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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짓'의 유연한 아름다움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트랜짓>이라는 제목은 ‘통행증’ 또는 ‘통과 비자’로 번역된다. 때로는 제목만으로도 걸작임을 확신하게 되는 영화가 있다. 에릭 로메르의 <삼중 스파이>를 떠올리게 하는 이 유려한 영화의 매혹을 굳이 말로 풀자니 몹시도 지리멸렬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난감함은 이 영화와 함께 수입된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또 다른 신작 <운디네>가 개봉하는 시점에 다시 마주하고 싶다.

얼굴의 뒷면

<트랜짓>

“아직 관능의 열기가 남아 있는 무덤 속으로 내려가고 싶다.” -앙드레 지드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트랜짓>을 보고 나서 덧붙이고픈 말은 많지 않다. 이 유연하고 매혹적인 영화 앞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오인과 매혹, 불안과 부끄러움, 우정과 연대, 고독과 외면, 돌연한 죽음과 지속되는 삶, 떠나는 것과 기다린다는 것, 무엇보다도 파국적인 사랑에의 열망…. 어쩌면 그 모든 감정과 선택들에 대해. 그러한 감정을 운용하는 영화의 리듬을 잊기 어렵다. <트랜짓>은 불투명한 시간과 감정의 흐름을 다루면서도(영화 속 게오르그(프란츠 로고브슈키)가 읽는 바이델의 원고에 적힌 표현을 빌리면 “모두가 모호하고 끔찍한 일에 연루돼 있”는데도), 놀랍도록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각인된다. 이 영화가 전해주는 아름다움에 견줄 만한 동시대 유럽의 다른 모던 내러티브 시네마의 사례를 선뜻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영화의 그런 유연한 아름다움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 밝혀내는 것 또한 난감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적지 않은 상찬에도 불구하고 <트랜짓>을 향한 비평적 반응은 비교적 단선적이다. 부재하는 대상의 그림자를 좇을 수밖에 없는 자들의 초현실적인 멜로드라마라는 식으로 축소되거나, 오늘날의 시급한 테마인 전쟁 난민과 불법 이민자 문제를 1940년대 홀로코스트의 풍경과 오버랩하는 작업이라는 손쉬운 결론으로 환원되며, 그러한 명제들이 구성하는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의 누락된 기억을 누아르 장르의 틀에 접합한 페촐트의 전작 <피닉스>가 ‘20세기 독일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명쾌하게 환원되지 않는 것처럼, <트랜짓> 또한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두른 채 홀로코스트와 난민 문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파시즘의 그림자를 비판’하는 영화로 일반화되지 않는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게오르그를 바라보는 마리(파울라 베어)의 매혹적인 자세가그러하듯, <트랜짓>은 조금 다른 시각에서의 접근을 요구한다. 그러한 시각을 전제할 때, <트랜짓>이 제기하는 근본적인 질문은 ‘떠남’과 ‘기다림’을 왕복하는 인물들의 신체, 그 가운데서도 ‘얼굴’이라는 특권적인 장소의 복합성을 향해 있다.

교묘한 착시효과

<트랜짓>은 두장의 편지가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수신인은 작가 바이델이다. 한장은 작가가 멕시코로 와도 좋다는 내용이 담긴 마르세유의 멕시코 영사관에서 보낸 비자 허가서이고, 다른 한장은 바이델의 아내 마리에게서 온 편지이다. 게오르그는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향한 호텔 방에서 바이델을 만나는 대신 자살한 그의 흔적과 마주한다. 시체는 신원 불명 상태로 화장되었고, 무명의 무덤에 묻혔다고 한다. 편지를 전달하기는커녕 도리어 얻게 된 바이델의 원고 더미에서 게오르그는 다시 두장의 편지를 발견한다. 하나는 원고를 출간할 수 없어 아쉽다는 출판사의 서한이고, 다른 하나는 아내 마리가 보낸 것이다. 마리가 보낸 두장의 편지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쓰여 있다. 바이델의 수중에 있던 편지에는 결혼 생활은 끝이라는 통보가, 게오르그가 끝내 전달하지 못한 두 번째 편지에는 마르세유에서 기다릴 테니 돌아오라는 요청이 적혀있다.

다소 혼란스럽게 주어지는 몇장의 편지는 시간적인 거리를 통해 형성되는 송신인(마리)과 수신인(바이델), 그리고 그 사이에서 편지를 읽는 게오르그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환기한다. 마르세유로 떠나는 트레일러 안에서 게오르그는 서로 다른 시간에 쓰인 네장의 편지를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현재와 떼어놓을 수 없는 과거에 사로잡히고, ‘떠남’과 ‘기다림’을 오가는 마리의 내밀한 심리적 궤적에 접근한다. 편지를 읽는 행위는 이야기를 추동하는 하나의 기호이면서 동시에 시간을 교란시키는 작은 신호로 발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게오르그는 죽은 바이델의 자리에 가까워진다(그는 마르세유로 돌아오라는 마리의 편지를 읽으며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게오르그가 편지에 빠져드는 동안, 다리 부상을 입은 동행인 하인츠가 죽고 만다. 게오르그는 두장의 편지를 받아들임과 함께, 두 사람의 죽음을 나란히 마주한다. 두개의 빈자리. 신분증과 비자가 없는 이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 자리에 부재하는 다른 이름들을 대입하기 시작한다.

페촐트의 필모그래피를 지켜봐온 관객이라면 <트랜짓>은 일견 익숙한 세부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투박한 단순화를 무릅쓰고 거론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세 사람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감정의 삼각관계, 도피와 탈출을 동력으로 삼는 내러티브 구조, 출국심사장이나 국경지대와 같은 경계 공간, 타자의 죽음과 낯선 국외자들과의 마주침, 엄습하는 수용소의 흔적, 불가해한 충동에 사로잡히며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인물들…. 본격적인 첫 번째 극장용 장편영화인 <내가 속한 나라>에서부터, 국내에서도 제한적으로 개봉하거나 상영된 <바바라>와 <피닉스>에 이르기까지 페촐트는 인간과 다른 인간, 또는 인물과 공간의 관계에서 설정되는 예민한 경계를 가로지르며 불가해한 충동에 사로잡힌 채 낯선 장소(혹은 장르)를 배회하는 유령의 이야기를 반복한다. <트랜짓>에서 페촐트는 그러한 경계의 감각이 거의 감지되지 않는 수준까지 활성화된 가상의 무대를 그려낸다. 주지하다시피, 이 영화에서는 현대의 마르세유와 2차대전 시기의 이야기가 겹치고, 사방으로 열린 경유지를 배경으로 삼지만 인물들은 감옥에 갇힌 것처럼 도시 외부로부터 격리되어있다. 과거는 현재에 되살아나고, 또한 현재는 과거에 속한다. 이러한 시간적 경계의 뒤틀림은 게오르그가 마리의 편지를 읽는 순간에, 쓰는 쪽과 읽는 쪽의 시간적 격차가 현재에 침입하는 순간에 일찍이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트랜짓>에서 특별하게 각인되는 페촐트의 영화적 인장이라면 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았지만 결코 같지 않은, 혹은 쉽게 분간할 만큼 다르지만 실상은 같은 이들의 얼굴과 신체를 마주볼 때 벌어지는 교묘한 착시효과일 것이다. 잃어버린 딸 마리를 찾기 위해 방문한 베를린에서 마리와 똑 닮은 외모를 하고, 같은 위치에 흉터와 점을 지닌 니나를 발견하는 <유령>의 프랑스와즈,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뒤 얼굴에 입은 상처로 인해 성형수술을 하고 돌아온 아내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 채 그녀를 이용해 아내의 재산을 가로채려는 <피닉스>의 남편 조니, 그리고 게오르그의 뒷모습을 보고 자꾸만 남편 바이델로 착각하는 <트랜짓>의 마리는 모두 눈앞의 ‘얼굴’을 시각적으로 분간하지 못하는 병리적 증상을 호소하며 페촐트의 세계를 복수의 ‘얼굴들’이 공존하는 기이한 시공간으로 물들인다.

마리는 몇번이고 게오르그의 뒷모습을 보고 다가오지만, 게오르그가 뒤를 돌아 얼굴을 드러내면 이내 실망한 표정으로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서로 다른 방향의 움직임. 이것이 <트랜짓>에서 가장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운동의 형상이다. 돌연 가까워지는 마리의 걸음이 끝내 게오르그에게 닿을 때 우리는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가? 그것은바이델의 통행 비자를 가지고 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바이델로 오인하는 게오르그의 얼굴이, 하지만 결코 바이델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가 바이델의 신원을 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마리가 바라보는 바이델과 같지 않다. 카메라 앞에 분명히 존재하는 게오르그의 얼굴은 영화에서 단 한 차례도 가시적으로 제시되지 않는 바이델의 얼굴에 미치지 못한다.

뒤늦은 사랑이란 이처럼 가혹하게도 상대를 마주볼 수 없는 것이다. 혹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기 직전까지만 간신히 성립되는 어떤 것이다. 마리가 남자의 어깨를 붙잡는 순간까지 지속되던 사랑의 가능성은, 남자가 뒤를 돌아보고 그가 게오르그임이 밝혀지는 찰나에 홀연히 소멸해버리고 만다. 필립 가렐의 말을 빌려, “시간이 사랑을 파괴하듯, 영화 또한 사랑을 파괴”함을 페촐트는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트랜짓>에서 고집스럽게 반복되는 형상은 사랑의 가능성을 파기하는 표면으로서의 얼굴이 아니라 그 뒷면이다. 이 영화는 뒷모습으로 유지되는 사랑의 형식을 모색한다. 그러고 보면 게오르그가 거리에서 마리를 마주칠 때마다, 또는 그가 의사를 찾기 위해 리차드의 호텔 방에 찾아왔을 때 카메라가 주의 깊게 바라보는 건 마리의 얼굴이 아니라 게오르그에게서 천천히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이었다(동시대 연출자 가운데 페촐트만큼 뒷모습의 관능을 매혹적으로 포착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사랑의 가능성을 보존하는 뒷모습

게오르그는 영사관에서 만난 어느 유대인 여성과 우연히 재회해 식사를 하고 담배를 나눠 피운다. 난간에 기댄 그의 얼굴에 드물게 평온함이 감돌고 있다. 이어지는 컷에서 그의 옆에 있던 여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엔 그녀가 피운 담배만이 남아 있다. 게오르그는 유령과 동행한 걸까. 그렇지 않다.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그녀가 난간에서 추락해 자살을 선택했음을 보게 된다. 마침 게오르그는 하인츠의 아내인 멜리사와 그의 아들 드리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오는 길이다. 그들이 유령이라면 그건 허기를 호소하고 담배연기를 내뿜는, 중력에 붙들린 물질적인 유령이다. 이러한 장면들에서 카메라는 한순간에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져버리는 이미지의 공허를 직시하도록 이끈다. 게오르그는 그런 부재와 손실, 이미지의 무심한 침묵을 마주한다. 이와 같이 눈에 비치는 이미지의 외양은 실은 불확실하기 짝이 없다. 가령, 식당에서 다시 마주친 게오르그와 마리가 열정적으로 껴안는 모습은 표면적으로는 연인, 또는 부부의 감동적인 재회로 보이지만 정작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열망을 표출하고 있었다. 게오르그는 마리와 함께 떠나기 위해 바이델의 이름으로 두장의 배편을 영사관에 요구했고, 마리는 그것을 바이델이 돌아온 증거로 오인해서 받아들였다. 마리는 바이델이 배에서 기다릴 것으로 상상하며 게오르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의 표정을 상상해봐요. 난간에 서 있을 때, 이름을 속삭이면 뒤돌아보겠죠.”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뒷모습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자세가 무엇을 뜻하는지. 난간에 선 남자는 바이델이 아닐 것이다. 그 남자가 뒤돌아보는 순간, 반복된 실패가 다시 엄습하게 될 것이다. 과거에 적힌 편지의 문장들이 아른거리고,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화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틈새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현재의 이미지는 투명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만다.

시간의 구체성을 와해시킨 <트랜짓>이 우정과 연대를 결론으로 택하거나, 혹은 반성과 성찰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기어코‘사랑’을 붙잡으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대상을 향한 순수한 매혹, 즉 사랑은 영화적 시공의 물리적 조건을 초과하고, 인물이 직면한 정체성의 분열을 끌어안는 유일한 원리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사랑이 지탱하는 세계의 지속은 고개를 돌리는 작은 반응만으로도 중단되어버릴 만큼 연약하기 그지없다. 페촐트는 그런 불가능한 사랑의 서사를 빌려온 뒤 뒷모습이라는 유예의 형상을 창안한다. 마리는 마르세유에 바이델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가 나타났다는 장소들을 따라갔다고 한다. 물론 그건 바이델이 아니라 게오르그였다. 밤거리를 홀로 걷는 마리의 뒷모습을 향해 게오르그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영화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확인한, 그러나 뒤를 돌아보기까지 잠시 머뭇거리는 마리의 뒷모습에서 화면을 멈춘다. 그들의 뒷모습은 훼손되기 직전의 사랑의 가능성을 보존하면서, 들뢰즈가 언급한 현대영화의 과업인 “신체를 구상할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믿음을 다시 부여할 것”(<시네마Ⅱ>)을 수행한다.

게오르그가 그랬던 것처럼, 마르세유에서 길지 않은 도피 생활을 보낸 뒤 피레네산맥을 넘어 망명을 시도한 바 있는 발터 베냐민은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극도로 정밀한 기술을 통해 제작된 사진에는 회화가 더이상 우리에게 줄 수 없게 된 어떤 신비로움이 있다. 사진가의 예술적 기량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모델의 자세가 아무리 계획대로라고 해도, 보는 사람이 그런 사진 속에서 우연이라는,‘지금 여기’라는 빛점 한개, 현실의 빛으로 사진의 성질을 태우는 그 작은 빛점 한개를 찾고 싶어지는 것, 눈에 띄지 않는 그 작은 한곳을 찾아내고 싶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금도 미래의 일들은 예전에 과거가 된 그 1분 속에 뚜렷이 깃들어 있기에 지금 우리는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미래를 발견할 수 있다.” 영화의 결말부, 게오르그는 카페에 앉아 마지막으로 다시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마리의 발걸음을, 눈앞에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목격한다. 마리가 전날 배에 탑승했고, 그 배는 기뢰에 맞아 침몰해 단 한명의 생존자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얼마 뒤의 일이다. 그렇다면 게오르그의 눈에 비친 마리는 단지 환상인 걸까? 혹은 과거의 기억과 열망이 현재에 깃들어 떠오른 것일까?

게오르그는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낯선 시간의 밀실에서 그는 지나간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 그래서 목적지없이 매번 앉았던 식당 한 자리에 계속 머무르며 기다린다. 무엇도 아닌 단지 뒷모습일 뿐인 상태로. 마리가 나타나 다시 그의 뒷모습을 보고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영화 속 화자의 목소리는 게오르그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문을 등지고 앉아 문이 열릴 때마다 쳐다보았다.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잘 안되는 것 같았다. 매번 그는 고개를 돌렸다. (…) 난 그에게 은신처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뒷모습에서 고개를 돌린 얼굴로, 다시 뒷모습에서 고개를 돌린 얼굴로…. 또 한번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카메라는 뒤를 돌아보는 게오르그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 누가 온 건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더이상 뒷모습이기를 중단하고 마침내 작은 미소를 보이는 남자의 투명한 얼굴에서 페촐트는 영화를 끝낼 뿐이다.

“모델들이 사진에 찍힌 순간에서 벗어나는 삶이 아닌 사진에 찍힌 순간으로 들어서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그런 촬영방식(모델이 장시간 부동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초기 촬영술) 때문이었다. 오래 지속되는 촬영 시간 동안 모델들은 말하자면 사진 속 존재로 서서히 완성되어갔다.”(<사진의 작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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