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눈빛이 흔들린다. 악당이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 양조위가 연기한 웬우라는 인물은 수천 년 동안 텐 링즈의 힘을 빌어 영생을 누리며 살아왔다. 영화의 평가와는 별개로 많은 관객이 양조위의 그윽하고 불안한 눈빛에 설득당하는 중이다. 양조위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입성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을 방문했던 그의 발자취를 다시 한번 되돌아봤다. 지금과 같은 판데믹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그는 분명 한국을 찾았을 것이다.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날 그 날을 기약하며, 90년대 후반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양조위가 한국 관객을 찾았던 시기의 기록을 한자리에 모았다.
1997년 씨네21 124호 표지에 첫 등장하다
양조위는 1997년 10월 10일, <해피투게더>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심의 때문에 일반 상영은 불발되어 관객들은 영화를 볼 수 없었다. 그는 사흘 간의 내한 일정을 소화하며 씨네21과 단독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1991년 <첩혈가두> 개봉 내한 후 7년 만의 한국 방문이었다. 홍콩 반환 직후의 시기여서 “내가 나고 자란 홍콩이 이젠 더 이상 지금같지 않고 변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슬프다는 심경을 전하기도 했다. “홍콩 TVB 방송국에서 운영하는 연기학원에 1년 정도 다니다가 우연히 TV 시리즈에 출연”하게 되면서 데뷔하게 된 사연을 소개했고, 왕가위 감독에 대해서는 “어떤 작품인지 말 안해도 출연할 수 있을 만큼 서로 믿고 느낌이 비슷”한 사이라고 말했다. “한 번도 시나리오를 미리 준 적 없고 얘기도 안 해” 주지만 “매번 새로운 걸 느끼고 경험하게” 해준다며 “그 과정 자체가 굉장히 즐겁다”는 말도 덧붙였다.
1998년 8월 <해피투게더> 개봉
왕가위 감독이 재편집한 95분 버전의 <해피투게더>가 국내 개봉하면서 왕가위 감독과 양조위 배우는 1998년 8월 20일, 리츠칼튼호텔에서 내한 행사를 갖고 관객과 만났다. 비행기가 연착되어 밤늦게 현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이날 수재의연금 마련을 위한 자선경매행사도 열어 양조위의 겉옷 등을 팔아 371만원의 수익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왕가위 감독은 <해피투게더>의 양조위에 대해 “카메라 앞에서 비상식적인 것을 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 그는 섬세하고 매우 집중력 있는 배우다. 난 그에게 변화를 주고 싶었고, 그의 균형을 깨뜨리고 싶었다. 그에게서 다른 악센트를 끌어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2000년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양조위가 <화양연화>로 칸국제영화제에서 홍콩배우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던 때의 모습이다. 당시 칸국제영화제와 <화양연화>의 관계란, 극중 주모운(양조위)과 수리진(장만옥)의 관계만큼이나 복잡했다. 애초 4막으로 구성된 대서사시를 그리려던 왕가위 감독의 의도와 달리, 칸영화제 측에서 촬영도 덜 끝난 60분짜리 편집본만 보고서 경쟁 부문 진출을 확정해 버린 것. 왕가위 감독은 출품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 전체 4막 중 2막에 해당하는 스토리만 가지고 결말도 바꿔 찍고 처음 의도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의 <화양연화>다.
2000년 10월 <화양연화> 부산국제영화제 초청
양조위는 장만옥과 함께 <화양연화>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을 때에도 씨네21을 찾았다. 사실 두 사람은 이 작품에서 처음 연기를 한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이미 1984년 TVB 드라마 <신찰사형>(新紮師兄)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바 있다. <화양연화>는 1960년대 홍콩의 향수가 묻어나는, 회환과 불안이 뒤섞인 어느 남녀(정확히는 불륜을 저지른 두 사람의 남편과 아내)의 세계를 통해 식민지 시대 이후의 홍콩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2003년 1월 <영웅> 개봉
2003년 1월 14일, <영웅>의 시사회가 열리던 날, 양조위는 중앙시네마 한 켠에서 씨네21과 화보 촬영을 진행했다. 이때도 그는 함께 출연한 장만옥과 함께 했다. 당시 양조위와의 인터뷰를 독점하다시피했던 황혜림 기자는 <화양연화> 내한 이후 몇 년 만에 만난 그를 두고, “상영관 옆의 열린 공간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자세를 잡는 틈틈이 쑥스럽게 웃는 표정, 광둥어의 성조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나지막한 음색과 조용조용한 말투, 질문에 답하기 위해 양미간과 눈에 살짝 주름을 잡으며 찰나의 생각에 잠기곤 하는 버릇까지도, 여전해 보였다.”라고 썼다. 기사를 찾아보니 양조위는 <무간도>의 홍보를 위해 2월 11일, 유덕화와 함께 다시 당일치기로 한국을 찾았다. 지금처럼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급성호흡기증후군(SAS)와 장국영과의 이별로 영화 팬들에겐 뒤숭숭했던 시기였다.
2004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 오픈토크
양조위는 200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당시 개막식 사회를 맡기도 했던 배우 이영애와 함께 오픈토크 행사에 참석했다. 10월 8일, 장소는 파라다이스호텔이었다. 양조위의 세 번째 부산 방문이었다. 당시 양조위는 기자회견장에서 “같이 연기하고 싶은 한국 여배우가 있느냐”는 가십성 질문에 “<2046>처럼 매력적인 한국 여배우들 모두와 연기할 수 있는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능수능란한 응수로 폭소를 이끌어냈다고 한다. 또한, 오픈토크 행사장에서는 표정 하나로 사랑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대단하다는 사회장의 칭찬에 대해 “사실 사랑에 관해 비관적인 편이다. 사랑은 김치 같다. 처음엔 맛이 강하지만 나중에는 담담해진다. 계속 먹다 보면 내가 이걸 좋아서 먹는지 습관으로 먹는지 모르게 된다.”라는 답변을 들려주기도 했다.
출처를 찾을 수 없는, 씨네21 데이터베이스 서버에 있던 그의 프로필 사진이다.
출처를 찾을 수 없는, 씨네21 데이터베이스 서버에 있던 그의 프로필 사진이다.
2004년 10월 27일, <서울공략> 촬영
부산영화제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번에는 <서울공략>의 서울 로케이션 촬영을 위해서였다. <동경공략>의 속편이었던 <서울공략>은 서울을 배경으로 한국의 범죄조직이 강탈한 위조지폐 원판을 찾기 위해 홍콩 국제경찰 임귀인(양조위)과 CIA 요원 오웬(임현제)이 활약하는 액션영화다.
2008년 6월 <적벽대전> 개봉
양조위는 오우삼 감독, 금성무, 장첸, 린즈링 등의 배우들과 함께 한국을 다시 찾았다. 그는 당시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연기한 주유에 대해 “도덕률과 같은 어떤 규칙에 구속되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아주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인물을 연기하면 얼마나 짜릿할까, 얼마나 흥분될까 싶었다. 내가 보기에 주유는 매우 완벽한 사람, 정면의 얼굴만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라는 해석을 들려주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해피투게더> 때 함께 했던 장첸과 10여년만에 다시 한 작품에서 만났다. <중경삼림>에서 (함께 출연한 장면은 없지만) 연기했던 금성무와는 <상성: 상처받은 도시> 이후 <적벽대전>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내한 행사를 다녀간 이후, 7월에 동료 배우 유가령과 결혼했다.
2013년 6월 <일대종사> 개봉
씨네21 919호 표지에 등장한 <일대종사>의 양조위와 장쯔이.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 양조위가 연기한 웬 우가 펼치는 액션을 보면, 가장 먼저 그의 ‘액션’ 최신작이었던 <일대종사>의 엽문을 떠올릴 수 있겠다. 양조위와 왕가위 감독이 해석한 엽문은 엽위신 감독과 견자단이 표현한 엽문과는 완전히 달랐다. 물론 이 작품을 연기하기 위해서 그는 쿵후 트레이닝을 3, 4년 정도 받아왔다고 한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웬우
수많은 영화에서 익히 봐왔던 양조위의 매력은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작품이 가진 품격을 드높여준다. 흔하고 평범한 악당이 아닌, 상처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은 처연함, 인간적인 고뇌가 느껴지는 캐릭터다. 양조위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웬 우가 보여주는 무술 컨셉에 대해 “이 영화에서 내가 보여주는 액션은 호랑이 발톱 쿵후(Tiger Claw Kung Fu)라는 건데, 상징적인 의미가 큰 기술이다. 동양을 상징함과 동시에 캐릭터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신비한 세계 ‘탈로’에 사는 사람들의 평화와 조화를 상징하는 태극권과 달리, 호랑이 발톱 쿵후는 웬 우의 공격성과 분노를 나타내주는 느낌이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