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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강한섭 영화평론가(1958~2021), 영화와 함께한 삶에 작별을 고하다
김성훈 사진 씨네21 사진팀 2021-12-17

논쟁만큼이나 논란이 많은 삶이었다. 4기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위원장이었던 강한섭 서울예술대학교(이하 서울예대) 교수가 지난 12월10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살.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경희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재학 시절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에서 영화를 감상하며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1979년 전양준, 정성일, 신철 등 평론가, 영화인과 함께 동서영화연구회에서 활동했고, 비평지 <프레임>의 동인으로 참여해 영화 비평을 주도적으로 했다. 서강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프랑스 파리 제2대학교 대학원에 유학한 뒤 영화평론가로 활동했다.

1994년 서울예대 영화과 교수가 됐고, 1999년 출범한 영상물등급위원회에 위원으로 선임돼 10년 동안 활동했으며, 2008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돼 1년2개월간 재임했다. 하지만 기획재정부의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최하위 등급을 받으면서 임기 23개월을 남기고 중도 사퇴했다. 이후 서울예대 영화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영화평론가로서 그는 새로운 영화를 발견하고 논쟁적인 비평을 주저하지 않았다. 유지나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는 “영화 텍스트나 감독론 같은 평론 활동뿐만 아니라 1990년대 중반부터 고도 성장하는 한국 영화산업의 시스템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와 관련한 담론을 주도했던 평론가”였다고 그를 떠올렸다. 데뷔작 <개그맨>(1989)으로 감독과 평론가로 인연을 맺은 이명세 감독은 “<개그맨>이 개봉 당시 형식적으로 굉장히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했던 작품인데 강한섭 평론가가 그러한 시도를 발견하고 인정해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라고 말했다. 당시 강한섭 평론가는 1989년 한국영화 베스트로 <개그맨>을 선정하면서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독립영화를 시작하면서 독립영화의 가능성을 모두 실천해버렸고, 이명세의 <개그맨>은 충무로 영화의 70년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변경을 제시했다. 이 두 천재가 걸어갈 90년대의 10년이 한국영화를 결정할 것”이라고 지지한 바 있다.

영진위 위원장으로 임명되기 전부터 그는 늘 한국영화 정책 비판의 선두에 있었다. 산업이 성장하지 않았는데 영화인들이 일찍 샴페인을 터트렸고, 책임지지 못할 머니게임을 벌였으니 한국 영화산업을 ‘대공황’ 상태로 만든 이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어떤 면에서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으나, 1980~90년대 영화문화운동을 활발하게 주도했던 평론가로서의 삶과 달리 영진위 위원장으로서는 산업의 조타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싸늘한 평가가 앞선다. MB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강한섭 전 위원장이 임명됐던 2008년은 급성장한 한국 영화산업의 거품이 일제히 빠지면서 역대 최저 수익률인 -49.5%를 기록했던 해다. 한국영화 위기론이 대두되던 산업적 상황에서 그는 전임 위원회에 대해 색깔론을 제기하고, 영진위 사업과 정책에 대한 신중치 못한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으며 영진위 노조와 첨예한 갈등을 빚었고, 그로 인해 쓸쓸하게 물러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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