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넨 도대체 어떤 인간이야!” 이건 과묵하기 그지없는 주인공 에드 크레인(빌리 밥 손튼)을 향해 그의 처남 프랭크(마이클 반달루초)와 백화점 사장 빅데이브(제임스 갠돌피니)가 똑같이 던지는 물음이다. 에드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유령 같은 존재이지만, 변호사는 그를 ‘현대인’이라 부르며, 감독인 코언 형제는 에드를 ‘거기 없었던 남자’라고 명명한다. 코언 형제의 신작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를 보는 우리에게 에드 크레인이란 인물은 정말이지 스크린상에 난 커다란 구멍, 하나의 이동하는 검은 점처럼 보여진다. 에드에 대한 이와 같은 우리의 인상은 그의 모습을 종종 검은 실루엣으로 처리하여 보여주는 코언 형제의 시각적 전략으로 인해 좀더 강화되곤 한다.
이 영화에서 코언 형제는 ‘하드 보일드’라는 말의 의미를 그 극한까지 밀어붙이려고 시도한다. 이로 인해 인물들의 심리를 드러내는 풍경으로 기능하던 필름누아르의 공간은, 이제 인물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순전히 조형적인 장식물이 되어버린다. 말하자면 이 영화적 공간이 재현하는 세계는 림보(limbo)에 다름 아니다.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숱한 영화적 기억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해온 코언 형제는 여기서 애써 굳은 표정을 지으며 이 기이한 유령의 공간을 배회한다.
샤말란 영화를 강력하게 환기
우리는 이 영화 전체가 유령의 내레이션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영화적 영향에 관한 자의식으로 가득한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그 모든 과거의 참조물들을 뒤로 한 채, 오히려 동시대의 영화작가 한명을 가장 강력하게 환기시키고 있다. 바로 <식스 센스>와 <언브레이커블>을 만든 M. 나이트 샤말란이다. 빌리 밥 손튼에 의해 섬세하게 연기된 에드 크레인은 샤말란 영화에서의 브루스 윌리스를 코언 형제식으로 재현한 것이며, 이 ‘네오 고스트 누아르’(?)의 세계는 <식스 센스>의 유령의 공간 및 <언브레이커블>의 코믹북의 세계와 근친관계에 있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자, 죽은 자가 주연이 되어 다른 이의 말을 통해 구성된 허구의 공간을 누비던 <유주얼 서스펙트>로부터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희를 통해 결국 인과관계가 소멸된 기이한 공간을 창조하는 데 다다른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이르기까지, 동시대의 몇몇 미국영화는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된 주인공들을 보여주는 행위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다. 물론 여기서 데이비드 핀처- <쎄븐> <더 게임> <파이트 클럽> -를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들은 대개 필름누아르의 세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포스트 모던적? 혹은 잡종적?) 장르영화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프리츠 랑의 <스칼렛 거리>의 마지막에 들려오던 여인의 목소리가 결국 자신의 목소리임을 깨달은 이들의 영화. 혹시 우리는 남의 그림에 단지 서명만 남기는 존재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탐정이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용의자는 아닐까 하는 물음을 던지는 이들.
코언 형제는 속임수를 쓰지는 않는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맥거핀이 없는 히치콕 영화이다. 그들의 영화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제임스 케인, 빌리 와일더, 프리츠 랑, 찰스 로튼 그리고 오슨 웰스- 데이비드 린치도 여기에 낄 수 있을 것이다- 등에게서 받은 영향을 솔직히 드러내고 있다. 대신 그들은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오른다. 이 무대는 코언 형제가 그토록 매혹적이었던 동시에 거추장스러웠던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고답적으로 재구성한- 심지어 처음으로 흑백필름을 사용하면서까지- 것이며, 여기서 주인공 에드 크레인은 그들의 모험을 대신 감행하는 대리인 혹은 그들이 쓴 표정없는 가면이 되어버린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그리스 비극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뒤틀리고 어긋난 오이디푸스 이야기이다(그러니까 우리는 이제야 코언 형제가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에서 그리스적 세계로 향했던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에드는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의 가면을, 그의 아내 도리스는 이오카스테의 가면을, 백화점 사장 빅데이브는 라이오스의 가면을 쓰지만 각본은 소포클레스의 그것으로부터 점점 이탈해간다. 이런 식으로 코언 형제는 이 고답적인 영화공간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낸다.
비극을 비극이 아닌 듯 가장
코언 형제는 애써 비극을 비극 아닌 것처럼 가장하려고 시도한다. 폴 리쾨르는 오이디푸스 이야기에서 진정한 비극은 운명- 부친살해 및 어머니와의 동침이라고 하는- 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바로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코언 형제의 해석은 좀 다른 것 같다. 에드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잘 알고 있지만 죄의식은 지니고 있지 않은 인물이다. 혹은 누명을 쓴, 그러나 결백하지는 않은 남자이다. 그는 빅데이브가 죽은 뒤 이발소에 나타난 형사들을 보고는 순순히 경찰서로 따라갈 결심을 한다. 즉 ‘나의 일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형사들이 그를 찾아온 것은 그를 연행해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아내 도리스가 빅데이브의 살해혐의로 체포되었음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어긋남이 유머를 만들어낸다. 탐색은 실패로 돌아간다. 또한 범죄와 죄인은 계속 잘못 연관지어진다. 백화점 사장 빅데이브를 협박, 살해한 에드의 죄를 대신 덮어쓰는 것은 도리스이다. 에드는 우습게도 사기꾼 톨리버(존 폴리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기의자에 앉게 된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의 진짜 비극은 스스로가 행위의 주체임을 받아들이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른 이들에 의해 거부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이 비극의 가운데에는 오인된 정체성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다. 혹은 왜 우리 시대에 비극은 불가능한가, 라는 문제가 놓여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각각의 배역을 맡은 인물들은 자신들의 자리로부터 이탈하면서 전혀 엉뚱한 자리에 가 있게 되고 결국 마땅히 비극이 되었어야 할 드라마는 희극이 되어버린다. 한때 코언 형제는 이런 식의 전환을 기꺼이 수용하면서 거기서 짓궂은 유머를 이끌어내곤 했다(<블러드 심플> <밀러스 크로싱>). 그러나 이제 그들은 영화 속의 인물을 단지 장르영화의 구조물 가운데 하나가 아닌, 동시대의 공기가 깊숙이 불어넣어진 생생한 존재로서 사고하고 있는 것 같다(특히 <파고> 이후). 이는 코언 형제가 이른바 포스트-타란티노 세대와 공명하는 부분이다.
유령, 현대인, 거기 없었던 남자의 다른 말
영화 속에서 변호사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운운하며 탐색의 불가능성을 역설하는데, 코언 형제가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그저 하나의 유머로 간주하고 있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다만 불확정성 원리가 범죄수사의 불가능성을 암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주장한다면, 이는 죽은 하이젠베르크조차 무덤에서 코웃음칠 만한 일일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진짜 범인이 누구인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좀더 그럴듯하게 범죄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변호사의 말이다. 범인은 그 누구라도 좋다. 그 누구도 용의자들에게 ‘거기에 누가 있었는가’를 묻지는 않는다. 단지 ‘거기에 나는 없었다’는 알리바이가 필요할 뿐이다. 이상하게도 에드와 도리스는 알리바이를 대는 데 적극적이지 않으며 그로 인해 ‘거기에 없었던’ 그들이 죄를 대신 뒤집어쓴다. 여기엔 세계에 대한 지독한 환멸이 존재한다. 이 환멸은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의 저변에 깔린 주된 모티브 가운데 하나다. 이 점에서 코언 형제의 영화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식의 치정극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지면서 카프카-웰스의 세계(<심판>)와 공명하는 자리에 놓이게 된다. 결국 유령, 현대인, 그리고 거기 없었던 남자, 이 모두는 같은 말이다.
에드가 유일하게 삶의 의지를 느끼는 순간은 소녀 버디(스칼렛 로핸슨)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8번>을 들을 때이다. 그러나 이 또한 오인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다. 프랑스인 피아노 선생에게서 버디의 연주가 그저 악보에 따라 연주할 뿐인 감정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전해듣는 순간 에드는 좌절한다. 다시 한번 우리는 여기서 자신들의 영화에 관한 코언 형제 스스로의 논평을 접한다. 영향과 반복을 벗어나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여기에 있다. 새로운 필름누아르, 새로운 갱스터, 새로운 코미디가 아닌 그 무엇을 창조하고 싶다는 욕망. 영화 전편에 걸쳐 베토벤의 이른바 3대 피아노소나타- 8번(<비창>), 14번(<월광>), 23번(<열정>)- 가 들려오지만, 진정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 심금을 울리는 순간은 따로 있다. 흔히 탈속의 경지에 오른 음악이라고 이야기되는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소나타 가운데 30번의 제3악장이 서서히 울려퍼지면서, 화면 왼쪽에서 에드와 버디가 탄 차가 역시 서서히 공중을 날아온다. 빌리 밥 손튼의 표정없는 얼굴로부터 달관의 정서를 느끼게 되는 것은 이순간 이후부터다. 현실은 꿈과 환상 속에 완전히 용해되어버려- 가령, 에드는 감옥 위로 날아온 UFO와 조우하기도 한다- 더이상 특권을 지니지 못한다. 그리고 에드는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작가가 된다(이쯤에서 이 영화는 <바톤 핑크>의 속편이 된다).
관조 뒤에 숨은 우울
우리는 코언 형제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가 소녀 버디의 연주와 같은 것이라고 쉽사리 단정해버릴 수도 있다. 감정없는 연주에 대응하는 하나의 감정없는 영화처럼. 하지만 이 영화의 유머 뒤에 숨은 우울함- 코언 형제는 이를 냉소 혹은 관조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지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정말이지 이 영화는 빌리 밥 손튼의 굳은 표정과 많이 닮아 있다. 코언 형제가 환기시키는 고전영화들의 목록을 늘어놓는 것은 이 영화를 그저 장르적 유희의 결과물로서만 보게 만들 위험이 있다. 영화사적 기억의 활용에 대한 깊은 자의식, 현대적 삶의 희/비극적 속성에 대한 탐색이야말로 이 영화가 갖춘 미덕일 것이다. 영화 말미에 코언 형제는 에드가 사형당할 전기의자가 놓여 있는 방의 풍경을 과다노출된 영상을 통해 하얗게 비워버린다. 그 비워진 자리를 다시 채워 넣게 될 것은 무엇일까. 유운성/ akeldama@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