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그 길레스피의 <크루엘라>는 몇년 전 나온 <조커>와 습관적으로 비교되는데, 유명한 악역 캐릭터의 전사를 다룬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이 둘은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조커>를 보면, DC 캐릭터를 80년대 마틴 스코세이지 영화, 보다 정확히 말해 <코미디의 왕>스러운 유사 리얼리즘의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다는 착안이 독창적으로 여겨지지만, 이 캐릭터를 구성하는 재료는 이미 수많은 코믹북과 각색물을 통해 꾸준히 만들어졌다.
미래의 조커가 아서 플렉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을 때부터 우린 이 남자의 내면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택한 길은 조커를 통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니지만(<다크 나이트>에서 크리스토퍼 놀런은 조커에게 어떤 사연도 주지 않는 보다 영리한 길을 택했다) 그래도 익숙한 캐릭터가 나오는 익숙한 길이다.
성장할 수 없는 주인공
<크루엘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다. 영국 작가 도디 스미스가 자신의 어린이 소설 <101마리 강아지>의 악역으로 고안해낸 이 인물은 소스가 별로 없다. 도디 스미스의 소설, 이를 각색한 가장 유명한 1961년작 디즈니 애니메이션, 이를 실사로 옮긴 <101 달마시안>이 나왔고 이 세 작품 모두 독립된 속편이 있지만 그뿐이다.
대부분 인기 있는 디즈니 캐릭터들이 그런 것처럼 크루엘라도 IP 착취를 당해 디즈니의 공장 생산 라인 여기저기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지만(얼마 전에는 <디즈니의 악당들>이라는 소설 시리즈로 <개를 훔친 이웃집 여자>라는 소설이 나왔다. 영화 <크루엘라>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열혈 디즈니 팬이 아닌 사람들은 오로지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글렌 클로스 주연의 실사영화를 통해서만 이 인물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크루엘라 드 빌은 달마시안 강아지의 가죽을 벗겨 코트를 만들겠다는 끔찍한 아이디어에 집착하는 미친 여자일 뿐이다. 굉장히 효과적이고 인상적인 완벽한 악당이지만 오로지 표면과 기능만으로 존재한다.
사람들은 은행 강도에서부터 미치광이 살인마에 이르기까지 온갖 악당들을 주인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들 중 몇명에겐 심지어 완벽한 감정이입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하한선이라는 게 있는데, 강아지를 죽여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려는 여자는 그 밑에 있다.
할리우드의 논리에 따르면 크루엘라 드 빌은 한니발 렉터보다 더 끔찍한 악당이다. 글렌 클로스를 분장시켜 원작의 전통을 잇는 우스꽝스러운 악역으로 만드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주인공은 또 다른 이야기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악당 말레피센트는 페미니스트 관점을 도입해 새로운 캐릭터로 변주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크루엘라도 그런가? 강아지 모피에 대한 욕망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구석이 어디에 있는가?
크레이그 길레스피를 포함한 <크루엘라> 제작팀은 이 불가능한 도전을 받아들이고 한참 고민했다가 결국 포기해버렸던 것 같다. 오해와는 달리 <크루엘라>의 크루엘라 드 빌은 <101마리 강아지>의 크루엘라 드 빌의 물 탄 버전이 아니다. 그냥 같은 재료를 일부 가지고 와 만든 다른 사람이다. 심지어 이 영화의 크루엘라는 10년째 나이 든 개를 키우고 있는 애견가이기까지 한데, 이 정도면 원작의 설정을 순화시킨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을 만든 것이다.
여기서 같은 재료란 무엇인가? 흑백으로 나뉜 독특한 헤어스타일, 패션에 대한 광적인 집착, 달마시안 개, 호레이스와 재스퍼, 아니타와 로저 같은 오리지널 소설과 영화 속 캐릭터, 특정 클래식 카,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와 같은 것들이다. 이 정도면 꽤 많다고 할 수 있다. 오리지널 영화에 나왔던 재료들이 하나씩 등장해 연결되는 구조는 프리퀄의 공식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크루엘라>는 주인공의 이름의 기원, 아니타와 로저, 호레이스와 재스퍼와의 관계, 달마시안 개에 대한 혐오의 이유를 제공한다. 엔딩 크레딧 초반에 나오는 쿠키는 이 영화를 우리가 아는 <101마리 강아지>와 연결시키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크루엘라>의 <101마리 강아지> 전사로서의 기능은 여기서 끝이다. 이들은 그냥 전시될 뿐이다. 이들이 <101마리 강아지>와 연결된다는 것은 드라마 안에서 별다른 의미가 없다. 종종 이들이 별다른 의미 없이 순전히 의무적으로 삽입되었다는 티도 난다. 후반부의 쿠키만 해도 ‘아, 이렇게 연결되는구나’라는 생각보다는 ‘앞으로 어쩌려고 그래?’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장치이다.
초반이 덜컹거리고 느린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영화가 원작의 벽돌들을 갖고 와 원작과 전혀 상관없는 모양과 구조의 건축물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크루엘라의 패션 테러라는, 영화의 핵심이 되는 아이디어도 ‘이 재료들로 무엇을 하지?’를 고민하던 작가들의 브레인스토밍 과정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프리퀄이 전작과 아무 상관없는 내용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프리퀄이라면 프리퀄의 주인공이 본편의 주인공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 성장이 악역으로서의 성장이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크루엘라>의 크루엘라가 <101마리 강아지>의 크루엘라가 된다면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까?
차라리 새 길을 가길
<크루엘라>의 크루엘라는 프리퀄에 대한 기대를 처음부터 포기하고 볼 때 가장 이해하기 쉬운 캐릭터다. 심지어 이 캐릭터의 기능은 악역도 아니다. 그보다는 18세기 피카레스크 소설이나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20세기 소설의 악당 영웅에 가깝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가장무도회의 테마가 18세기인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전형성들이 보인다. 주인공은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범죄자이고 악당은 주인공과 복잡하게 얽힌 귀족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일련의 반전이 한국 막장 드라마스럽게 느껴진다면, 한국 드라마가 몇 백년에 걸친 서구 문학의 생산물에서 정말로 많은 것들을 가져왔다는 것을 먼저 기억하기 바란다.
<크루엘라>가 최근 디즈니의 IP 착취물들 중 가장 신선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영화에는 피곤한 반복의 느낌이 없다.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 주인공인, 원작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세계도 새롭다. 관객이 프리퀄에 대한 기대를 접을수록 이 새 이야기는 더 선명하게 보인다. 이런 감상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역시 크루엘라와 남작 부인의 대립이다. 익숙한 대립을 성전환한 갈등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올바르게 성전환된 버전은 결코 이전 버전의 거울상이 아니다. 여자들과 남자들의 삶의 조건이 같았던 적이 없기 때문에.
흥행 결과가 좋아서 얼마 전에 속편 발표가 났다. 아마 지금 감독과 작가진은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가장 손쉽게 갈 수 있는 길은 <101마리 강아지>를 반복하는 것인데, 이 이야기를 지금 캐릭터와 그대로 연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원작이, 자신만의 언어와 지성을 가진 동물들이 영국 전역에 비밀 통신망을 구축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시길. 이를 해결하느니 새 길을 가는 것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