했다던 당신도 23살의 청년이 됐겠군요. 그토록 소망하던 한국행을 이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저는 그날 당신의 깡마른 몸과 분노에 찬 눈을 보면서 북한 정권을 결코 용서할 수는 없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키가 채 160cm가 안 되는, 20대 청년은 온몸으로 당신이 살아온 체제를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의 실상을 물을 필요도, 확인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저 당신의 몸이 그 모든 고통을 증거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고도 잊고 살았습니다.얼마 전 봄날의 안온한 저녁에 채널을 돌리다 KBS <수요기획>의 ‘농사짓는 도시, 아바나 이야기’를 보게 됐습니다. 먼 나라 이야기를 보면서 내내 북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동구사회주의가 몰락한 90년대, 당신의 조국과 마찬가지로 쿠바에도 기근이 닥쳤나봅니다. 사탕수수를 팔아서 옥수수를 사던 무역이 끊겼겠지요.
강철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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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호모 사피엔스의 고민은 거기서 끝이 났다고- 내 낡은, 중고생을 위한 영한 대역, <햄릿>의 책장을 덮으며 나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돌이켜보니 나도 그런 엇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설마하니 중고생 때의 일이었고, 무렵의 나는 <중고생>이라는 이름의 부업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였다. 아, 그리운 호모 사피엔스의 시절, 시절들.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고, 지금 나는 아이 팟(i Pod)이라는 이름의 MP3플레이어에 꽂혀 있다. 매우 사고 싶다. 매우, 사고 싶어. 카탈로그의 제품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작살에 꽂힌 생선처럼 마음이 퍼덕, 인다. 오 마마미아. 새하얀, 뉴 모델의 아이 팟이 갖고 싶어, 란 제목의 소설을 쓰거나, 그림이라도 그리고 싶다. 그려야겠다. 목 말라, 숨이, 막혀. 이건 흡사 죽느냐, 사느냐(to buy or not to be)
죽느냐 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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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학장까지 지낸 콜먼(앤서니 홉킨스)의 아킬레스건은 젋은 여자와의 사랑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 “또 만날 수 있을까?”라는 콜먼의 질문에 퍼니아는 “당신이 날 또 만나줄까요?”라고 반문한다. 그에게 이 대답은 기시감을 안겨주며 수십년 전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대학 시절, 애인 스티나를 소개하려던 그에겐 어머니가 그녀를 맘에 들어할 것인가가 아닌, 그녀가 어머니를 받아들일 것인가가 문제였던 것이다. 콜먼 퇴임의 원인이 된 인종차별 발언에 흑인에 대한 그의 편견이 개입되었는가는 중요치 않다. 문제는 자신의 뿌리를 숨기고 살아온 콜먼에게 흑인은 언제나 증오의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학대받는 삶을 살아온 퍼니아와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가진 콜먼은 동반죽음을 맞이하나 학대나 편견이란 단어가 그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원히 해결될 순 없겠지만 감독은 그러한 오점들을 일부러 들춰낸다. 풀 수 없는 문제라고 내버려둘 순 없다면서 말이다. 콜먼에게 어울림직한
두 여인의 은밀한 유혹, <휴먼 스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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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남편과 화목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갑작스레 자살한 경우와 해변에서 선탠하다 눈떠보니 남편이 사라진 경우, 어느 쪽이 더 가슴 아플까? 프랑수아 오종의 <사랑의 추억>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이 던진 질문이다. 고레에다는 <원더풀 라이프>나 <디스턴스>와 같은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죽은 자와의 영매를 시도하고 있기에 <환상의 빛>이 특이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의 추억>은 오종의 필모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그에게 가장의 부재란 후련함을 주는 소재였건만 <사랑의 추억>에서 사라진 남편은 엄청난 무게로 남겨진 아내의 삶을 짓누른다.
남편의 부재란 점에선 같지만 두 남성감독들의 ‘남겨진 여성들’은 전혀 다른 행동을 취한다. 고레에다의 유미코는 간간이 전남편(아사노 타다노부) 생각에 괴로워하지만 재혼하여 새 삶을 살아간다. 남편의 자살 전부터 그녀는 어릴 적 집을 떠난
[DVD vs DVD] <환상의 빛> vs <사랑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