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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의 탈국경적 영화 경험에 대하여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진심의 언어

<미나리>

진중하고 유려하다. 영화 <미나리>는 삶의 다른 가능성을 찾아 나선 이민자 가족의 역경을 다룬다. 대부분 한국어로 진행되지만 감성적으로는 만국어로 통역 가능할 보편적인 정서를 펼쳐낸다. 미국 제작 영화임에도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된 것은 비영어권 언어가 준 이질감 탓이 크다. 이 영화가 폭넓은 감응을 일으키는 지점은 고립된 인간들의 관계성에 주목한 점에 있는 듯하다. 교회와 병원과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아칸소 시골의 이동식 주택에 한인 가족이 이주해 온다. 주위엔 마을이라 할 만한 공동체가 없다. 가족은 온전히 그들끼리 삶을 감당해야 한다. 물과 불은 자연이 주는 운명적 고난이며, 병약함과 노쇠는 인간적 가냘픔을 드러낸다.

병아리 감별이라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노동을 하고 물길을 내어 농장을 일구는 일상 속 곤란은 대부분 좁은 이동식 주택 내부 가족 사이의 미묘한 갈등으로 드러난다. 과장하지 않고 덤덤히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으나 냉소적이지 않으며 그윽하고 깊다. 어쩌면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코로나19 시대의 고립의 고통이 인종적, 문화적 차이를 넘어 이 영화의 보편적 감응을 이루어낸 것은 아닐까. <미나리>는 포스트 트럼프 시대의 문화적 다양성을 기대하는 관객층에 신선한 이민자의 삶을 정서적으로 이해시키는 동시에, 자신들이 상실한 한 시대를 이끌던 가족(좁게는 아버지)의 기억을 소환한다는 점에서 타 인종에 배타적인 미국 남부인에게조차 묘한 노스탤지어를 자아낼 법한 영화다.

윤여정, 한예리, 스티븐 연이 등장하지만 이 영화는 한국 관객에게 사뭇 ‘미국영화’처럼 보일 것이다. 미국 현지 외신의 반응도 비슷하다. <미나리>는 미국 국적 한인 이민자 2세가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녹여내 연출한 작품이고, 제작과 배급 모두 미국 회사가 담당했다. ‘이주와 개척’은 미국 서사의 원형이다. 작품은 아칸소 습지에 외래종 ‘미나리’가 뿌리내리는 것을 통해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예견하는 데 이른다.

작품상 경쟁이 온당할 영화가 애초에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거명되었다는 점은 어딘가 미심쩍었다. “이 영화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한 가족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영화다. 이 언어는 영어나 외국어보다도 깊다. 이 언어는 마음의 언어(a language of the heart)다.” 정이삭 감독은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 소감을 이렇게 남겼다. ‘외국어영화상’ 논란을 잠재울 의연한 현답이다. 언어나 국적성을 논외로 한다면 이 영화가 다루는 ‘진심’에는 번역이 필요 없다. 하지만 관객 수용성에 있어서 번역의 문제는 간단치 않다.

무엇이 한국영화와 미국영화를 규정하는가

영화의 품격, 촬영과 음악의 조화로움, 각종 해외영화제에서의 호평, 무엇보다 연기상을 휩쓸고 있는 배우 윤여정의 탁월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소개되었다. 대신 이 글에서는 이 영화가 한국 관객에게 전달한 정서에 주목해보려 한다.

많은 국내외 매체들이 <미나리>는 한국영화인가 미국영화인가를 논하고 있다. 한국 관객이 이 영화를 ‘미국영화’라고 느낀다면 그 반응은 미국에서의 격한 반응에 비해 작품이 어딘가 밋밋하다는 인상에 의한 것일 터다. 배경이 미국이며 주요 등장인물이 이민자라는 점을 지운다면 영화 속 생계와 고된 노동, 아이와 노인의 가정 내 돌봄 문제 등 가족의 곤란함은 대체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미나리>의 특이성인가? 이 부조화는 어떠한 균형 상태를 요구하게 될지 모른다. 타자화의 프리즘을 경유함으로써 비로소 인지적으로 이 작품이 꽤 괜찮다는 판단으로 전회하여 ‘미국인이 이입할 영화야’라는 합리화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의아하다.

한국적인 것이 미국 토양에 순조롭게 이식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아칸소에 한국 식물로 농장을 만든다는 설정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정작 문화의 이식과 충돌의 과정을 탐문하는 것은 이 영화의 관심사와 멀다. 이 점이 정이삭 감독의 작품이 현대와 전통, 서양과 동양 문화의 콜라주를 그려낸 리안의 초기 미국 배경 영화 <쿵후선생>(1992)이나 <결혼 피로연>(1993)과 다른 점일 것이다.

한국적인 것이 얼마나 번역 불가능한 경험인가는 이 영화에서 중요치 않다. 윤여정이 맡은 순자라는 ‘할머니’ 캐릭터의 번역 불가능성이 도리어 이 영화의 강력한 매력인 셈이니까. 한국의 농작물을 아칸소의 농토에 뿌리박는 것은 자연의 완고함으로 인해 일시적 패배에 당착한다. 이 영화에서 식물을 경작한다(cultivate)는 것은 문화(culture)를 이식함과 같은 맥락이다. 농부가 열심히 경작한 농작물은 물과 불로 인해 곤란을 겪는다. 오히려 애쓰지 않고 습지에 방치해둔 미나리가 씩씩하게 자라난다. <미나리>는 문화가 인위적으로 이식되는 것이 아니라 자생하고 생존한다는 경이로움을 다룬다.

영화는 정이삭 감독이 영어로 쓴 시나리오에서 출발했다. 윤여정은 정 감독이 영어 대사를 한국어로 전달하느라 애썼으며 영어를 한국어로, 문어체를 구어체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했다고 언급한다(<씨네21> 1292호 특집 기사 ‘윤여정 되기’참고). 이 과정에는 문자언어인 글을 섬세하게 바꾸는 과정인 번역과 음성언어인 말을 상황에 맞게 전환하는 통역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즉 영어권 관객은 네이티브 스피커인 정감독이 쓴 영어 자막으로 한국어를 이해하지만, 한국 관객은 번역과 통역을 거친 한국어 음성으로 영화를 접하게 된다.

말과 글, 음성과 문자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는 쉽게 좁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탓인지 영화에서 가장 편하게 다가온 인물이 막내아들 데이빗(앨런 김)이었다. 데이빗은 네이티브 영어를 구사하면서도 부모에게서 습득한 한국어를 섞어서 쓴다. 어른들의 긴 대사에 비해 데이빗의 말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것은 통역과 번역의 미묘한 매개 없이 표현되는 아이의 단순하고 직관적인 언어적 특징 때문이다.

<미나리>의 관람은 동시대 한국영화들의 감성지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2020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데 이어 외국어영화에 배타적인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 <미나리>는 <기생충>에 이어 2년 연속 한국어영화가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경우다.

봉준호의 전작 <설국열차>(2013)는 다국적 배우를 등용해 상당 부분을 외국어 대사로 진행했기에 자본, 제작, 연출의 국적성과 별개로 모호하게 초국적적 영화라는 인상이 강했다. <설국열차>를 보러 극장에 들어갈 때 첫 대사가 한국어일지 영어일지 궁금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영화는 한국어와 영어 자막을 동시에 띄운 채 특정 언어의 음성 내레이션 없이 초반 설정을 설명하는 기민한 전략을 보였다. 노련한 봉준호다 싶었다.

<황해>(2010)와 <곡성>(2016)을 제작했던 이십세기 폭스코리아와 <밀정>(2016)을 제작했던 워너브러더스는 201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 제작, 투자, 배급에서 서서히 손을 떼기 시작했다. 이 자리를 중국과 다국적 OTT의 자본이 채우고 있다. 넷플릭스가 투자한 <옥자>(2017)의 세계적 배우들, 플랜B가 제작한 <미나리>의 엔딩 크레딧에 부상된 브래드 피트라는 제작자 이름은 우리가 지금 본 영화가 어떤 영화인가 재질문하게 만든다.

무엇이 한국영화와 미국영화를 규정하는가. 지난 10년간의 경험상, 제작이나 투자, 배급의 다국적성은 관람의 경험 자체를 크게 바꾸지 않았다. 언어는 다른 문제다. 살짝 어색한 스티븐 연의 한국어나 윤여정의 할머니표 영어(사실 윤여정은 영어에 능숙하다)보다 <미나리>의 관람 경험을 특징하는 것은 막내 데이빗의 뒤섞인 언어일 것이다. 그것은 번역이 필요 없는 진심의 언어다.

새로운 의미의 언어

최근 조성희 감독의 <승리호>(2021)는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인물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영화 속 모든 대화 과정에는 통역의 매개가 빠져 있다. 모든 인물이 간단한 통역기를 착용한다는 설정 탓이다. OTT와 유튜브의 시청 관행은 이러한 SF적 상상력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다국적 영상을 소비하는 관행은 모국어의 고유성이나 언어의 번역 불가능한 뉘앙스에 대한 진지함을 차단하는 습관을 내성화시켰다.

영화의 국적성이 모호해지는 것과 동시에 영화, 드라마, 숏폼 형태 영상물의 형식적 경계도 사라지고 있다. ‘신한류’로 평가되는 K콘텐츠도 번역의 과정을 통해 세계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딥러닝 기반 A.I. 번역이 자연스러워지면서 ‘디지털 바벨탑’의 시대에 대한 낙관은 코로나19로 봉쇄된 국경을 초월해 문화적 장벽을 가벼이 허물고 있다. 한편에서 예능, 드라마, 웹툰 등의 콘텐츠뿐만 아니라 한국영화 역시 해외 시장을 고려해 관심사를 지속적으로 해외로 돌리고 있다. 중국 자본이 대거 투입된 <승리호>에서 배우 김태리가 <영웅문>을 읽는 것이 상당한 이슈가 된 것은 상징적 사례다.

<미나리>가 보여주는 민족별 수용성의 차이가 번역의 긴장감을 잘 보여준다면 <승리호>의 경우는 디지털 바벨탑을 낙관하는 통역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무엇이 한국영화인가? 나아가 영화란 무엇인가? 자본은 일찌감치 국가와 민족, 영상물의 형식을 가리지 않았다. 문화와 언어는 코로나19로 인해 물리적으로 봉쇄된 국경을 넘어 가상의 온라인을 통해 장벽 없이 흐른다.

이러한 시대의 한국영화, 더 넓게 영화는 부재하는 현존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는 일종의 극점이다. 베냐민은 물리적으로 접수해야 할 정복의 영토로 간주하는 대신, 그 지점에 도달하지 못한 실패의 체험을 조작함으로써 위치를 식별하고 지향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북극을 상정했다. 소실점인 한 북극점에는 누구도 도달할 수 없지만 북극점이 있기에 그것을 향한 항해는 가능하다. (한국)영화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부재함으로써 현존하는 지향의 대상인 것. 미나리는 여러해살이풀로 어디서나 잘 자라며 음식도 되고 약도 되는 ‘원더풀’한 것이다.

<미나리>가 한국영화인가 미국영화인가는 부차적 문제다. 순자의 대사인 “미나리, wonderful!”은 한국어도, 한국식 영어도 아닌 새로운 의미의 언어로 감각된다. 진심의 언어를 향한 추구는 언제나 시네마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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