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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슨 웰스와 테리 길리엄, 감독을 매혹하는 돈키호테

돈키호테적 서사는 자기반영적 농담인가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저주받은 프로젝트 혹은 결코 완결될 수 없는 작품, 지난 30여년 동안 악운이 겹치며 번번이 무산돼왔던 테리 길리엄의 시대착오적 소동극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작품은 2018년 칸국제영화제 폐막식으로 선정되어 기대에 부푼 관객에게 처음 소개되었다. 우스꽝스럽고 서글픈 초현실주의 코미디로서 테리 길리엄의 독창적 상상력을 반영하는 작품이라는 반응에서부터 난삽하고 파편적인 근래 작품들의 결함을 이어받았다는 반응까지 평가는 다양했다.

냉혹한 현실을 부정한 채 망상에 빠진 자라는 모티브는 테리 길리엄이 이미 <피셔 킹>(1991)에서 보여주었다. 시대착오적 모험담의 주인공이 미치광이라는 설정은 <바론의 대모험>(1988)과도 상통한다. 이성과 계몽의 시대에 상상과 판타지의 권능을 예찬하던 바론 남작, 이미 사라진 궁정연애와 기사도의 세계를 향수하는 돈키호테는 모두 시대착오적 광인이다. 몽상의 시대에서 CG의 시대로 영화 패러다임이 바뀌었음에도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는 감독 테리 길리엄의 경우도 유사하다. 그가 펼치는 편력담은 바로크적 세계관을 상기시킨다. “바로크적 관점에서 세계는 인간이 지은이를 알 수 없는 한편의 희곡을 그 의미도 모른 채 보이지 않는 관객 앞에서 공연하고 있는 무대”(제라르 주네트)다. 환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바로크 연극과 마찬가지로 테리 길리엄 역시 자신의 영화에서 미장아빔(Mise en Abyme, 액자기법) 혹은 극중극을 적극 활용하거나 ‘세상은 연극 무대’라는 모토를 비유가 아니라 직설적으로 사용해왔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확장하는 돈키호테 서사

보르헤스가 <돈키호테>에는 “무한적용의 테크닉”이 발휘된다고 하였던 바(<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중), 이 마법 같은 책에는 참으로 많은 판본이 있으며 작가인 세르반테스도 책의 2부에서 작품의 진위 여부와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반영적 농담을 반영하기조차 했다. 단일한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무한히 복제되고 증식하는 판본들, 자기 충족적으로 완결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다시 써내려지면서 앞선 판본에 뒤의 판본이 겹쳐 써지는 상호텍스트성이야말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보여준 놀라운 근대성이었다. 영화의 세기인 20세기 이후로도 이 책은 피터 오툴이 등장하는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1972)에서부터 오슨 웰스의 문제적 프로젝트 <돈키호테>(1992), 알베르트 세라의 명상적 무훈시 <기사에게 경배를>(2006)에 이르기까지 영화적 판본도 거듭 만들어졌다.

설정은 이러하다. 스페인에서 보드카 광고 촬영을 하는 CF감독 토비(애덤 드라이버)는 의욕 상실과 상상력 고갈에 봉착해 있다. 그는 우연히 과거 자신이 촬영한 졸업작품이자 출세작인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의 DVD를 보게 된다. 그는 근처에 있던 당시의 영화 촬영지를 방문하고 뜻밖의 장소에서 과거 자신의 영화에 돈키호테 역으로 출연했던 구두수선공 노인 하비에르(조너선 프라이스)를 만난다. 노인 하비에르는 자신이 돈키호테라는 망상에 빠져 있는 데다 토비를 산초 판자로 착각하기까지 한다. 하비에르와 토비는 어설픈 돈키호테와 산초로 분한 채 기이한 편력을 시작한다. 이후 등장하는 이슬람교도들의 여관, 신비한 동굴 체험, 성에서의 가장무도회 등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들이다.

<맨 오브 라만차>

“나는 이 철의 시대에 잊혀진 기사도를 다시 세워야 한다. 나는 라만차의 돈키호테다.” 영화는 이렇게 선언하며 돈키호테가 종복 산초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스스로를 라만차의 기사로 명명하며 편력의 길을 떠나는 오프닝 시퀀스는 사실 주인공 토비가 찍는 보드카 광고의 한 장면이다. 자신의 상관의 아내와 밀회를 가지려고 하던 호텔방에서 그가 보는 장면 역시 돈키호테가 자기를 명명하며 모험을 떠나는 장면이다. 자신의 옛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이 영화의 제목과도 같은 이 영화의 오프닝 장면은 극중 극으로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를 접하며 토비는 광고 속 돈키호테의 세계는 가짜(허상)이고 영화 속 과거 자신이 추구하던 것이 진실(원본)이라는 묘한 향수에 젖어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돈키호테가 모험을 떠나는 장면은 토비가 낡은 자동차극장에서 자신의 영화를 우연히 관람할 때 다시 등장한다. 여기서 자신의 과거 작품이 진실(원본)이라 여기던 토비는, 망상에 빠진 노인 하비에르(자신을 돈키호테라고 착각하는)를 만나는 순간 혼란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이 자기 명명은 하비에르의 죽음 이후 이제 자신을 돈키호테로 여기는 토비의 입을 통해 반복되며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게 된다.

물론 돈키호테라는 광인 캐릭터를 현대성의 세계에 소환시키는 상상력을 테리 길리엄이 처음 선보인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돈키호테는 오슨 웰스의 저주받은 프로젝트였다. 그의 <돈키호테>는 1957년부터 이후 30여년간 멕시코와 스페인 등지에서 간헐적으로 촬영되었다. 결국 영화를 완성시키지 못한 채 오슨 웰스가 사망하자 그의 반려자였던 오야 코다가 미완성 프로젝트를 편집해 1992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이를 공개했다. 개봉 제목이 <당신은 언제 돈키호테를 완성할 것인가?>가 될 뻔했던 이 작품은 현대에 뛰어든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의 착란적 모험을 다루었다.

<바론의 대모험>

테리 길리엄이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

시대착오적 인물의 편력담인 돈키호테 텍스트는 오슨 웰스에게도 테리 길리엄에게도 자신의 영화적 삶을 반영한 것이기에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감독 자신에 대한 자기반영적 발언을 영화 속에 넣고 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오슨 웰스가 작품에 직접 카메라를 들고 등장해 스페인에서 돈키호테 영화를 찍겠노라 인터뷰하고, 이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현대로 소환된 산초가 보고 있다. 테리 길리엄의 영화에 등장하는 토비는 명백히 감독 자신의 페르소나다. 그리고 묘한 점은 두 작품 모두 원작이 품은 시대착오성으로 ‘영화’와 만난다는 점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세속화 예찬>에서 오슨 웰스의 <돈키호테>의 한 장면을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6분”이라 말한 바 있다. 장면의 시작은 종복 산초가 돈키호테를 찾아 시골 마을 영화관에 들어가는 데서 시작한다(타인의 손에 의해 편집된 칸 공개 버전에는 이 장면이 빠져 있다). 산초는 극장에서 돈키호테를 찾지만 다가가지 못한다. 상영되는 영화 속엔 무장한 기사들이 말을 타고 한 여자를 위협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영화를 지켜보던 돈키호테가 일어나 갑자기 스크린으로 돌진하여 스크린을 찢기 시작한다. 스크린은 암전되고 관객은 떠나지만 아이들은 이를 열렬히 환호한다. 허구(기사 이야기)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돈키호테는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피셔 킹>

오슨 웰스와 마찬가지로 테리 길리엄도 원작 내용의 재현을 넘어서 원작의 형식인 자기반영성과 상호텍스트성을 활용했다. 앞선 웰스의 장면과 유사한 장면이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도 등장한다. 스페인의 시골 마을에서 돈키호테의 표지판을 보고 찾아간 곳에서 살아 있는 돈키호테를 보여주겠다는 노파를 만난다. 그는 돈을 내고 트럭에 설치된 이동식 극장에 들어가는데, 그 안에는 자신이 대학 시절 촬영한 돈키호테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극장의 스크린 뒤에는 과거 영화에서 돈키호테 역할을 맡았던 노인 하비에르가 감금된 채 영화 내레이션을 하고 있었다. 산초의 모습에 토니의 얼굴이 겹치고 찢겨진 스크린 너머 돈키호테는 토비를 보고 그를 산초로 착각한다. 영화라는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세계에 진입한 자가 현실과 영화를 구분하지 못한 채 그 속으로 돌진하여 스크린을 찢고 그 너머의 세계로 간다. 이는 사실 이전에 테리 길리엄의 <바론의 대모험>과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2009) 같은 현란한 바로크극들이 이미 보여준 설정들이기도 하다.

오프닝에서 흰색 상하의 슈트에 흰 모자를 쓴 토비의 의상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차차 변하게 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우선 토비가 상사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려다 도망칠 때 그는 검은 모자를 집어든다. 이 검은 모자의 주인인 집시는 기이하게도 토비가 가는 곳마다 등장하며, 영화의 초반 그에게 졸업작품 DVD를 건네는 것도 그다. 검은 머리의 집시는 우연히도 결정적 순간마다 등장하고 때로 토비와 오인되기도 한다.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21세기 영화에 고하는 패배선언

나는 이 집시와 같은 캐릭터를 <바론의 대모험>에서 본 적 있다. 주인공인 허풍선이 바론 남작의 주위에는 늘 검은 베일로 된 옷을 입고 낫을 든 사신이 등장한다. 사신은 때로 다른 인물로 변신한 채 바론의 주위를 배회한다. 필멸의 운명에서 벗어나 기상천외한 모험을 하는 바론의 곁에 죽음이 배회하는 것처럼,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서도 영화 전반적으로 죽음의 무드가 깔려 있으며 이를 상징하는 것이 검은 머리 집시며, 아마 그는 토비의 도플갱어일 것이다. 어쩌면 토비가 젊은 시절 영화 찍던 마을인 수에노스(단어의 의미는 ‘꿈’이다)로 향하는 장면에서부터 죽어 있던 것일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가 방문한 수에노스 마을에서 예수의 고난, 죽음, 부활로 이어지는 ‘성주간’(Holy Week) 가장행렬이 이루어지고 있음도 인상적이다. 영화 속 사람들은 스스로를 돈키호테로 착각하는 하비에르와 산초 취급 당하는 토비를 가장행렬 인물로 착각한다. 성주간의 가장행렬 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성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가장무도회 장면과도 이어진다. 광고주인 보드카 회사 사장이 광기에 빠진 하비에르(돈키호테)와 토비(산초)를 골탕먹이기 위해 16세기 기사도의 시대처럼 꾸민 성에서 가장무도회를 연다. 그리고 영화 촬영 스탭들을 동원해 하비에르(돈키호테)에게 사악한 마법사와 맞서는 모험을 경험하게 한다. 이 작품에서 ‘영화’란 21세기의 사악한 마법이다. 광기에 빠진 순순한 몽상가를 기만하고, 그를 우스꽝스러운 구경거리이자 싸구려 스펙터클로 전락시킨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적 인물이 돈키호테적이지 않은 세상과 대적할 때 벌어지는 서글픈 상황을 풍자와 해학으로 승화시켰다. 테리 길리엄은 동시대 영화의 세계를 자신과 대적하는 세계로 인식하고 있는지 모른다. 몽상과 상상력만으로 놀라운 영화 세계를 만들어내던 시대를 지나, CG 디지털의 시대가 되자 테리 길리엄의 영화는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 채 힘을 잃었다. <그림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2005)이나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처럼 CG를 한껏 활용하여 이미지의 권능을 과시한 영화들이 도리어 앙상하고 초라했다. 이번 영화의 대사 속에서 주위 사람들이 토비를 두고 CG를 싫어하는 감독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감독의 페르소나인 토비가 영상사업이라는 거대한 괴물에 기만당한 채 돈키호테를 (상징적으로) 죽이고 그 죄책감을 잊기 위해 망상 속에 빠져 스스로를 돈키호테라 선언하고 모험을 떠나며 끝난다. 이는 20세기 영화가 21세기 영화에 내리는 패배 선언이며, 망상과 광기 없이 할리우드에서 생존할 수 없음에 대한 성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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