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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소녀' 이주영 - 정점을 향해
임수연 사진 백종헌 2020-08-25

이주영이란 이름을 처음 기억하게 된 건 인스타그램에서 ‘쇼트커트가 잘 어울리는 여자’ 라는 설명과 함께 이미지가 널리 공유됐던 때였다. 사진으로 먼저 만난 그가 트위터에서 맥 딜리버리 아르바이트를 하다 여성이기에 겪은 무례한 일을 공유하고 “여배우는 여성 혐오적 표현”이라고 발언할 땐, 단단하고 소신 있는 신인배우의 탄생이 무척 반가웠다. 이후 이주영의 행보는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춘몽>(2016), <꿈의 제인>(2016), <누에치던 방>(2016), <메기>(2018) 등을 거치며 차근차근 독립영화계에서 중요한 이름으로 떠오른 그는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성공으로 상업 영역까지 아우르는 라이징 스타가 됐다. MTF 트랜스젠더(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사람) 마현은 전통적인 여성성에 얽매이지 않는 배우의 이미지와 시너지를 내며 자신만의 서사를 완성했고,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무려 175만명(6월4일 기준)에 이를 만큼 더 많은 이들이 이주영을 각인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전상영 매진 기록을 세운 <야구소녀>는 지금까지 이주영이 걸어온 길을 압축하는, 마치 이주영을 위해 시나리오를 쓴 듯한 영화다.

최고구속 134km, ‘천재 야구소녀’로 불리며 고교 야구부에 입성한 주수인은 졸업 후 프로팀에 가고 싶다는 꿈을 안고 있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여성이 프로선수가 된 역사는 없었다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친다. <춘몽> 당시 인연을 맺은 이준동 집행위원장의 권유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이주영은 3박4일간의 심사 일정을 마치고 새벽에 서울에 올라와 <씨네21> 커버 스타 촬영에 함께했다. 한결같이 또렷한 눈으로 지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그와의 만남을 옮긴다. 같은 날 촬영한 ‘이주영의 인생 영화 월드컵’ 영상은 6월 9일 밤 9시 <씨네21> 공식 유튜브 계정에서 감상할 수 있다.

-실제 프로 입단을 준비하는 고등학생 야구부 사이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학생들의 라커 룸을 대기실로 썼는데, 선수들이 “부상 위험이 있다 보니 원래 겨울에는 절대 훈련을 안 한다”고 하는 거다. 그래서 감독님에게 우리는 왜 1~2월에 촬영을 해야만 했냐고 물었다. 얇은 야구복만 입고 겨울 내내 촬영했더니 추위에 강해진 게 아니라 오히려 약해졌다. (웃음) 그런데 입김이 나오는 파리한 느낌이 <야구소녀>와 절묘하게 어울리더라

-<누에치던 방>이나 <메기> 모두 일반적인 영화 문법을 비트는 재미가 있는 작품들이었다. <야구소녀>는 같은 독립영화로 분류되지만 훨씬 대중 친화적이다.

=<누에치던 방>이나 <메기>나 영화를 구성하는 방식이 새로웠던 작품이지만 일상과 다른 연기 톤을 구사하지는 않았다. 배우의 연기가 자연스러울 때 오히려 영화의 독특한 색깔이 잘 구현될 수 있다. <야구소녀>는 전작들보다 내러티브가 확실하지만 내가 해왔던 방식대로 인물을 구축하려 했다. 다만 캐릭터를 잘 따라와야 하는 서사 중심의 영화다 보니 좀더 디테일한 표현들을 많이 고민했다. <야구소녀>는 여자이자 약자인 주수인의 도전기이면서, 그냥 한 사람의 도전기이기도 하다. 가령 수인이가 여자여서 힘들기도 하지만 프로선수가 되는 것이 원래 힘들다는 대사가 있다. 이런 대사가 혹시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을까, 어떻게 이 미묘한 부분을 잡아갈 수 있을까에 대해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나눴다.

-여자가 프로야구 선수가 된 전례가 없는 상황에서 수인이는 다른 대안도 없이 야구 하나만 바라본다. 연기하는 입장에서 수인이가 100% 이해되던가.

=주수인 개인이 느끼는 벽도 있지만, 그 나이에는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 있기에 절감하는 현실의 벽이 또 있다. 악인이 없고 모든 캐릭터에게 납득할만한 입장이 있는 <야구소녀>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가 안 가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아빠(주귀남)였다. (웃음) 그런데 수인에게는 아빠가 하는 일 없이 재산만 탕진하고 있는 모습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빠는 수인이가 나아가는 길에 방해가 되면 안된다며 무조건 응원해주자고 하고, 엄마(염혜란)는 좀더 현실적인 고민을 한다. 수인이는 어린 마음에 자신을 응원해주는 아빠를 가깝게 느끼고 엄마와는 아예 대화를 차단하려 하는데, 엄마와의 관계를 우리가 좀더 세심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감독님과 많이 이야기했다. 나 역시 여자라서 그런지, 관객이 아빠에겐 연민을 느끼고 엄마는 너무 유난스럽다고 느끼지는 않았으면 했다. 그런 묘사가 불편한 관객이 분명 있을거다. 그래서 초반에는 엄마와 아빠의 설정을 바꿔도 재밌을 것 같다는 제안을 했다. 현실에 이런 여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않느냐며 쉽게 접근하기보다는, 모든 캐릭터가 나름의 방식으로 수인을 걱정하고 수인 역시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비치길 바랐다.

-<야구소녀>는 여자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점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을 그린다. 그런데 주변 남자 캐릭터들을 보면, 수인을 서포트하는 코치 진태(이준혁)와 수인의 동료 정호(곽동연)를 비롯해 트라이 아웃에서는 수인을 무시하던 남자 선수들까지 결국 그를 응원하게 되지 않나. 영화를 보면서 개인적으로는,‘여자가 여자를 돕는 건 당연하고 남자들도 함께할 수 있지 않겠냐’고 넌지시 제안하는 태도를 읽었다. 훨씬 온건하고 대중적인 접근이기도 하고.

=<야구소녀>는 여성 서사 영화다.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가 나오는 게 주목할만하고 특별한 일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아져서 이런 표현을 굳이 쓰지 않는 날이 왔으면 하지만. (웃음) 여성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다루는 페미니즘적 요소가 있는 작품이지만, 영화 자체로도 인정받고 좀더 온화한 태도를 취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처음부터 <야구소녀>에 대한 내 입장은 그랬다

-수인을 둘러싼 상황이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그는 엄청난 의욕과 열정을 갖고있다. 하지만 이를 감정이 분출되는 방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종종 무덤덤한 표정을 보여주는 순간도 많다.

=수인은 보여지는 노력으로 현실을 깨나가는 캐릭터가 아니다. 해낼 거라는 열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쪽이 오히려 캐릭터나 이야기를 납작하게 만들 것같았다. 시나리오에서 이미 수인의 유니버스는 명확하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온전히 느끼기만 해도 수인의 감정은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다. 이 벽을 깨나가는, 전진하는 이미지를 과하게 발산하며 보여주기보다는 내 안의 벽을 부수는 느낌으로, 내면의 싸움을 하는 이미지로 연기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이슈를 좀더 고민하게 되는 작업이었을 듯하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으니 스포츠가 남성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식의 논리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나.

=폼이나 제구력은 연습을 할수록 좋아진다. 폼은 완벽에 가깝게 만들어놓고 현장에서 촬영을 통해 보완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와 달리 구속은 내가 근력을 늘리지 않으면 더 나아질 수가 없었다. 여자가 구속130km를 던지는 게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는 절망감을 연습 과정에서 많이 느꼈다. 그런데 투수는 어느 정도 머리를 쓰는 포지션이다. 극중에서 수인이 직구가 아닌 너클볼로 승부를 보는 식으로 상황을 비튼다. 당장 눈에 보이는 신체 능력에 한계가 있다고 해서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다른 부분에서 밀리지않는데 원래 투구의 정수는 구속이고 그게 부족하면 아예 안되는 걸로 취급해버린다거나, 여자라는 이유로 작은 부분을 큰 문제로 취급하기도 한다. 시나리오를 공부하고 감독님과 대화하며 준비하는 과정도 있었지만, 직접 몸으로 훈련해보면서 느낀 수인의 감정이 가장 생생한 도움을 줬다.

-엔딩은 어떻게 봤나.

=수인이 자신의 미래를 바라보는 듯한 숏으로 끝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감독님과 얘기를 많이 했다. 결국 수인이 프로선수가 되어야 하나? 이게 현실이었다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영화에서만큼은 나름 현실적인 성취를 할 수 있게 해주자고 결론을 냈다. 왜냐하면 이 아이가 이 정도도 이루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거다. 트라이 아웃도 잘 치르고 성적도 잘 받았는데, 지금까지 여자 프로야구 선수가 없었다는 이유로 좌절시키면 <야구소녀>의 메시지에 반하는 것 같았다. 이후 수인의 삶이 엄청 찬란해진다거나 메이저리그에 가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거다. 영화 속 대사에서처럼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좀더 희망찬 엔딩을 취하고 싶었다.

-<이태원 클라쓰>가 JTBC 드라마 역대 시청률 3위 기록을 세우고 종영했다. 주연이 아닌 배우들까지 고루 수혜를 입고 한류도 얻었다는 이야기가 업계에서 자자하다. 이주영 배우도 <이태원 클라쓰> 이후 생애 처음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헤라 화장품 광고까지 찍지 않았나. 사실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에서 이주영을 볼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웃음)

=주변에서는 내게 고생길 끝났고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도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난 아직 첫발도 못 뗀 것 같은데. (웃음) 매일 일을 해왔지만 사람들은 잘 모르던 시간들이 쌓이고 쌓인 뒤, 이제 조금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정도가 됐다고 느끼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일을 경험하는 건 정말 좋다. 내가 광고도 찍을 수 있는 위치가 됐구나 하는 것보다는 내가 갖고 있는 능력치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구나, 기회의 폭이 넓어졌구나, 그럼 그 안에서 내가 했던 대로 하면 된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이주영이 출연하는 독립영화는 주목도가 확연히 달라질 만큼 원래 마니아층이 확고했는데, 이제는 상업 영역까지 아우르는 라이징 스타가 됐다. 예전부터 또렷한 주관을 갖고 시나리오를 선택하고 그에 관한 발언도 주저하지 않던 배우인 만큼 고민이 더 깊어진 부분이 있을 텐데.

=내가 엄청난 것을 쥐고 있진 않지만 일차적으로 배우라는 직업이 갖고 있는 영향력이, 더불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자세가 가진 영향력이 있을 것이다. 그걸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편이다. 평범한 사람으로서 잘 살아갈 때 배우 이주영도 잘 걸어갈 수 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그때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조금이나마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게 있다면, 소소하게나마 신념을 갖고 일하고 싶다. 몇년 전과 좀 다르게 생각하게 된 부분도, 몇년 전이었다면 다르게 선택했을 것 같은 부분도 있다. 나 역시 몇년 전만 해도 내가 <런닝맨>에 출연해 게임을 하게 될 줄 몰랐다.(웃음) 2~3년 전에 했던 생각 중 지금 돌이켜보면 되게 고리타분한 것도 많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 나 역시 항상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배우가 갖고 있는 어떤 모습이 사람들에게 아주 약간의 영향만 끼칠 수 있다면, 그거면 되지 않을까. 부담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배우가 신념을 갖고 어떤 방향성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작품이 됐든 인권, 여권, 동물권 등 모든 종류의 권리가 간과되어서는 안된다고 늘 생각한다. 그리고 2020년에 이런 부분을 고려하지 않는 작품은 이미 퇴보했다고 평가받는 것 같다. 많은 감독과 제작자, 작가와 아티스트들이 이런 이슈를 하위 고려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몇년 전만 해도 먼저 주장해야 했으나 이제는 같이 얘기하며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런 선순환이 가능하게끔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부분이 분명 있다. 흐름에 발맞춰서 나 역시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2016년쯤 신인배우로 이름을 알리던 시절, 연기를 지속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고 하지 않았나. 보통 신인들은 죽을 때까지 연기하고 싶다고들 말하는데 사뭇 다른 대답이었다. (웃음) 지금은 어떤가.

=똑같다. 지금 이 일이 너무 좋고 재밌지만 10년 후, 20년 후까지 좋아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하루하루 생각이 달라지기도 하는 게 인간이니까. 이 일을 하면서 나름의 성취를 느낀다면 계속 쭉 갈 테고, 다른 일이 하고 싶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정점을 어떻게든 찍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정점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느꼈을 때 이 정도면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했다는 수준은 반드시 도달하고 싶다. 내가 느끼기에 아직 멀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언젠가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사실은 연출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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