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어려운 ‘영퀴’ 하나. <나쁜영화> <거짓말> <링> <컷 런스 딥> <텔미썸딩> <반칙왕> <공동경비구역 J.S.A> <해변으로 가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후 아 유?> <복수는 나의 것> <아치와 씨팍>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바리공주>…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정답은, 모두 ‘복숭아’라 불리는 영화음악 공동체에 속한 뮤지션의 음악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삐삐밴드 출신의 강기영, 어어부프로젝트의 장영규, 유앤미블루의 방준석, 도마뱀 출신의 이병훈, 황신혜밴드의 장민승, 이 다섯 명으로 이뤄진 복숭아 구성원들은 그들 자신만큼이나 개성 넘치는 영화의 음악을 만들어왔고, 또 만들 예정이다. 영화음악계에서 꽤나 지명도를 얻어온 이들 다섯이 굳이 하나가 된 사연이 궁금하다. 궁금하니, 떠나보자, 도원(桃園)으로. 편집자
복숭아? 탐스러운 분홍빛에 향긋한 단내가 도는 과일이 먼저 떠오르겠지만, 아니다. 여기에 내놓는 복숭아는 일명 ‘피치사운드’(peachsound.co.kr)란 이름으로 인터넷에 아지트를 꾸린 영화음악 공동체. 좀 더 헷갈리게 말하면, ‘복숭아’는 영화음악 뿐 아니라 개성있는 음악세계로 널리 알려진 음악인 다섯명의 공동체인 동시에, 영화음악을 생산하는 공장이기도 하며, 영화음악 전문 레이블이기도 하다. 어쩌면, 복숭아는 영화음악을 ‘없으면 심심한’ 요소 정도로 생각하거나, 영화음악가를 ‘홍어X’ 쯤으로 여기는 제작자들에겐 압력단체일 수도 있으며,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제작자에겐 저보수로도 완성도 있는 음악을 제공하는 행복한 파트너일 수도 있다.
이 수수께끼같은 솜털로 뒤덮여있는 복숭아의 그 말랑한 속살을 들춰보면, DJ ‘달파란’으로 알려진 강기영, 어어부프로젝트의 장영규, 막 <후아유>의 음악 작업을 마친 방준석, 가요 작곡가 겸 프로듀서로 활동해온 이병훈 등 4명의 뮤지션과 이들과 세상의 가교 역할에 나선 장선우 감독의 아들 장민승의 얼굴이 보인다. 대중음악에 먼저 적을 뒀던 이들은, 그동안 제각각 영화와 음악의 색다른 만남을 궁리하며 즐거운 실험을 벌여왔다. 그리고 지난 3월, 그 실험을 한 단계 발전시키기 위해 한데 뭉쳤다.
새삼 복숭아란 명패를 내건 것은 최근이지만, 사실 이들이 어울리게 된 것은 오래된 일이다. 의도적인 가벼움과 키치, 펑크의 유희로 기성 질서를 도발했던 삐삐밴드와 삐삐롱스타킹의 강기영, 80년대 신서팝과 뉴웨이브에서 자양분을 구했던 도마뱀의 장영규와 이병훈, 몽환적이면서도 세련된 서정의 모던록을 들려준 유앤미블루의 방준석. 음악적 개성은 제각각 달랐으나 동시대 음악에 새로운 자극을 제공해온 이들은 “자연스럽게” 만났다. 댄스가요와 발라드가 주류를 이룬 대중음악의 궤도를 벗어난 모험(?)지대는, 다수가 찾는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취향의 차이만큼이나 다른 음악적 개성
96년 즈음 이들은 송스튜디오에서 한솥밥을 먹는 식구들이기도 했다. 송스튜디오는 ‘사랑과 평화’의 베이스주자를 거쳐 많은 음반에서 유능한 세션 및 프로듀서로 활동했던 송홍섭의 기획사. 삐삐롱스타킹, 유앤미블루, 도마뱀에 이어 어어부프로젝트까지 당시 대중음악의 틈새에서 낯선 장르와 어법을 시도하는 뮤지션들이 둥지를 튼 곳이었다. 같은 사무실을 오가며 얼굴을 익힌 이들은 “오랫동안 서로의 작업을 지켜봐왔고”, 때로 “악기를 빌려주는” 것부터 음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친분을 다져왔다. 방준석씨가 97년에 나온 어어부밴드의 1집 <손익분기점>의 녹음을 제외한 공연이나 음반에서 꾸준히 기타 세션을 맡고, 강기영씨가 <나쁜 영화>에 어어부밴드의 <아름다운 “세상에” 어느 가족 줄거리>를 골라넣을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음악에 대한 이해가 전제된 덕분이기도 하다.
국내는 물론 해외 영화음악의 토양에서도 보기 드문 뮤지션들의 도원결의(?)를 궁금해하며 이들을 찾아간 곳은 홍익대 전철역 부근의 공스튜디오. 어어부프로젝트, 타악그룹 푸리 등을 비롯한 몇몇 음악팀이 음반 작업을 하는 곳이다. “얘기는 오래 전부터 나왔다. 2년도 더 된 것 같은데.” 방준석씨에 따르면, 영화음악 공동체에 대한 구상은 장영규씨와 종종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누곤 했던 얘기에서 출발했다. 어어부프로젝트의 음반 및 공연에서 함께 연주도 하고, 각각 <텔미썸딩>과 <반칙왕>으로 영화음악에 좀더 본격적으로 다가설 무렵부터 공동작업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 “모여서 돈을 좀더 벌어보자”며 장난스럽게 밝히는 저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각자 다른 음악의 역할과 스타일로” 영화에서 뭉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어부의 음반이나 <반칙왕> <복수는 나의 것> 등에서 다양한 건반악기를 연주해주곤 했던 오랜 동료 이병훈도, <나쁜 영화>와 <거짓말>의 영화음악을 거쳐온 강기영도 그런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를 통해 강기영씨와 안면을 틔우고, 황신혜밴드 2집에서 베이스를 치며 “형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장민승씨는, “젊으니까 발로 뛰겠다”며 기꺼이 녹록지 않은 매니지먼트 업무를 자처했다.
이제야 밝히자면 복숭아란 이름에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가을경 이병훈씨의 생일날 여느 때처럼 모여서 술을 마시다가 복숭아에 대한 논쟁 아닌 논쟁을 벌인 것이 계기라면 계기. 복숭아 알레르기를 필두로 “털 때문에 징그럽다”, “예쁘게 생기지 않았냐” 등등 복숭아에 제각각 다른 토를 달던 이들은, ‘복숭아’를 간판으로 삼는 데 의기투합해버렸다. 복숭아를 둘러싼 취향의 차이만큼이나 다른 음악적 개성을 담보로, 행복한 시너지를 기대하면서.
다양한 음악을 한 영화 속에
이들이 기대하는 시너지, 즉 ‘복숭아 효과’는 여러 가지다. 우선, 가장 원초적인 욕구인 외로움을 달래는 것. 밴드 활동과 달리 영화음악이란 것은 궁극적으로 해당 음악을 작곡하는 개인 혼자 짊어져야 하는 일이다 보니, 고독감이 밀려오게 마련이다. 이들이 서로에게 바라는 동업자이자 파트너이자 친구라는 관계는 복숭아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스타일의 음악으로 가는 영화도 있는 반면, 여러 스타일을 원하는 영화도 있다. 각자 다른 색깔을 갖고 있으니 서로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다”는 강기영씨의 이야기처럼, 다양한 음악을 한 영화 속에 담아낼 수 있다는 점도 복숭아의 장점이다.
하지만 이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시너지 효과는 무엇보다 좋은 영화음악을 만들 수 있는 단단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음악에 대한 기본 개념이 세워진 제작자가 드물다”는 강기영씨에 따르면, 영화 제작자들은 음악의 컨셉이 영화와 조화를 이루는지, 영화와 음악이 추구하는 방향이 일치하는지 등 보다는 음악에 드는 비용에 더 큰 관심을 둔다. 보통 한국영화에서 음악에 할당되는 예산은 개런티를 포함해 2천만∼4천만원선.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음악가로 <무사>에서 1억원 상당의 개런티와 제작비를 따로 받았다는 사기스 시로 같은 예외도 있지만, 말 그대로 예외일 뿐이다. 영화에 걸맞은 음악을 고민하면서 악기나 사운드 실험에 좀 욕심을 낼라치면, 개런티는커녕 영화음악을 만드는 과정에 예산을 다 소요하기 십상이란 얘기다. 방준석씨는 “영화 여러 편을 막무가내로 맡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안다. 결국 감당을 못하니까 후배나 제자에게 맡겨 찍어내는 식으로 처리한다더라”고 말한다.
결국 “그런 식으로는 일하기 싫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이들이다 보니, 복숭아라는 집단을 통해 이러한 환경을 바꿔나가려는 것이다. 다섯명이 하나의 이름으로 존립하게 되면, 일손이 달려 원하는 작품을 놓치게 되거나, 원치 않는 작품을 억지로 떠맡는 일이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자신들의 음악성격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거나 호흡이 잘 맞는 제작자가 참여하는 작품이 있는데도 기존 작업 때문에 감히 맡지 못한다면, 복숭아의 이름으로 받아들여 공동으로 작업하면 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작품이 쌓이다 보면, 생계를 핑계로 내키지 않는 작업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
이 과정에서, 마음이 맞는 제작자들과 함께 제작비용 합리화와 영화음악의 중요성 등을 논의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계획이다. 특히 O.S.T가 음반시장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미국의 경우에서처럼, 영화음악에 투자하는 것은 결코 손해보는 일이 아님을 설득할 생각이다. 복숭아가 자체 레이블을 만들려는 것도 O.S.T의 질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한 것. 이쯤되면 “복숭아는 공장은 공장인데 질 좋은 물건을 만드는 공장”이라는 이들의 말이 자연스레 이해된다. 물론 제작비 합리화가 음악에 드는 비용의 인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편영화나 개인 작품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강기영씨의 이야기처럼 만드는 이와 마음만 맞는다면, 그 프로젝트의 규모에 상응하는 비용을 쓰고 받겠다는 이야기다.
단편과 장편, 저예산영화와 블록버스터, 혹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느낌이 통하는 작품을 하겠다는 복숭아팀의 시간표에는 당장 4편의 영화가 대기중이다. 강기영씨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과 <아치와 씨팍>, 장영규씨의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외에 애니메이션 <바리공주>가 확정된 작품들이고, 신인 감독들의 영화가 몇편 물망에 올라 있다. 또 장민승씨는 <성냥팔이…>와 <아치와 씨팍>에서 선곡 디렉터를 맡았다.
공동작업실은 없다. 인터넷에서 뭉친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 ‘뭉쳤다’는 이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그 흔적은 없다. 사무실이나 공동작업실도 없다. 오로지 복숭아의 존재를 증거할 수 있는 곳은 인터넷 상 뿐이다. “각자 홈스튜디오에서 작업한 것을 파일로 서로 공유해 듣고 온라인으로 대화하면 된다”는 장민승씨는 오히려 이 같은 점이 복숭아의 장점이라고 설명한다. 팀원들이 홈스튜디오를 비롯한 작업 시스템과 설비를 갖추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저가에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고 귀띔한다. 사무실과 스튜디오를 차려놓고 이를 유지하고자 허둥대기보다는, 각자의 작업실을 활용하고 온라인상에 마련한 복숭아의 공간을 통해 공유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복숭아는 서로 뭉쳐다니기 보다는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면서도 협력 생활을 하는 고양이들 같은 인상을 풍긴다.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것처럼 개인 작업을 하다가 이런 식으로 관계를 맺고 만나는 것, 좋아요.” 강기영씨의 말에 방준석씨도 한마디 한다. “음악을 계속 해왔던 사람들이고, 서로의 공간을 배려할 줄 아는 것 같아요.”
최대한 개인의 공간을 배려하면서도 협동을 꾀하는 복숭아의 성격은 작업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놓고 전원이 공동작업을 할 수도 있고, 일부만 공동작업을 할 수도 있으며, 아예 각자가 중심이 돼 다른 이들의 힘을 빌어 쓰는 열린 시스템으로 꾸려갈 계획이니까. 이를테면 복숭아의 첫 작품인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에서는 강기영씨가 작곡을 전담하고, 장민승씨가 선곡 및 판권 섭외를 맡았다. “각자가 가져가고 싶은 색깔, 원하는 작품 위주로” 끌어간다는 게 기본적인 구상이다.
딱히 기업의 논리도, 자본의 논리도 아닌 예술가들의 공동체로 출발해 영화와 음악, 미술 등에 걸쳐 세계적인 문화집단으로 성장한 영국의 ‘토마토’처럼, 영화와 음악이 맺어준 복숭아의 자유분방한 조합이 어떤 돌파력을 지닐지 슬쩍 궁금해진다. 적어도 이들의 유희는, 늘 재미있었으니까. 글 황혜림 blauex@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영화음악 공동체 `피치사운드`의 실험적인 인터넷 아지트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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