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등을 연출한 김수용 감독이 이만희 감독과 경부고속도로를 지날 때의 일이다. 당시 베트남에서 전쟁영화 <고보이강의 다리>를 찍고 돌아온 이만희 감독은 김수용 감독에게 경부고속도로가 무슨 색깔로 보이느냐고 물었다. 김수용 감독은 카메라의 노출 얘기인가 싶어서 맑은 날엔 하얗게, 흐릴 땐 검게 찍힌다고 답했다. 그러자 이만희 감독은 자기 눈엔 그것이 핏빛으로 보인다며 그것은 베트남전쟁에서 희생된 병사들이 흘린 피 때문이라고 했다. 김수용 감독은 지금은 누구든 할 수 있는 말이지만, 1970년대엔 어림없는 주장이었다고 그때를 회고했다.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참전의 대가로 미국에 장기차관을 경제원조 성격으로 지원받았고, 이중 일부를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으로 충당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베트남 특수’가 국가경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가늠한다면 이만희 감독의 말에 숨은 뜻을 쉽게 헤아릴 수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70년, 베트남 현지에서 국군영화제작소가 만든 영화를 찍고 돌아온 이만희 감독에겐 길게 뻗은 고속도로가 파병 군인이 흘린 핏빛으로 보였을 터이다. 파병 군인은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세계를 수호하는 전쟁에 참전한 ‘용사’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국가경제발전에 동원된 자원이기도 했다. 1992년 9월, 베트남전쟁에서 고엽제 피해를 본 ‘파월 용사’들이 피해자 대책 마련 촉구를 위한 점거 시위를 벌였던 장소가 경부고속도로였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7월 7일에 완공됐고, 올해로 만들어진 지 반세기가 지났다. 건설 당시 단군 이래 최대토목공사라 불리던 경부고속도로는 공사 기간 중 사망한 건설노동자도 상당수였는데 공식적으로는 77명이었다. 건설 완공일과 같게 77명이라는 숫자로 맞추었지 실은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노동자가 희생됐을 거라는 추측 또한 있다. 고속도로 완공 후, 박정희 정권은 추풍령휴게소 한복판에 30m가 넘는 웅장한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탑을 세워 스스로 위업을 칭송했다. 반면 건설 당시 사망한 노동자의 희생을 기리는 건설 순직자위령탑은 고속도로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금강휴게소 맞은편 언덕 위에 숨은 듯 자리 잡았다. 엄청난 크기의기념탑에 자리를 내준 소박한 위령탑의 주인들이 진짜 경부고속도로 건설 신화의 주인공일지 모른다.영화 <니나 내나>에서 미정이 잃어버린 엄마의 유골함을 되찾은 장소가 바로 금강휴게소 위령탑 근처다. 영화 속에서 미정은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며 하늘 높이 매달린 항공장애 표시구를 보며 저런 건 누가 달았을까 묻는다. 당연한 듯 보이는 이 세상 모든 것들엔 뒤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이들이 존재한다. 영화 촬영 당시, 송전탑 사이 표시구를 찍는데 마침 송전선에 매달린 노동자의 모습이 우연히 찍혔다. 그러나 아무도 그 모습을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큰 스크린 화면에서는 너무도 작은 점처럼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세상 속에서는 거의 잊힌 듯한 그들의 존재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쉽게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수많은 작은점들이 이 세상을 오늘도 버티고 서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