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로 현실을 수선하기.” <아이리시맨>을 보다가 문득 로베르 브레송의 저 유명한 문구가 뇌리를 스쳤다. 3시간이 넘는 상영시간 동안 영화에 매몰됐다가 잠시나마 영화 바깥으로 의식이 빠져나간 건 늙은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니로)이 딸에게 냉혹한 현실을 전해 듣는 장면 때문이었다. 평생을 마피아의 히트맨으로 일했던 프랭크는 말년에 요양원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낸다. 영화 내내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바라봤던 둘째딸 페기(안나 파킨)가 이제 자신을 만나주지도 않자 프랭크는 답답한 마음에 다른 자식에게 하소연을 하러 간다. 그때 또 다른 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자신들은 아버지한테 혼날까 평생을 두려움에 떨면서 살았다고. 그걸 여태껏 몰랐냐고.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 순간 나는 내가 이 영화에, 그리고 프랭크라는 인물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프랭크의 시점에서 전개되던 영화는 페기의 순진무구한, 혹은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시선을 잠깐씩 보여주는 게 전부다. 자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아빠를 목격한 뒤 페기는 침묵한다. 결과적으로 영화에 몰입하는 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더 있다. 프랭크의 나머지 자녀들은 침묵조차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150여분에 달하는 상영시간 동안 단 1분도 허락받지 못했다. 요컨대 영화는 거의 내내 프랭크의 현실로 페기의 현실을 수선했다. 의도된 생략 끝에 영화 말미 늙은 프랭크에게 선언되는 진실은 그동안의 시선이 철저히 프랭크의(혹은 마틴 스코시즈의) 제한된 시점이었다는 걸 알려준다. 영화는 현실의 모든 걸 재현하지 않는다. 이것은 선택과 배제 끝에 재편집된 이야기다. 이 당연하고 새삼스러우며 모두가 알고 있는 명제가 나의 몰입을 파괴하는 순간 불현듯 하나의 열쇠처럼 문이 열렸다. 이상한 포인트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단언컨대 모든 시네마는 각각의 이상한 순간들을 품고 있다. 굳이 명명한다면 관객 각자에게 열리는 그 순간이야말로 이른바 ‘시네마틱’한 순간일 것이다.
시네마와 시네마틱 사이
21세기 프랜차이즈 영화가 스크린을 점령한 지금, 마틴 스코시즈는 새삼스럽게 ‘시네마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졌다. 이건 정답을 내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물론 마틴 스코시즈는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지니고 있다. 그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장문의 원고가 그 명쾌한 답변이며 <아이리시맨> 역시 그 답변 중 하나다. 스코시즈의 답변은 오랜 시간 자신이 던져온 질문과 답이 축적된 결과다. 프랭크(혹은 미국)라는 시간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아이리시맨>처럼 스코시즈는 본인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답을 쌓아나갔다.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스코시즈가 말하는 ‘시네마’는 본인의, 또는 본인과 같은 시간대를 경험한 이들이 공감, 공유할 만한 개념이다. 다시 말해 이런 종류의 질문과 답변 사이에는 절대적인 시간과 경험이 요구된다. 다만 때로 어떤 질문은 일종의 초음파 같은 역할을 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사방으로 던진 후 돌아오는 답들을 통해 본인의 위치나 상태를 가늠하기 위한 좌표로서의 기능을 한다. 그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질문을 통해, 정확히는 질문과 돌아오는 답변을 통해 현재 자신의 좌표를 확인하고 나아가는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뒤늦게 올해의 몇몇 영화들을 꺼내와 글을 쓰기로 결심한 건 마틴 스코시즈가 새삼스레 던진 ‘시네마’에 대한 질문이 잊고있던 나의 방향과 위치를 재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2009년에 첫 비평을 쓰기 시작했으니 영화에 대해 끄적이기 시작한 지 올해로 딱 10년째다. 내게 있어 영화는 더듬어 알아가는 대상이었다. 보이는 건 하나도 없고 아는 바도 일천하여 장님 코끼리 만지듯 경험을 토대로 실체를 짐작해 나가야 하는 존재. ‘영화란 무엇인가’ 같은 거창한 질문을 가지고 시작한 것도 아닌지라 그나마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몇년이 지나고 나서야 어렴풋이 그 질문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했다. 내게 그 씨앗을 던져준 이들이 바로 로베르 브레송 , 마틴 스코시즈,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감독들이다. 그들에겐 각자의 시네마가 있는 것처럼 보였고 꾸준히 결과물을 내놓으며 그 답을 갱신해나가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들의 답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흐른다는 점이다. 이것은 답을 내는 시험이 아니라 대화를 통한 길찾기에 가깝다. 그리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종종 고개를 내밀고 부표를 띄워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스코시즈가 던진 ‘시네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런 의미에서 상업영화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지금 시네마의 의미와 위치에 대한 중요한 분기를 제공한다.
우선 전제해야 할 건 시네마에 대한 사전적이고 명확한 답이 목표지점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글은 그저 영화를 유랑하는 한 사람의 추체험과 기록 정도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어떤 영화들은 단순히 개별 분석에 그치지 않고 밑바닥에 깔린 근본적인 질문을 자극할 때가 있다. 질문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가닿는 지점은 동일하다. “그래서, 영화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영화를 만든 이 역시 치열하게 질문을 던지고 고민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반영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올해 내게 그 질문을 촉발시킨 영화가 4편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아홉 번째 장편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이하 <할리우드>),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범상치 않은 영화 <언더 더 실버레이크>, 마블 영화의 최종 결과물 <어벤져스: 엔드게임>,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다. 물론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던 질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마틴 스코시즈의 <아이리시맨>, 그리고 시네마에 대한 고백이었다. 이 자리에서 시네마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를 논하는 건 크게 의미가 없을 것 같다(로베르 브레송은 시네마를 두고 ‘사진화된 연극’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그는 시네마와 시네마토그래프를 분리시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네마는 경험의 산물이다. 우리에겐 각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각자의 시네마가 있을 뿐이다. 때문에 현재 ‘시네마’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위상에 대해선 짧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최근 블리즈컨 2019에서 공개된 세편의 시네마틱 트레일러를 흥미롭게 봤다. <디아블로4> <오버워치2>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확장팩: 어둠땅> 세편의 게임에 대한 사전영상이 공개됐는데 각 10분 남짓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게임보다 영상에 더 신경 쓴다’는 팬들의 불만이 납득이 갈 만큼 완성도 높은 트레일러였다. 개별 영상에 대한 분석을 시도해도 웬만한 영화비평 못지않게 할 수 있을 만큼 풍성한 내용이 있지만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건 그 내용이 아니라 ‘시네마틱 트레일러’라는 용어다. 우리말로 하자면 ‘영화 같은’ 혹은 ‘영화만큼 멋진’ 영상이란 의미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지만 굳이 여기에 ‘시네마틱’한 용어를 사용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순하게 분류하자면 현재 시네마란 영화를 예술적인 지위로 만들어주는 조건을 지닌 영상물을 지칭한다. 장르적으로는 스토리를 담고 있는 서사영화에 가까워 보이지만 실은 시네마의 조건은 내용보다 형식이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어떤 예술이 충격을 준다면 그것은 형식 때문”(로베르 브레송)이고 시네마는 오랜 시간 그 형식을 탐구하고 축적해왔다.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될 수 있겠지만 나는 그 핵심이 ‘시간을 공간화’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선 뒤에서 좀더 자세히 논의하겠다. 내러티브는 그중 몇몇에 의해 자주 사용되는 방식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여기서 생각해볼 문제는 시네마와 시네마틱의 구분이다. 리얼과 리얼리티가 다른 것처럼 ‘시네마틱’이란 표현은 시네마의 어떤 특성을 닮았다는 의미다. 나는 이것이 어떤 특별한 순간을 담아내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스토리와 내러티브 너머 전달 가능한, 모두가 비슷하게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각자 다르게 체험하는 감각들. 감각과 인상을 전달하는 언어로서의 영상. 그것이 시네마다. 보편적으로 ‘시네마’는 그저 ‘영화’를 뜻하지만 오랜 세월 지향해온 가치, 축적된 결과들이 거기에 특권적인 위치를 부여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코시즈는 “마블 ‘영화’는 시네마가 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이고 이는 전혀 모욕적인 발언이 아니다. 다만 목적과 방향이 다른 종류의 결과물이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조차 어디까지나 마틴 스코시즈의 체험에 기반한 하나의 견해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나 <로건> 등의 슈퍼히어로영화들은 나에게 시네마적인 감동과 순간들을 안겨줬다”는 봉준호 감독의 발언처럼 누군가는 시네마의 순간들을 마블 영화에서 발견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시네마는 일종의 체험적인 개념이며 시대와 상황, 위치에 따라 달리 적용되기 마련이다. 같은 이유로 이 질문은 영화의 패러다임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어야 한다. 시네마의 의미와 정의를 되묻는 건 ‘예술로서의 영화’의 위치 설정을 다시 하기 위함이다. 요컨대 시네마에서 중요한 건 학습된 시간과 사례로서의 체험이다.
시간의 공간화, <아이리시맨>과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차이
<아이리시맨>은 한편의 영화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는 이 발언이 당연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했다. 언젠가 크리스토퍼 놀란은 극장에서 견딜 수 있는 최대의 시간이 180분이기에 자신은 그 안에서 영화를 만든다고 밝힌 적이 있다. 90~100분이란 포맷이 필름의 물리적 제한으로 인해 발생했다면 디지털 시대에 상영시간의 제한은 관객의 집중력, 그리고 극장의 사정에 의해 결정된다. 209분에 달하는 <아이리시맨>과 180분에 달하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은 목적지가 전혀 다른 영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방향이 다르다. 자잘한 차이는 무시하고 근본적인 방향을 비교한다면 온전히 한편의 영화인가 아닌가 하는 점에서 갈린다. <아이리시맨>은 상영시간과 무관하게 한 호흡으로 달려가는 영화다. 세개의 시간 축을 포개어놓은 <아이리시맨>은 회상의 형식으로 과거를 ‘내레이션’한 끝에 늙어버린 로버트 드니로의 육신 안으로 수렴된다. 이것은 분리가 불가능하며 장면의 배치나편집이 뒤바뀌는 순간 전혀 다른 영화가 되어버린다. 마틴 스코시즈라는 시점에 의해 고정된 한 덩어리의 결과물이라는 말이다.
반면 <엔드게임>은 사정이 다르다. 이 영리한 프랜차이즈 영화는 세개의 독립된 에피소드가 나란히 붙어 있는 형태에 가깝다. 드라마 에피소드 3편으로 따로 나왔다고 해도 별반 이상할 것 없으며 다소의 편집이 달라졌다고 해도 전반적인 흐름에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요컨대 분리된 시퀀스들의 느슨한 조합에 가까운 덩어리들의 합이다. 같은 3시간이라고 해도 이와 같은 감각의 차이는 절대적이다. <아이리시맨>은 마틴 스코시즈의 통제 아래 각 배우들의 얼굴이 서로를 응시하며 만들어낸 내적 동요들의 연쇄다. 반면 <엔드게임>은 명확한 목표 아래 그려진 이미지에 가깝다. 둘 다 CG를 활용한다해도 <아이리시맨>은 ‘찍은 그대로의 속성’이라는 필름의 본질을 따르고 있으며 <엔드게임>은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의 특질을 구현하고 있다. <아이리시맨>이 집중에 방해되는 쪽을 제거하면서 본질에 도달하는 방식을 취했다면, <엔드게임>은 최대한 상세하고 많은 정보를 덧붙여 설명을 보태어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아이시리맨>이 장대한 인생의 많은 부분을 잘라내고 생략해 겨우 3시간이란 실재(혹은 또 다른 인생)를 창조해낸 영화라면 <엔드게임>은 3시간 안에 머물지 않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10년의 세월 바깥쪽으로 확장되어나가는 영화다. 만약 내게 ‘영화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지금은 시간을 공간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답하겠다(<영화에서의 양식과 매체>, 에르빈 파노프슈키 지음). 흘러가는, 붙잡을 수 없는 추상적인 움직임을 공간에 붙들어매 물질화시키는 것. 그것이 영화, 아니 시네마의 한 형태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리시맨>이나 <엔드게임> 모두 시네마틱한 순간들을 품고 있다.
시네마는 결정짓지 않는다. 정확히는 내러티브 안에서 결정되지 않는 관객과의 사이에서 의미를 발생시킨다. <아이리시맨> 중 프랭크의 노조 공로상 축하연 장면은 ‘보고 있다’는 행위를 자각할 수 있는, 거리를 발생시키는 대표적인 순간이다. 지미 호파(알 파치노)와 러셀 버팔리노(조 페시)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 프랭크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은 드디어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이 장면을 프랭크가 멀리 떨어진 단상에서 바라보고 있다. 프랭크는 이제껏 사건을 수행하던 입장에서 벗어나 비로소 관객과 같은 위치에 선 관찰자가 된다. 멀리서 바라본 지미와 러셀의 동작과 표정들, 친밀한 듯 서로를 경계하는 몸짓 끝에 끝내 뒤돌아 갈라서고 마는 일련의 움직임은 어떤 대사보다 묵직한 진실들을 전달한다. 이 장면은 프랭크가 관객의 위치에 서는 장면인 동시에 관객이 프랭크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 상황을 응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스코시즈는 파티장이란 공간을 빌려 갈등의 시간을 직접 ‘보여준다’. 유려한 편집과 시점 이동을 통해 서사 이상의 감흥들을 체험시키는 것, 그게 스코시즈의 시네마다.
<엔드게임>을 시네마로 부를 수 있는 날이 올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럴 필요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나는 <엔드게임>에도 시네마틱한 순간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과거로 직접 시간여행을 하는 이 영화는 3시간 안에 머물지 않고 전작들, 그러니까 지난 10년의 세월들을 향해 물리적으로 이동해버린다. 시간여행을 통해 <어벤져스>(2012)의 뒷무대 이야기를 들려줄 때 이 영화는 마치 <보이후드>(2014)처럼 별개의 분리된 시간대를 기억의 형태로 소환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체험을 아직 ‘시네마’라고 명명할 수 있을진 확신이 없다. 다만 ‘시네마틱’이 어트랙션과는 다른 체험, 스토리 이상의 감각을 선사한다는 의미라면 <엔드게임>에도 분명히 그 순간들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물론 그것을 고전적인 의미의 시네마의 개념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다. 여기엔 차라리 ‘무빙 픽처’(moving picture) 같은 새로운 용어가 어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시네마라는 용어가 의미를 제한하고 구획을 한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외연을 확장하는 쪽으로 사용되기를 희망한다. ‘시네마’라고 불리는 행위에서 무엇을 느끼고 발견할 것인가. 끊임없이 의미를 갱신하고 이동하는 가운데 새로운 좌표 찍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이름표 같은 건 별반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속되어야 할 것은 영화의 형태를 더듬어가는 질문, 그리고 각자의 경험들이다. 영화적 체험은 축적되고 연결되어 풍요로워진다. 이른바 레퍼런스가 끊임없이 갱신되고 공유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레퍼런스의 레퍼런스의 레퍼런스들
레퍼런스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감독 중 한명이 바로 쿠엔틴 타란티노다. 타란티노가 은퇴를 예고했던 열 번째 작품에서 하나 모자란 이 영화를 보며 어쩐지 타란티노의 은퇴 결심이 납득이 됐다. <할리우드>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중에서 가장 정적이고 절제된 영화다. 마지막 30분 유혈이 낭자한 시퀀스에 도달하기 전까지 타란티노는 스스로의 욕망을 제어하고 또 제어한다. <할리우드>를 지배하는 건 애잔한 향수의 정조다. 타란티노는 이전 영화들에 비해 유례없이 일상의 시간들을 자주 전시한다. 이를 일련의 미학적인 리듬과 응축을 만들길 위함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테지만 속사정은 조금 달라 보인다. 본래 타란티노의 비범함은 탈출 불가능한 공간에서 휘몰아치는 폭력의 세팅에 있다. 극단적인 폭력이 재현되기 전까지 인물과 상황을 옭아매는 서스펜스의 세트피스야말로 타란티노의 본질이다. <할리우드> 역시 맨슨 패밀리를 응징하는 마지막 30분 시퀀스의 쾌락을 위해 앞선 두 시간가량을 투자한다. 언덕 위 집,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에서 일어나는 활극은 정당성 따위 따질 것도 없이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제공하는데 그것이야말로 타란티노가 늘 구현해왔고 하고자 했던 영화의 본질, 시각적인 쾌락의 종착지다. 다만 타란티노 영화에선 거기에 이르는 길이 거의 별개의 영화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조각조각 단절되어 있다. 가령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의 각 시퀀스는 개별로 훌륭한 서스펜스를 자아내지만 동시에 독립적이다. <할리우드>는 비슷한 듯 조금 다르다. 시퀀스마다 벽이 세워져 있는데 개별 시퀀스들은 대체로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마지막 비윤리적인 폭력을 정당화할 도덕적 명분의 축적, 다른 하나는 그저 그 자체로 선보이는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다.
전자는 장르의 느슨한 공식에 가깝다. 맨슨 가족에게 가차 없는 폭력을 행사해야 할 최소한의 알리바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인물에 따른 공간과 인물을 철저히 분리시킨다. 가령 희생자인 샤론(마고 로비)이 머무는 안락하고 행복한 공간으로서의 집과 맨슨 패밀리가 머무는 음산하고 소외된 공간으로서의 집은 완벽하게 구분된다. 캐릭터를 과장하고 역할을 고정함으로써 응징까지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1차원적인 장치다. 하지만 이 레퍼런스들의 진짜 목적은 후자, 그러니까 장면마다 맺혀 있는 고전 할리우드 시대에 대한 향수에 있다. <할리우드>는 언제나 핵심이었던 마지막 피칠갑 액션조차 할리우드 시대에 대한 그리움을 강조하기 보여주기 위해 의무적으로 배치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될 정도로 애잔함은 벗어나지 못한다. 한물간 스타 릭의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당대 배우들의 아카이브 푸티지와 각종 소품들이야말로 타란티노의 영감이자 시작이며 타란티노가 재현하는 본질 그 자체인 셈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타란티노의 황혼을 느낀다. 그에겐 영화가 레퍼런스의 응축과 재배치의 놀이였다. 하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할리우드의 악동은 거장이 되었고, 타란티노가 유희의 대상으로 삼을 시대는 저만큼 지나가버렸다. 정확히는 젊은 관객과 대중의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다. 영화를 농락하고 찧고 까불며 노는 게 핵심인 타란티노에게 있어 그것은 일종의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타란티노는 은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당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 샤론이 극장 안에 앉아 자신의 출연작 <레킹 크루>(1968)를 관람하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유독 아름답고 평화롭게 묘사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신의 영화에 흠뻑 취한, 얼핏 유치해 보이기까지 한 장면은 실존 인물인 테이트와 샤론을 완벽하게 분리시킨다. 실화와 재현, 사실과 이야기를 구분짓는 두터운 경계가 발생하는 그 장면이야 말로 타란티노가 레퍼런스로부터 출발했지만 독창적인 창작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비결이고, 순수한 영화적 욕망의 구현이며, 타란티노가 시네마에 바치는 진정한 헌사다.
타란티노의 시네마가 그렇게 시대의 물길에 밀려감을 느낄 때 또 다른 시네마가 찾아왔다. 바로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언더 더 실버레이크>다. ‘미쳤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 영화는 서브컬처와 음모론을 가지고 히치콕이 연상되는 서스펜스의 그물망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뛰어논다. 온 기력을 다해 무기력한 상태를 그리고 있는 앤드루 가필드의 샘은 실체가 없는 세계에서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헤맨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 역시 할리우드의 각종 레퍼런스들을 연결고리로 삼지만 동시에 그것을 철저히 지우고 고리를 끊어낸다. 그리하여 과잉된 이미지들 위를 떠도는 감각 그 자체를 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2018년 칸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었을 때 언론은 영화에 대한 실망감을 쏟아냈다. 대체로 “난해하고 종잡을 수 없다”, “이미지의 과잉이다”라는 이유였는데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의 근간이자 핵심이며 주목해야 마땅할 본질이다. 샘은 음모를 따라가며 질문하는 것처럼 보이지민 실상은 그의 행위에는 목적이 비어 있다. 반드시 행동해야 할 내러티브의 명분은 제거되고 꿈과 환상을 넘나들며 혼란스러운 욕망이 직접 이미지를 통해 반복, 전시된다. 그것은 곧 실체와 근간이 사라진 세계에서 욕망이라는 상태만이 남은 현실의 반영이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에는 사건과 단서들의 파편이 애니메이션과 꿈, 판타지의 형태로 혼란스럽게 제공될 뿐 맥락이 제거되어 있다. 마치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오리지널을 잊어버리고 변형된 형태 그 자체를 즐기는 오늘날의 우리 모습처럼 말이다. 이 영화의 비범한 점은 오리지널이 지워진 상태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동시에 그것을 매우 고전적인 서스펜스 기법과 틀 안에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내내 인물로 하여금 무언가를 응시하도록 방향을 제시하지만 결국 (답 혹은 범인으로 추정되는) 실재를 바라보는 행위는 끊임없이 실패한다. 관객이 목격하는 건 응시에 실패한, 그러니까 실체가 없음을 확인한 상태다. 요컨대 실패를 지속시키지만 실은 이건 실패가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실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이미지와 환영 위에 서 있는 이미지들의 총합이다. 말하자면 레퍼런스의 레퍼런스에 대한 레퍼런스들이 뭉쳐 있는 결과물이다. 그러면서도 샘이 끈덕지게 실체 없는 무언가를 추적해나갈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주는 건 서스펜스의 망을 짜나가는 방식 자체가 선명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감독은 레퍼런스가 사라진 시대에 과거 레퍼런스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열심히 미로 안을 맴돈다. 로베르 브레송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실된 것들은 모방이 불가능하고, 거짓된 것들은 변형이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남겨지는 것은 맴돌고 헤맨다는 움직임, 무언가 여기 존재했다는 그 흔적들이다. 고전적인 방식으로 장면을 재현한 끝에 ‘거기에 진실이 없다’는 진실을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이미지 과잉의 시대, 오리지널이 사라지고 복제된 이미지 위를 떠도는 시대를 증명한다. 타란티노가 즐기고 노는 시네마(이를테면 히치콕 영화들)의 종언을 깨닫고 문을 닫는 쪽을 택했다면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은 과거의 형식으로 과감히 실패하는 쪽을 택한다. 이 실패의 운동이야말로 동시대 시네마의 상태라 할 만하다.
이미지의 마법, 잃어버린 가능성을 찾아서
마지막으로 단상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디즈니가 또 디즈니해버린, 영리한 공산품 <겨울왕국2>는 <라이온 킹>이나 <토이 스토리4>와는 또 다른 감흥을 안겨주었다. 기계적으로 평가하자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전개의 평이한 영화였지만 흥미를 자극하는 두 가지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크리스토프의 철 지난 뮤직비디오 신, 그리고 올라프가 해설해주는 스토리 요약이다. 그중 스토리 요약 장면은 내러티브의 본질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즐기는 건 어쩌면 내러티브의 과정이 아니다. 관객은 이야기 덩어리와 몇몇 장면들, 그리고 이미지의 순간을 기억한다. <겨울왕국2>는 스토리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대신 사건을 부지런히 연쇄시킨다. 그리고 사건과 사건 사이 감정의 행간은 생략한다. 정확히는 제시하되 설득하진 않는다. 그게 가능한 건 <겨울왕국2>의 설득방식이 여느 내러티브 영화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요체는 뮤지컬과 (애니메이션이란 이름의) 마법, 두 가지다. 장면의 기술적 완성도를 끝까지 밀어붙여 도달한 곳은 눈에 보이는 것이 곧 진실이 되는 영역이다. 그리하여 <겨울왕국2>는 메시지와 형식이 분리되지 않는, 분리하지 않아도 좋을 자유를 얻는다. 엘사가 마법을 왜, 어떻게 쓰는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저 전설의 노래를 부르고 마법을 쓰는 걸로 충분하며 대부분의 시간은 그 과정과 유희로 메워져 있다.
덕분에 엘사와 안나의 캐릭터는 평면적이기 그지없다. 그들은 시련을 통해 성장하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러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로 배치된다. 이후 시련이 입력되면 자연스럽게 고정된 캐릭터의 반작용을 출력한다. 엘사는 위기에 처하면 홀로 위기를 감당하기 위해 달려나가고, 안나는 위기에 봉착하면 고통스러워도 다음 일을 생각하며 걸음을 내딛는다. 가령 엘사가 위기에 빠진 걸 알아차린 안나는 잠시 좌절하더니 정해진 수순대로 <The Next Right Thing>을 부르며 일어난다. 노랫말 안에는 일어서야 하는 이유와 과정이 모두 담겨 있다. <겨울왕국2>는 안나의 감정적 변화를 지켜보고 공감시키는 대신 일련의 감정을 한편의 노래에 담아서 짧은 시간에 축약해 제시한다. 요컨대 설명의 시간을 사운드와 이미지의 힘을 빌려 생략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여명기 시네마가 품고있던 직관의 힘이다.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보여주기. 상업애니메이션 최전선에서 선보인 재현의 메커니즘은 영토를 빼앗기고 있는 시네마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기술의 끝자락에서 도달한 오래된 미래를 마주하며 문득 로베르 브레송이 남긴 나침반과 같은 문구를 떠올린다. “네 필름은 미완성이다. 그것은 네 필름을 보는 누군가의 시선 아래에서 누군가의 시선에 따라서 만들어진다. 이미지와 소리의 조각들은 완성을 위해 항상 겸허하게 기다리고 있다.” (<시네마토 그래프에 대한 단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