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J. 맹키위츠(1897~1953)
허먼 J. 맹키위츠는 시나리오작가로 활동하기 전 기자 및 드라마 평론가로 활동했다. ‘뉴욕에서 가장 재밌는 사람’ 소리를 듣던 그는 할리우드로 향해 자신의 장기를 영화에 녹여내기 시작한다. 파라마운트와 MGM을 거치며 <8시 석찬>(1933), <오즈의 마법사>(1939) 등 수십편에 참여했는데, 엔딩 크레딧에 이름이 기재되지 않은 경우도 수두룩했다. 대표적인 예가 <오즈의 마법사>. 캔자스의 일상은 흑백으로 환상의 세계인 오즈는 컬러로 그리자는 아이디어는 바로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하지만 맹키위츠는 술에 빠져 지내는 날이 많았다. <맹크>에도 나오는 대사지만 “내가 같이 일하기 싫은 제작자가 반, 나와 일하기 싫은 제작자가 반”인 상황일 때 오슨 웰스는 맹키위츠에게 시나리오를 맡기고, <시민 케인>이 탄생한다.
오슨 웰스(1915~85)
<시민 케인>이 탄생하기 전의 일을 그림에도 불구하고 <맹크>에서 오슨 웰스는 ‘젊은 천재’ , ‘꼬마 거장’으로 불린다. 첫 장편영화 <시민 케인>을 만들기 전부터 웰스는 유명인이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배우 겸 감독으로 활약했고, 흑인 배우들로 꾸린 연극 <부두 맥베스>와 제작 무산의 압박에 저항했던 뮤지컬 <요람은 흔들리리라> 등으로 연극계를 접수한 상태였다. RKO 픽처스는 <시민 케인>에 투자하며 24살의 웰스에게 마음껏 팀을 꾸릴 수 있게 했고 최종 편집권도 보장했다.
<시민 케인> 이후엔 <위대한 앰버슨가>(1942),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7), <악의 손길>(1958) 등을 만들며 꼬마 거장에서 진짜 거장이 된다. 또한 웰스는 훌륭한 배우였다. <시민 케인>의 케인을 비롯해 다수의 본인 연출작에서 연기를 겸했다. 한편 <맹크>에서 오슨 웰스는 <어둠의 심연> 준비로 바쁘다는 얘기를 하는데,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을 영화화하려던 계획은 결국 무산된다. 이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지옥의 묵시록>이다.
매리언 데이비스(1897~1961)
매리언 데이비스는 20세기 초 미국 미디어계의 제왕이었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정부로 기억되곤 한다. 데이비스의 삶에서 허스트의 그림자를 지울 순 없지만, 그럼에도 데이비스는 무엇보다 배우였다. 1916년 <지그펠드 폴리스> 공연 중 자신보다 34살이나 많은 허스트를 만났고, 허스트는 데이비스를 위해 영화사를 차렸다. 무성영화 <웬 나이트후드 워즈 인 플라워>(1922)와 <리틀 올드 뉴욕>(1923), 유성영화 <멍청이>(1930), <고잉 할리우드>(1933) 등에 출연했다. <시민 케인>에서 케인의 두 번째 부인인 수잔의 실제 모델로 알려졌지만, 오슨 웰스는 데이비스의 사후 자서전 <더 타임스 위 해드> 서문에서 실력이 형편없는 가수 수잔은 창작된 캐릭터이며 데이비스와 닮지 않았다고 썼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1863~1951)
허스트 커뮤니케이션스의 창업주이자 황색저널리즘의 선구자이며 미국의 신문왕으로 불렸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1887년 아버지가 소유한 <이그재미너>를 물려받으면서 신문 업계에 진출했다. 1895년 뉴욕의 <모닝 저널>을 인수해 <저널 아메리칸>으로 이름과 성격을 바꾸고, 이후 공격적으로 각 도시의 언론사를 매수하며 허스트 제국을 만들어갔다.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시민 케인>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고는 영화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도 숱하게 놓았다.
조셉 L. 맹키위츠(1909~93)
조셉 L. 맹키위츠. 사진 제공 SHUTTERSTOCK.
허먼 맹키위츠의 동생. <맹크>에서는 1930년대와 40년대, 가장 드라마틱하게 변한 인물로 묘사된다. 형을 통해 파라마운트에서 작가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주변의 눈치를 보던 그는 대공황 이후 할리우드의 보수적 분위기를 호기로 삼았다.
이후 <시민 케인> 시나리오가 실존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좀더 돈을 벌 수 있는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등 철저히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제작자가 된다. 결국 20세기 폭스에서 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세 부인>(1949)으로 오스카 3관왕, <이브의 모든 것>(1950)으로 오스카 6관왕을 하며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20세기 폭스의 야심작 <클레오파트라>(1963)의 흥행 실패로 폭스와 맹키위츠 모두 큰 타격을 입는다.
루이스 B. 메이어(1884~1957)
MGM(메트로 골드윈 메이어)의 공동 창립자 겸 영화 제작자. 그의 경영 원칙은 MGM이 할리우드에서 가장 많은 감독과 작가, 배우를 거느리는 스튜디오로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전성기 때는 한번에 16~18편의 영화를 촬영할 수 있는 수준. 1930년대 초중반에는 어빙 솔버그와 전략적으로 협업했다. 메이어는 스튜디오의 비즈니스를 담당하고 솔버그는 MGM 영화의 제작을 관할했다. 솔버그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에도 MGM의 전성기는 이어졌고 1939년에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베이비 인 암스> <서커스에서>, 그리고 그레타 가르보의 <니노치카>를 제작했다. 주제 면에서 가족주의를 강조하고 스펙터클과 낙관주의를 선호하며, 뮤지컬 장르를 선호했던 제작자였다. <맹크>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메이어는 미디어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한때 캘리포니아 공화당의 의장이었다.
어빙 솔버그(1899~1936)
‘천재 소년’이라 불렸던 MGM의 젊은 제작자. <맹크>에서는 업튼 싱클레어의 소설 판권을 샀다가 갈등을 겪은 일, 당대 최고의 코미디 그룹 막스 형제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메이어와의 관계가 썩 좋지만은 않았는데, 솔버그는 자신이 메이어만큼의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메이어는 MGM 작품이 솔버그의 공인 것처럼 치부되는 분위기를 견제했다. 심장 문제로 37살에 세상을 떠났다.
존 하우스먼(1902~88)
알코올중독자였던 허먼 J. 맹키위츠가 <시민 케인> 시나리오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를 감시하며 <시민 케인> 제작을 도왔던 인물. 오슨 웰스가 뉴욕에서 흑인 배우 주연으로 무대에 올린 <맥베스>(이른바 <부두 맥베스>)가 <맹크>에서 잠깐 언급되는데, 존 하우스먼은 이 당시에도 오슨 웰스와 파트너 관계에 있었다. 이후 <시민케인>의 공적은 맹키위츠에게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오슨 웰스와 관계가 소원해졌다. 이후 그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각본을 쓴 <블루 달리아>(1946)를 제작하고,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1973)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데이비드 O. 셀즈닉(1902~65)
데이비드 O. 셀즈닉. 사진 제공 SHUTTERSTOCK.
<스타탄생>(1937),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레베카>(1940), <백주의 결투>(1946), <무기여 잘 있거라>(1957) 등을 제작한 고전기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 MGM에서 경력을 시작해 파라마운트와 RKO를 거쳐 다시 MGM 부사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곳 스튜디오보다 독립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원했던 그는 1937년 자신의 제작사 셀즈닉인터내셔널을 설립한다. 영국 에든버러 예술제의 셀즈닉상은 그의 이름을 본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