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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똑똑, 똑똑. 한밤중에 술병을 잔뜩 든 치훈(서영주)이 미국 뉴저지의 한 가정집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고 나온 집주인은 치훈의 처남 문석(이순원)이다. 이미 한잔하고 있던 문석은 뜻밖의 술벗을 환대하고 두 남자는 취기에 옛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어릴 적 치훈이 엄마(강애심), 누나(김수진)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와 세탁소를 차린 때부터 강도에게 엄마를 잃기까지의 가족사가 펼쳐지던 중 강도 사건의 내막이 흘러나오면서 이들 사이에 적막이 엄습한다.
올해 상반기 <리바운드>로 극장가에 감동과 희열을 전했던 장항준 감독이 미스터리 스릴러로 돌아왔다. <오픈 더 도어>는 명랑한 창작자의 진지한 영화적 실험의 결과물이다. 71분의 러닝타임을 5개의 챕터로 쪼개 문을 열고 들어간다는 제목의 의미를 형식적으로 강조하고 현재에서 6시간 전,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일그러진 가족의 발원지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스릴러로서 서스펜스를 적절히 구사하지는 못한
[리뷰] ‘오픈 더 도어’, 명랑한 창작자의 진지한 영화적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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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미국 오클라호마주, 아메리카 원주민인 오세이지족의 영토에서 석유가 솟아오른다. 오세이지족은 단번에 세계 제일의 부자 집단이 되지만, 돈이 있는 곳엔 비극도 따르기 마련이다. 1920년대 들어 오세이지족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흑막엔 바로 지역 유지로서 막강한 자본 권력을 쥐고 있는 윌리엄 킹 헤일(로버트 드니로)이 있다. 그리고 그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조카 어니스트 버크하트(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막대한 부를 지닌 오세이지족의 몰리 카일리(릴리 글래드스턴)와 결혼한다. 킹 헤일이 주창하는 가족, 신실함의 가치는 돈과 탐욕으로 검게 물들어 어니스트 부부를 잠식한다.
80대의 감독이 가장 젊은 영화를 내놓았다.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는 지금의 미국, 혹은 전세계가 앓고 있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20세기 초 미국의 실화에서 찾는다. 서부 시대 미국을 참회하며 동시대를 읽는 영화는 많았지만 스코세이지의 강점은 언제나 캐릭터의 직조에 있다. 어니스트는
[리뷰] ‘플라워 킬링 문’, 지구 반대편에서도 묻는다. 지금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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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중의 을 중의 을, 일명 ‘스페어타이어’ 기간제 윤리 교사 소시민(신혜선)은 학교에서 고도의 처세술로 본색을 감추고 있다. 불타는 정의감을 가진 전직 국가대표 복서가 바로 시민이 숨기고 있는 본모습. 하지만 정교사가 되기 위해서 부장 교사 이재경(차청화)의 조언대로 불의를 관망하고 참겠다는 게 시민의 굳건한 다짐이다. 어느 날 학교에서 악마로 불리는 한수강(이준영)이 고진형(박정우)을 괴롭히는 정도가 심상치 않음을 목격한 시민은 결국 수강과 진형 사이에 끼어든다. 진형의 “살려달라”는 솔직한 고백에서 시민의 은밀한 행동이 시작된다. 박진표 감독이 오랜만에 연출한 <용감한 시민>은 학교 폭력을 소재로 한 영화다. 학생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이뤄지는 이유 없는 가해 행위에 분노한 적 있는 관객이라면 가면을 쓴 히어로가 가해 학생을 응징할 때 모종의 희열을 느낄 수도 있다. 다소 민감한 소재와 액션 장르의 만남이라는 점을 옆으로 미뤄둔다면 상업영화로서의 시의성 또한 적절하다.
[리뷰] ‘용감한 시민’, 학교폭력에 어퍼컷을 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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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날 세미(박혜수)는 꿈을 꾼다. 하은(김시은)이 죽어 누워 있는 꿈이다. 얼마 전 자전거에 치여 다리를 다친 하은은 병원에 입원해 있고 수학여행은 포기해야 했다. 꿈 때문에 더욱 불안해진 세미는 하은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하은을 설득해 함께 수학여행을 가려고 들지만, 그 요구에 하은은 세미가 원하는 만큼 호응해주지 않는다. 세미는 자신의 마음이 하은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처받고 결국 두 사람은 다투고 만다.
<너와 나>는 ‘너’와 ‘나’라는 결코 동일할 수 없는 존재들 사이에 놓인 어쩔 수 없는 거리와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에 대한 영화다. 세미가 수학여행을 떠나며 타게 될 배가 세월호라는 암시에서, 영화가 넘어서려는 불가능한 거리는 그와 하은 사이의 것만이 아닌 희생자와 생존자, 그리고 그들과 무관하게 살아갈 사람들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이 그 거리를 무화시킬 수 있다고, 너와 나는 그렇게 같
[리뷰] ‘너와 나’, 결코 동일할 수 없는 존재들 사이에 놓인 어쩔 수 없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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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와 미(티티야 지라폰실프)는 쌍둥이다. 미의 뺨에 난 작은 점이 아니라면 부모도 유와 미를 가끔 헷갈릴 정도로 둘은 닮았다. 유가 수학 낙제 위기에 처하자 유처럼 꾸미고 재시험을 치러 간 미에게 연필을 빌려준 소년 마크(앤서니 뷔서렛)는 점을 화장으로 감춘 미를 유로 여기고 호감을 느낀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두 자매는 엄마를 따라 할머니가 계신 시골로 내려가고, 미는 할머니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유는 태국 전통악기인 핀 연주를 배우러 다닌다. 유는 미와 똑닮은 얼굴을 알아보고 다가온 마크에게 반해버리고 만다.
한 소년에게 반한 두 자매의 여름방학은 밀레니엄을 앞두고 지구종말론이 떠도는 1999년의 여름과 맞물린다. <유앤미앤미>에는 태국 시골의 푸릇하고 시원한 풍경과 여름 축제가 있고, 이제 막 초경을 겪은 소녀들의 풋사랑은 선풍기 바람을 타고 스크린 너머로 전해지는 것만 같다. 잠시도 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유와 미는 마크에게 언제쯤 진실을 전할 수 있을까
[리뷰] ‘유앤미앤미’,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너와 함께 있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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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막바지인 1944년, 핀란드의 라플란드 광야에서 한 남성(요르마 톰밀라)이 핀란드와 나치 독일군의 전쟁을 뒤로한 채 금광 캐기에 열중하고 있다. 상반신이 흉터로 가득한 이 중년 남자의 정체는 퇴각하는 나치 부대와 마주치면서 밝혀진다. 그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핀란드 특수부대 출신 아타미 코피. 죽은 듯 살려 했으나 나치 장교 브루노(악셀 헨니)가 금을 노리자 불멸자라 불리는 이 사나이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불굴의 의지’라는 뜻의 핀란드어를 제목으로 한 <시수>는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처럼 잔인하지만 조용하며, <존 윅>만큼의 킬러 액션을 선보이지만 스타일리시하진 않다. 혼자 살아남은 죗값을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 나가는 것으로 치르려는 한 남자의 황폐한 내면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게 이 영화의 목표다. 미화하지 않겠다는 듯한 사실적인 연출로 묘사된 대결 신과 시종 피 칠갑 상태인 아타미의 얼굴 숏은 어떤 화려한 기술을 펼칠 여력도 세상을 살아갈
[리뷰] ‘시수’, 말이 필요없는 핀란드에서 온 불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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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중인 일본, 11살 소년 마히토(산토키 소마)는 도쿄의 대화재로 엄마를 잃는다. 군수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기무라 다쿠야)는 도쿄를 떠나 시골의 저택으로 이사를 온다. 왜가리 저택으로 불리는 이곳은 전일본과 서양 저택을 섞은 독특한 곳으로 과거 저택의 주인이었던 큰할아버지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이곳에서 마히토의 아버지는 죽은 엄마의 여동생 나츠코(기무라 요시노)와 결혼을 하고 마히토는 복잡한 심경을 숨긴 채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러던 어느 날 왜가리가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마히토 앞에 나타나 엄마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얼마 뒤 새어머니 나츠코가 사라지자 왜가리 남자(스다 마사키)를 의심하고 쫓아간 마히토는 왜가리 남자와 함께 다른 차원으로 끌려들어간다.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뒤섞인 그곳에서 마히토는 저택의 비밀과 세계의 운명을 마주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다시 한번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왔다. 20세기 애니메이션의 정점에 오른 전설이 다시 돌아올 땐 언
[리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내는 삶의, 존재의, 애니메이션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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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영화를 보거나 들으려 하기에 앞서 이해부터 하려고 들 때 생겨나는 오해들이 있다. 이러한 오해들이 예비된 함정에 대하여 누구도(어쩌면 홍상수 그 자신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그리고 여기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지도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홍상수는 그 함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매혹적인 어떤 것으로 뒤바꿔놓는다. <우리의 하루>에서 시인 홍의주(기주봉)가 함께 대화하던 배우 지망생에게 자신이 한 말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이 맞냐며 질문을 되풀이할 때, 이 대사는 술을 마시기도 전부터 부리는 주정이 아니라 그러한 매혹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여기 두개의 하루가 있다. 하나는 시인 홍의주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배우 상원(김민희)의 것이다. 혼자 사는 홍의주는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그들과 대화를 하고 함께 술을 마신다. 낯선 사람과 잠시 함께 살게 된 상원은 또 다른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역시
[리뷰] ‘우리의 하루’, 영화에 담긴 적어도 네 개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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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어휘를 경계하고, 진심이 아닌 걸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이들은 자주 세계와 대치하기 마련이다. 김보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두 사람을 위한 식탁>에는 그런 인물이 두명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녀 사이다. 둘은 세상과 싸우는 동시에 그 고통의 현장을 보이느라 서로에게도 많은 상처를 입혔다. 영화는 젊은 여성인 채영이 일대일 상담에 참여하는 걸 보여주며 시작한다. “내가 잘했어”라는 말을 하라고 요청받지만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그는 이 상황이 불편해 보인다. 대신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의 사이사이, 내레이션과 그림일기 장면을 통해 그는 10대 때부터 겪었던 자신의 내밀한 욕구와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나간다. 채영은 15살, 극단적인 식사 거부로 섭식장애 진단을 받고 병동에 입원했다. 거식증 치료를 받고 퇴원하자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곧 폭식증이 시작되었다. 음식을 두고 벌어지는 채영의 불안정한 나날들을 지켜보며 엄마인 상옥 또한
[리뷰]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애증의 관계에서 피어오르는 기이한 연대와 불화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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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서의 한글 창제를 기념하는 한글날이 언어로서의 한국어를 기리는 날처럼 혼동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의 우수성을 따지는 건 괜찮다. 그걸 지나 한국어의 우월함을 이야기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물론 한국어로 표현된 고유의 정서와 사상이 아름다울 수는 있고, 그것은 오로지 한국어로서 접근될 때에만 그 온전한 맛을 누릴 수 있다고 역설하는 건 옳다. 한국어에 잘 밀착된 한글은 그것의 문자적 표현과 접근을 더 용이하고 효과적이게 해줌을 환기시키는 일 역시 필요하다. 따라서 한글은 바로 우리말글 환경이 처한 현실의 제유(提喩)이며, 한글날을 계기로 그 현실에 대한 성찰을 북돋으려는 취지라 이해해줄 법도 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렇게 의식적으로 대유법적인 고찰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면에서 보면 한국 어문의 현실은 나날이 비루해지고 있다. 구매자는 물론 판매자조차 잘 모르는 외국어 문자로 메뉴판이나 간판 등속을 쓰기 시작한 지는 한참 됐다.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언론이라는 어불성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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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거미집>에서 김열 감독(송강호)이 집착해 마지않았던 플랑 세캉스(시퀀스 숏)는 이충현 감독의 시작이었다. 데뷔작 단편 <몸 값>을 향한 찬사와 환호는 14분 분량의 러닝타임이 전부 플랑 세캉스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비롯한다는 데 이견이 많지 않을 것이다. 원조 교제 현장이 실은 장기 매매 장소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끝나는 영화에서 플랑 세캉스가 주는 마법은 리얼리즘에 있다. 하나는 사건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실시간의 리얼리즘, 다른 하나는 소품이나 배경, 인물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느끼게끔 하는 현장감의 리얼리즘, 또 관객이 범죄 서사를 허구가 아닌 현실로 수용하게 하는 내러티브의 리얼리즘이 그것이다.
여기에 더해 <몸 값>은 하나의 숏-시퀀스가 전체 작품 속 복수의 시퀀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작품으로 독립한 ‘몽타주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는 점을 곱씹을 만하다. 물론 ‘몽타주 없는 영화’라는 말은 하나의 시
[비평] 몽타주 없는 몽타주, ‘발레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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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과 <거미집>은 올해 칸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한국영화이자, 장르영화다. <화란>은 누아르이자 성장영화이고, <거미집>은 코미디이자 영화에 관한 영화다. 애석하게도 둘은 (다른 많은 개봉작이 그랬듯) 기대보다 낮은 관객수를 기록하는 중이다. 비슷한 시기에 공개되었다는 점 외에 별다른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두 영화는 편집에 관한 인식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통한다. <거미집>은 극 중 ‘플랑 세캉스’라는 편집 용어를 이례적으로 자주 언급한다. 김지운 감독은 이를 두고 일종의 맥거핀이라고 언급한 바 있으나, <거미집>에서 일어나는 일 중 어떤 것도 중심의 자리에 놓을 수 없으므로 부차적 요소로 치부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거미집>은 맥거핀을 모아 생성한 거대한 집과도 같기 때문이다. <화란>에는 시퀀스를 마무리하는 편집점이 너무 빠르거나 느슨한 순간이 있다. 어떤 시퀀스는 인물의 대사가
[비평] 지루함 혹은 지연에 관한 옹호와 의심, ‘거미집’과 ‘화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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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엔 발목에 검은 별이 그려진 금색 양말을 신었다. 내 양말 서랍에서 가장 무난한 디자인이었다. 반짝이, 땡땡이, 형광, 야광, 레이스…. 서랍 속을 한참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7년 전 어느 날이 떠올랐다. 친구 S는 밥을 먹다 말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가 검정색 옷만 입는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공포일 수도 있어.” K도 옆에서 거들었다. “어떨 땐 너가 사람이 아니라 그림자 같기도 해.” 어떻게 사람에게 그림자라는 그런 심한 말을…. 나는 말문이 막혀서 대꾸할 수 없었다. 가게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그날따라 더 그림자 같았기 때문에….
친구들의 충고는 일리가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검은 옷만 입던 내가 갑자기 무지개색 티셔츠를 입고 나타난다면 그들은 그 모습에 더 커다란 공포를 느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검정 옷을 고수하면서도 나의 내면에 자리한 사랑스러움, 귀여움, 순수함을 은은하게 드러낼 방법은 없을까? 액세서리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오직 하나뿐인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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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을 보러 자주 오던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하 BIAF)에 내 작품이 초청돼서 정말 기쁘다.” 전다현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안녕, 우주>는 집을 떠나는 우주와 그를 배웅하러 나온 명경이 기차역에서 기차가 오길 기다리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승강장에서 잠시 잠든 명경의 꿈속에선 우주와 함께한 시간이 환상처럼 펼쳐진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만화가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전다현 감독은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를 졸업한 뒤 애니메이션 제작사 레드독컬처하우스에 입사해 자신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끊임없이 차기작을 구상 중이던 전다현 감독에게 대화를 청했다.
- 모녀 관계를 독특하게 묘사했다.
= 엄마의 말에서 시작된 연출이다. 집에 나를 포함해 총 4명의 자매가 있다. 어느 날 딸들이 장성해 집을 떠나기 시작하니 엄마가 적적하다고 느끼셨나보다. 내가 쌍둥이인데, 또 다른 쌍둥이 자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더라. 우리가 어릴 때 엄마에게 고민 상담
#BIAF 3호 [인터뷰] ‘안녕, 우주’ 전다현 감독, “엄마의 삶에 응원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