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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철' 염혜란, '아이' 류현경, '고백' 박하선의 무제한 토크 ①
임수연 사진 백종헌 2021-02-26

여자로, 배우로, 우리는 잘 살고 있습니다

박하선, 류현경, 염혜란(왼쪽부터).

“이거 어떻게 나온 기획이에요? 너무 좋은 아이디어 같아요!” 현장에 도착한 영화 및 배우 관계자들도 들뜬 얼굴로 물어왔다. 같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모여 대담을 진행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각기 다른 영화 세편의 주연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매우 귀한 그림이다. 2월에 한주 간격으로 개봉하는 <아이>(2월 10일 개봉)의 류현경, <빛과 철>(2월 18일 개봉)의 염혜란, <고백>(2월 24일 개봉)의 박하선이 서로의 작품을 함께 응원하고자 모였다. 공교롭게도 이들 작품 모두 시스템의 부재로 소외받는 사회적 약자들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이>의 영채는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자 성노동자 여성이다. 미혼모로서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아이를 키우면서 부딪히는 벽에 절망하며 엄마의 자격을 자문하는 그에게, 불법 입양을 권하는 브로커가 접근한다. <빛과 철>은 2년 전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자와 의식불명이 된 남편을 간호하는 여자가 우연히 공장에서 맞닥뜨리는 이야기다. 사건 당일의 미스터리를 역추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청 노동자의 산업재해 문제를 고발하는 문제의식이 ‘빛과 철’이라는 제목과도 연결된다. <고백>에서 과거와 현재의 학대 피해자들은 서로의 상흔에 공감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대한다. 특히 사회복지사 오순은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치는 여자다.

세 작품 모두 사회적 취약 계층의 현실을 가감 없이 다루며 배우들의 파리한 얼굴이 극을 떠받치지만, 염혜란은 “심각한 얘기 말고 우리 셋이 수다 떠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왔다”며 챙겨온 주전부리를 먼저 꺼내놨다. 소외 계층과 일하는 여성, 영화계 다양성에 대한 희망까지 가닿으며 진지하게, 때로는 분통을 터뜨리며, 그럼에도 내내 유쾌함을 잃지 않고 이어진 세 배우의 대화를 전한다.

-각자 다른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을 한자리에 모은다는 게 사실 쉽지 않은 일인데, 세분 모두 흔쾌히 섭외에 응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먼저 전하고 싶어요. 세분은 이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류현경 제가 25살 때 찍은 드라마 <일단뛰어>에 박하선 배우님이 한회 게스트처럼 출연해주신 적이 있어요. 불량 청소년 역이었는데….

염혜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누가 불량 청소년이라고?

박하선 제가요. 오토바이 타고 나왔어요. 류현경 선배님이 나쁜 놈한테 당하는 저를 구해주는 경찰 역이었고요. 그때 21살이었는데, 드라마 <동이>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을 하기도 전이었죠. 너무 잘해주셔서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어요. 그러다 한번씩 영화 시사회 때 꼭 뵙게 됐고, 그때마다 너무 반가웠어요.

류현경 ‘과연 날 기억할까?’ 생각했는데 기억하더라고요. 어릴 땐 아무 생각 없이 찍는 때도 있잖아요. ‘오늘도 촬영하는구나’ 하고 갔는데 한회 출연하는 박하선 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하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같이 연기하는 저까지 저절로 눈물이 났어요

박하선 한회만 나오니까! 신인 때니까!

-염혜란, 박하선 배우는 얼마 전 라디오 <박하선의 씨네타운>에서 만났죠? <빛과 철> 홍보차 출연했던.

염혜란 그때가 처음이었죠. 너무 편하게 대해줘서 고마웠어요.

박하선 원래 선배님 팬이었어요. <증인> 보면서 선배님에게서 김혜자 선생님의 광기를 봤어요.

염혜란 진짜요?

박하선 너무 뵙고 싶었는데, 또 이렇게 뵙게 돼서 좋네요.

-그땐 짧게 만났으니 오늘 더 길게 얘기해보죠. (웃음) 이번에 개봉하는 다른 배우 분들의 영화도 보셨나요?

박하선 저는 라디오 방송에 게스트로 나오시는 분들의 영화는 꼭 챙겨 봐서 <빛과 철>도 봤는데 영화가 너무 좋더라고요. 그리고 어떻게 그런 연기를 하실 수 있는 건지 너무 궁금해서 방송에서도 여쭤봤었죠.

염혜란 알면 제가 안 알려줬겠어요. 저도 모르고 그냥 열심히 하는거죠. 물어봤는데 누가 되게 명확한 답을 줬으면 좋겠다. 아무도 없지 않을까요? 누가 말할 수 있겠어요.

-박하선 배우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하는 이유가 다른 배우들의 연기 비결을 묻고 싶어서라면서요. 그런데 박하선 배우의 연기 비결이 궁금한 분들도 많을 것 같아요. <고백>에서 보여준 모습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배우상도 받고.

박하선 찍을 때는 출산 후 오랜만의 복귀작이라 오히려 시원하게 연기했어요. 원래는 집에 가는 길이 늘 찜찜하고 내가 부족했다고 자책하곤 하는데 <고백> 땐 오래 연기에 굶주리다 만난 작품이라 그저 행복했어요. ‘이만한 작품 어떻게 또 만나지? 이런 대사 언제 또 하지?’ 했는데 막상 결과물을 보니까 아직 많이 멀었다 싶더라고요. 아, 착각했구나. 정신 차리자! 지금은 부족한 면이 많이 보여서 마냥 좋고 기쁘다고 할 수는 없어요.

염혜란 자기 작품을 보면 늘 그런 거 같아요. 화면으로 내 연기를 확인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요. <고백>의 ‘고백’이 진솔한 고백인 줄만 알았는데, 영어 제목도 ‘Go Back’이라서, 박하선 배우님이 맡은 역할이랑 너무 잘 맞는 제목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동 학대 소재를 대면하기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피해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담으면서도 폭력적인 묘사가 거의 나오지 않아서 좋았어요. 하선씨의 메마른 듯한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것도요.

류현경 저도 첫 등장할 때 경찰과 얘기하는 얼굴이 좋았어요. 이게 이야기상 미스터리 말고 배우의 얼굴만으로 보여줘야 하는 미스터리도 있잖아요. 그게 딱 보였어요. 바로 몰입이 되더라고요. 마지막에 혼자 길게 얘기하는 신 있잖아요. 덤덤하게 얘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저 캐릭터의 가슴속에 뭔가 요동치고 있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박하선 정말 감사합니다. 저 지금 진짜 눈물 날 것 같아요…. (눈물 짓는다.)

염혜란, 류현경 (토닥이며) 울지 마, 울지 마.

류현경 같이 연기했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더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박하선 저 진짜 그때 기억이 너무 좋아서 항상 응원하고 있었어요.

-염혜란, 류현경 두 배우는 <아이> 찍을 때 어땠나요? 영채(류현경)가 일하는 술집 사장 미자(염혜란)가 영화에서 가장 영채를 아끼는 캐릭터 잖아요.

염혜란 우리 둘이 굉장히 친해 보여야 하는 설정이라서 따로 만나 얘기도 많이 했어요. 원래 말을 잘 못 놓는데 “미안한데 친해져야 하니까 빨리 말 놓을게”라고 하고. 아무리 친해지려고 해도 안되는 배우들이 있는데 현경씨는 너무너무 편했어.

류현경 제가 낯가림이 하나도 없거든요. 한번도 낯을 가린 적이 없어요.

염혜란 아~ 그게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고…. (일동 폭소) 나는 나한테만 그런 줄 알았지!

박하선 낯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배우는 처음 본 거 같아요.

류현경 만약에 제가 낯을 가리는 모습을 보셨다면, 그건 제가 싫어하는 사람을 만난 거예요. 본능적으로 피한 거죠. 다행히 제 주변에 정말 좋은 분들만 있어서 그런 일이 없었어요. 그래서 염혜란 배우님이랑 연기할 때 너무 좋았, 좋은, 좋았어요.

염혜란 지금 말 절었지! 너무 좋았, 좋은, 좋았어요.

류현경 (정말 억울한 얼굴로) 아니에요, 선배님! 사실 이렇게 선배님이라고 하면 혼나요. ‘언니’라고 해야 하는데. 혜란 언니랑 연기하면 마음이 든든해서 아무렇게나 해도 다 될 것 같고, 그 신이 그냥 잘된다는 느낌이 들어요. 제가 다른 인터뷰에서도 얘기했지만 늘 연필과 공책을 들고 다니시며….

염혜란 나도 그 기사를 봤는데 내가 뭘 그렇게 쓴 거야? 나 진짜 물어보고 싶었어. 내가 깨알같이 뭘 썼다는데 기억이 없어.

류현경 대사도 적어보시고 그랬어요.

염혜란 사투리여서 그랬을 거야.

류현경 그래서 노트의 비밀이 궁금하다고 사람들이 그런다면서요,

염혜란 데스 노트였을지도 몰라. ‘류현경 그렇게 안 봤는데.’ (일동 폭소)

류현경 그런 모습이 너무 좋았어요. 선배님처럼 믿음직스럽고 단단한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박하선 (부러운 눈빛으로) 저도 꼭! 같이 연기하고 싶습니다.

여배우에게 결혼과 출산이란

-세분이 연기한 캐릭터 모두 하나의 속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양면성을 갖고 있어요. 가령 <빛과 철>의 영남은 친절한 얼굴로 등장했다가 희주(김시은)가 태도를 바꾸니까 서늘한, 심지어 섬뜩한 표정을 보여주는 캐릭터예요.

류현경 <빛과 철>을 보는 내내 정말 숨막혔어요. 저는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장기상영할 때 CGV명동에서 봤거든요. 모든 관객이 영화에 집중하는 기운이 느껴졌어요. 그런 순간에 기분이 진짜 좋잖아요.

염혜란 시나리오 볼 때부터 빨려들어가는 흡인력 있는 캐릭터이긴 했는데, 이게 자칫하면 너무 무거워질 수 있어요. 그래서 프레임 안에 갇혀서 연기하면 안되겠다 싶더라고요. 남편이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사람들과 교류도 많이 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감독님과 “간호를 오래 한 사람이 다 그렇게 죽상 쓰고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간호가 길어질수록 그 안에서 기쁨을 찾고 연대를 찾으려고 하지, 상처로 응축되어 있지만은 않다”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냥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보였으면 했는데 혼수상태에 빠진 남편의 뺨을 때릴 때 사람들이 너무 무서웠다고….

박하선 전 그 신도 너무 와닿았어요. 주변에서 오래 간병하신 분들을 봤거든요. 너무 지치는 일이고,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저 기분이 뭔지 잘 알아서 굉장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전반적으로 캐릭터가 슬픔에만 젖어 있지 않고 숨막히지만 않아서 좋았어요.

류현경 감독님 인터뷰 찾아봤는데, 영남과 희주가 공장 사무실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면하는 장면 이전에 아예 두 배우가 안 만나게 했다면서요. 처음 마주칠 때 생생한 감정을 담고 싶어서 대본 리딩도 안 하고. 어떻게 그럴 수가…. 너무 신기해요.

염혜란 난 오히려 이상하지 않았던 게, 드라마 현장 가면 리딩하고 현장에서 처음 만날 때도 많잖아요. 연극이면 공연 전에 아예 안 만나는 게 이상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첫 장면 찍기 전에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요. 오히려 리딩 때 어떤 배우들은 다른 스케줄 때문에 못 오기도 해! (일동 공감하며 웃음) 어떤 배우는 4부부터 출연이라 참석을 안 하고. 그러다가 현장에서 만나면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하고 연기를 시작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빛과 철> 때 낯설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듣고 보니 그게 감독님의 큰 그림이었던 거예요. 이사 다음날 그 신을 촬영했어요. 이삿짐 풀다가 잠도 거의 못 자고 부산으로 내려가는데, 이걸 첫신으로 넣어놨다고? 심지어 새벽 촬영. 해도해도 너무 한다며 힘들어했는데, 그게 계산이었다니.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역시 감독들은~.

-<아이>의 영채가 베이비시터 일을 하기로 한 아영(김향기)과 처음 만나는 신을 보면, 초면에 반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잖아요. ‘저 여자 뭐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유흥업소 종사자라는 설정이 단번에 읽히지는 않아요. 과거의 상처를 지독한 자기혐오로 누르며 애써 괜찮은 척하는 캐릭터입니다.

류현경 사람들이 이 직업에 대해 쓰고 있는 색안경이 캐릭터에 씌워지지 않았으면 했어요. 영채는 그냥 평범하게 일하고 있는,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사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감독님과 진짜 대화를 많이 했거든요. 영채가 좀 이상해 보이는 부분은 사실 마음속 상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한 어긋남 같은 거잖아요. 그런 게 영화적 재미를 줬으면 했어요.

염혜란 사실 아영과의 첫 만남은 대본과 좀 달라요. 시나리오에선 훨씬 공격적이고 반말로 일관하는 느낌이었는데, 현경이가 계속 ‘중간말’을 하는 거예요. 어떨 때는 높임말, 어떨 때는 반말. 전 그런 게 더 좋았어요.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는 원래 사람한테 함부로 대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처음 만난 관계니까 말을 높이다가도 또 상대가 어리니까 낮추기도 하고, 이런 선을 타는 게 더 현실적이라 너무 좋더라고요.

-<고백>의 오순은 학대 피해자가 자랐을 때 가질 수 있는 공격성을 보여주잖아요. 선배에게 애교를 부릴 땐 또 평범한 사람 같아요. 학대 피해자 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이미지에서 많이 벗어나 있죠.

박하선 감독님이 집에서 학대를 당하는 보라(감소현)랑 오순이 붙는 장면은 진짜 친구처럼 순수해 보였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제가 밝게 연기해도 되냐고 물어봤어요. 왜냐하면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이면 과거에 상처가 있어도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야 하잖아요. 매번 어두운 표정만 하고 있으면 누가 좋아해요. 그래서 영화에서 최대한 밝을 수 있을 만한 신은 최대한 살려보려고 했어요. 주변에서 연기하면서 많이 힘들지 않았냐고 물어 보는데, 경력단절로 오는 불안감을 해소해주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그런 고통마저 저한텐 행복이었어요. 출산하고 산후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어요. ‘건망증이 심해진 거 같은데 대본을 다시 외울 수 있을까? 내가 복귀를 할 수 있을까?’ 그러다 연기를 하게 되니까 너무 좋은 거죠. 살도 다 못 빼서 힘들었던 시기도 있어요. ‘결혼식 갔다가 류수영 옆에 웬 여자가 있어서 봤는데 그게 박하선이었다. 살 쪄서 못 알아보겠더라’라는 글이 인터넷에 올라온 걸 보고 집 밖으로 거의 못 나갔어요.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을 때 애 낳고 거의 1년 만에 저에게 주어진 단비 같은, 유일한 시나리오였어요. 육퇴(‘육아퇴근’의 준말. 아이가 잠들면 그제야 육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편집자)하고 매일 밤 10시부터 연기 연습을 했는데 저에게 대사가 주어졌다는 거 자체가 너무 기쁜 거예요.

염혜란, 류현경 (너무 안타까워하며) 어떡해!

박하선 예전엔 일이 고마운 줄도 즐거운 줄도 몰랐는데, 이제는 일이 너무 재밌어요. 세상에 육아보다 힘든 건 없더라고요.

염혜란 애가 복덩이네, 복덩이.

박하선 결혼하고 나니까 현장에서 여자 스탭들이 되게 잘해줘요. “언니, 애 보고 싶겠어요!” “에이, 실컷 봤어!” (웃음) 내가 아줌마라 그런가? 서로 편해지고 경계심이 없어지더라고요. 예전엔 서로 미워한 적도 있는 것 같은데 이젠 너무 편해요. <고백>은 작은 영화인데도 작품이 좋아서 모인 사람들이잖아요. 어느 프로 못지않은 열정으로 너무 즐겁게 찍었어요.

류현경 아까 대담 시작 전에 둘이서 살짝 대화를 나눴는데, 솔직히 저는 두려움이 있었거든요. 결혼이나 출산 이후 작품이 끊길 수 있다는 불안함. 그러다가 박하선씨가 계속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는데 그동안 힘들었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박하선 작품이 안 들어와서 열애설 나고 2년, 결혼·출산하고 2년, 도합 4년을 쉬었어요. 상대 배우로 미혼을 고집하는 분들이 있어요. 심지어 본인도 유부남인데! 미혼녀 캐릭터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중학생 아들이 있는 역할은 육아 경험이 있는 제가 더 잘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미혼인 배우를 고집해요.

염혜란 아직도? 와…. 정말 너무들 한다.

박하선 물론 제작진이 핑계를 댄 것일 수도 있어요.

류현경 그런데 그런 사람이 많은 게 너무 이상해요. 심지어 같은 업계에 있어도 “아직도 그러는 사람이 있어?”라고 하는데 다들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박하선 같은 배우인데도 결혼한 여자배우는 상황이 참 다르더라고요. 저는 애를 낳고 감정이 훨씬 풍부해졌어요. 우는 신을 되게 힘들어했는데 애를 낳고 나니까 그냥 눈물이 주룩주룩 나요. 평소엔 화도 잘 내면서 화내는 신은 되게 못 찍었는데, 이제는 부부싸움도 그렇고 그 느낌 잘 아니까!(웃음) 너무 자연스럽게 절로 연기가 나와요. 여배우에겐 결혼과 출산 경험이 자양분이 될 수 있어요. 편견을 버리고 그 사실을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예전보다 훨씬 잘할 수 있어요.

류현경 암묵적으로 쉬쉬하면서 어떤 룰을 만들어놓은 것 같아요.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염혜란 배우가 지금 박하선씨 얘기하는 모든 순간에 공감하고 있는데, 실제로 출산 후 연극을 잠깐 쉰 적이 있죠?

염혜란 전 애가 10살 됐는데, 지금도 육아는 계속되고 있어요. 예전에 쉰 건 제가 원해서 쉰 거예요. 그때의 1년이 돌이킬 수 없는 1년이라는 걸 알아서 옆에 더 오래 있으려고 했죠. 저는 엄마가 되기 전에도 엄마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 제 연기가 너무 거짓말 같았어요. 아이를 대할 때 이런 심정만 있지 않을 텐데 내가 너무 평면적으로 연기하는 것 같아서, 아기를 낳고 나면 연기가 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어요. 실제로 선배님들이 여자들은 출산 후에 연기가 더 좋아진다고 했고. 하선 배우님과 저는 쓰임이 좀 다르잖아요. 애를 낳고 일을 못하게 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하선 배우님 같은 경우들이 정말 힘들 것 같아요.

박하선 여담인데, 염혜란 배우님 실물 보니까 정말…. 로맨틱 코미디를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잘 어울려요.

류현경 공감해요. 선배님 멜로도 완전 가능하고!

염혜란 내 나이에 그런 연기를 하려면…. 사실 남자배우들은 아래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자 파트너를 만나도 괜찮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요즘 연하남 캐릭터들도 있지만 여전히 그게 일반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진 않고, 남자배우쪽이 더 어리려면 여자쪽이 엄청난 능력자이거나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 미모를 갖춰야 해요. 난 나보다 젊은 배우들을 러브라인 상대로 보고 있었는데. (일동 폭소)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볼까요. <아이>의 영채, <빛과 철>의 영남, <고백>의 오순 모두 법이나 제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이에요. 이번 작품을 통과하며 절감한 복지의 사각지대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죠.

염혜란 <빛과 철>을 보면 정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회사가 책임을 회피하고 제대로 된 보상이 안 나오잖아요. 그게 지금 노동계 현실하고 너무 닮았어요. 영화를 찍을 때만 해도 김용균법(‘위험의 외주화’ 방지를 비롯해 산업 현장의 안전규제를 대폭 강화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한 인명 피해를 주는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사업주에 대한 형사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었는데, 지금 얘기가 나오고 있죠. 물론 이런 이야기가 전면에 나오는 영화도 아니고 그 얘기를 하고 싶은 작품은 아니지만, 노동 문제도 담겨져 있는 작품이라 너무 좋았거든요. 영화를 찍으면서 가슴이 아팠던 게, 영남이 가진 분노가 사고의 진실을 파헤치려고 하는 회사 동료를 향하게 되잖아요. 나쁜 짓을 한 거대한 조직은 따로 있는데 같은 피해자들끼리 적대관계가 되는 게 너무 가슴 아프더라고요. 조직에 맞서려면 거대한 싸움이 되니까 결국 같은 노동자에게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 거죠.

류현경 <아이>에서 보호종료아동이 아르바이트도 제대로 못하고 기초수급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그려지잖아요. 미혼모 보호 시설에 아기를 50만원 받고 팔려는 사람도 있고. 감독님이 극적인 상황을 만들기 위해 상상한 결과라고 생각했는데, 전부 실제로 있었던 일이래요. 어떻게 애를 돈주고 팔고…. 전 그건 진짜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많은 분들이 이런 문제에 귀 기울여주셨으면 좋겠어요.

박하선 <도가니>부터 시작해서 <미쓰백> 그리고 <고백>까지, 아동 학대를 다룬 영화가 계속 만들어졌잖아요. 그런데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영화 많이 봐달라는 말을 하기도 조심스러워요. 지금 영화를 보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아주 작은 도움이나마 됐으면 하는 마음인 거죠. 엄마가 된 이후로, 특히 피해자가 우리 아이 또래인 뉴스는 헤드라인만 봐도 무서워요. 창녕 아동 학대 사건 때,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안 돌아갔어요. 드디어 세상이 바뀌나보다 하고 좋아했는데 정인이 사건이 터지는 걸 보고 너무 화가 나고 무기력해졌어요. 이모가 10살 조카를 학대한 사건도 있고, 아이를 집에 버려두고 엄마 혼자 이사를 가지 않나, 정말 말도 안되는 일들이 벌어져요. 너무 속상해서 제가 데려다 키우고 싶은 생각까지 드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제도적으로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아요.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들도 있고요. 요즘 이런 생각도 들어요. 학대 부모의 나이가 어린 경우가 많더라고요. 애가 애를 낳았는데 애 키우는 게 너무 힘든 거죠. 그럼 피임기구 광고를 지상파에서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미국은 콘돔 광고도 막 나오잖아요. 뒤로 쉬쉬하지 말고 성교육을 양지로 끌고 나와야 해요.

*본 기사는 <'빛과 철' 염혜란, '아이' 류현경, '고백' 박하선의 무제한 토크 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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